“너희들은 며칠 전부터 여기에서 죽치고 있던 것 같은데, 그건 왜지?”
“뭐... 이젠 말해줘도 되겠지. 사실 도둑길드에 우리가 심은 스파이가 최후의 아티팩트를 훔쳐 여기로 오면 우리가 그걸 들고 도망칠 생각이었어. 그런데 쿠샤나바 놈들이 설마하니 도둑길드의 간부를 전부 죽여 버리고 그걸 차지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
아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방심한 거겠지. 당연히 방심할 수밖에 없다. 죽은 줄 알았던 아딘의 애인 카멜리아가 살아 돌아왔으니 얼마나 반갑고도 놀라울까. 그리고 카멜리아는 그걸 이용해서 일순간에 전부 죽여 버렸어.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독사처럼 변한 걸까, 카멜리아는.
“그럼 너희가 최후의 아티팩트 전담 유물단이었군.”
“그런 셈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임무네. 그러면 보상은 서해회사 이사회 내 자리 보장이야?”
“의외로 날카롭네.”
“결국 권력이구나.”
아딘이 입을 다물고 있지 이번에는 레이라가 말을 건다.
“너는 복수를 하고 싶은 거야?”
“응.”
“그럼 잘 왔어. 여기가 바로 쿠샤나바 때려잡기 아주 좋은 곳이지. 동시에 쿠샤나바에게 죽기도 딱 좋은 곳이고. 몇 주 전에도 동료 한 명이 당했지.”
“동료가 죽은 걸 담담하게 말하네?”
“그게 뭐.”
아딘은 어깨를 으쓱인다.
“뭐라고 해야 하나, 동료가 죽으면 좀 슬퍼하는 게 보통이잖아.”
레이라는 씩 웃는다.
“감정 따위, 불필요한 찌꺼기에 불과해.”
아딘은 딱히 대꾸는 하지 않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네 말대로라면 난 불필요한 찌꺼기에 휘둘려 사는 건가.
너와 나는 참 다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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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커다란 착각을 했어.”
아딘은 우두커니 서서 새로운 동료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햇빛이 내리쬐자 카릴은 덥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머리 위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샘에 들어간 채 몇 시간 동안이나 안 나오고 있다. 저기에 내가 피 엄청 쏟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자약하게 몸을 담글 수 있지?
블뢰즈는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검술 수련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불과 물은 서로 보합하는 관계이며 충돌하나니, 하압! 횡베기! 으음. 날카로움이 좀 부족한가. 그리고 바람과 돌은......”
레이라는 가만히 누워서 멍하니 있다. 언뜻 보면 셋 중에서 가장 정상 같지만 뜬금없이 실실 웃거나 눈매를 잔인하게 번득인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머릿속에 프린의 목소리가 울린다.
〈진짜 이상한 놈들이네.〉
“네가 추천했잖아.”
〈그것보다 이놈들 모험 안 해. 왜 계속 여기 죽치고 있지?〉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차였어.”
아딘은 레이라의 옆으로 다가간다.
“레이라.”
멍하니 있던 레이라는 갑자기 아딘을 부릅 노려본다.
“단장님이라고 불러.”
“...단장님. 우린 왜 여기 눌러 붙어 있는 거야?”
“다음 임무가 도착해야지. 그런데 우리는 임무를 막 실패한 참이고, 그것도 어제 밤에 급하게 전령을 보냈어. 그게 도착하고, 다시 임무 배정받으려면 시간이 필요해. 응?”
레이라는 무언가를 들은 듯 이리저리 목을 돌린다. 그러더니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딘도 따라 본다. 뭔가가 날아온다.
“부엉이잖아? 단장, 저게 전령이야?”
“맞아.”
레이라는 팔을 거치대처럼 들어올린다. 그러자 부엉이가 레이라의 팔을 잡고 착지한다. 멋있는 회색부엉이이다. 레이라는 부엉이가 입에 물고 있는 봉인된 문서를 집어든다.
“신입. 부엉이 좀 들고 있어 봐봐.”
“그래도 돼? 으, 으음.”
아딘은 조심스럽게 회색 부엉이를 안았다. 의외로 저항하지 않고 아딘의 품에 폭 안겨준다. 쓰다듬으니 보드라워서 기분 좋다.
레이라는 문서를 읽어나간다.
“급보. 석류의 위치를 파악. 동봉된 지도에 위치 표시. 곧바로 임무에 착수하라.”
“석류라니?”
“열쇠를 말하는 거야.”
레이라는 문서를 품에 쑤셔 넣고 블뢰즈와 카릴을 향해 소리친다.
“이제 농땡이는 끝이니까 모두 모여! 열쇠를 손에 넣으러 간다. 여기서 멀지 않아.”
검술수련을 하던 블뢰즈는 바로 검을 집어넣고 레이라에게로 온다. 그에 비해 카릴은 한껏 미적대며 샘에서 빠져나와 대강 물기를 털고 온 몸을 덮는 후드를 입는다. 거기에 더해 커다란 보호안경도 쓴다. 카릴은 아딘 옆에 와 그의 가슴팍을 툭 친다.
“신입. 한 번 도둑길드의 실력 발휘 좀 해봐.”
“그거야 해봐야 알죠.”
아딘은 심호흡을 하며 카멜리아를 떠올린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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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를 타던 카멜리아는 햇빛이 작열하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멈춰 선다. 너무 지친 나머지 낙타가 크게 숨을 헐떡인다. 잠시 쉴 겸 낙타에서 내려선 카멜리아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움찔하며 얼굴을 찌푸린다.
“아직도 아프잖아, 제길.”
카멜리아는 품속에서 나침반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본다. 여기가 맞아. 카멜리아는 나침반을 도로 집어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쿠샤나바가 서로를 부를 때 쓰는 특유의 휘파람 음색이 밤 아래 조용히 울려 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로부터 퍼득퍼득 소리가 들려오더니, 커다란 독수리가 카멜리아 앞에 착륙한다. 독수리의 등 위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가 타고 있다.
“카멜리아. 물건은?”
카멜리아는 대답 없이 최후의 아티팩트의 열쇠를 품에서 꺼내 그 자에게 건넨다. 그 자도 팔을 뻗어 열쇠를 집는다. 갑주에 둘러싸인 그의 손이 가까이 다가오자 소름 돋을 정도의 냉기가 느껴진다.
“언제나 우수하군. 어머님께서 자네를 귀여워할만 해.”
카멜리아는 또 대답 없이 눈길을 돌린다.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뭐 상관없지. 그러면 곧바로 또 다른 임무를 전달하마.”
그 자는 품에 열쇠를 집어넣고 지도를 꺼내 건네준다.
“이 지도에 표시된 지점으로 가. 여기서 가깝다.”
“임무는 뭡니까?”
“그곳에 또 다른 열쇠가 있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다. 이 보따리도 받아라. 이번에는 유물단과 정면충돌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준비 단단히 하도록. 그럼.”
얼굴 없는 자는 독수리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린다. 그러자 독수리가 찢어지는 듯한 고음을 내며 날개를 퍼덕여 하늘 높이 난다. 카멜리아는 하늘 위로 사라져가는 독수리를 올려다본다.
카멜리아는 다시 낙타 위에 올라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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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골 마을 ‘흐루’에 사는 소녀, 갈란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보고 잊어버리는 사람은 없다. 갈란의 외양은 기억하고 싶어도 할 수 밖에 없다.
까마귀 깃털로 장식한 고깔모자를 우쭐거리며 걸어 다니고, 쥐의 머리뼈로 만든 허리띠를 찰랑거리며, 항상 옆구리에는 무사가 칼을 차는 것 마냥 이상하고 두꺼운 서적을 끼고 다니고, 옷은 무슨 거적떼기를 여기저기 붙여서 만든 걸 입고 다닌다. 그리고 노인도 아니면서 까마귀 해골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럼에도 얼굴은 귀염상이라 항상 마을 사람들에게 귀염 받는다.
아니, 귀염 받을 수밖에 없다. 갈란은 이 시골 마을의 토착종교인 까마귀 교의 무녀이다. 귀염 받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다.
그래서 갈란이 지금처럼 마구 이웃집의 문을 두드려도 혼나지 않는 것이다.
“어머~ 갈란이구나!”
문이 열리고 후덕한 아주머니가 나타나 무릎을 꿇어 갈란과 눈높이를 맞춘다. 갈란은 목소리롤 잔뜩 내리깔고 말한다.
“신도이자 자매여, 자네가 부탁한 일을 완수해왔도다.”
“아이구~ 귀여워라~”
아주머니는 생글생글 웃으며 진지한 갈란의 볼을 이리저리 꼬집는다. 갈란은 부들부들 떨다가 빽 소리 지른다.
“무엄하도다! 나 무녀를 능멸하고자 하는 것이냐!”
“화내는 것도 귀엽네~ 아이고, 노려보지 마렴. 호호호! 그래, 우리 무녀님. 제가 부탁한 일이 뭐였죠?”
“공양 사발이다. 자네의 공양 사발이 깨졌다고 해서 내가 새로 만들어왔다.”
“아아! 그거 말이군요! 딱히 부탁한 적은 없는데, 그래도 만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내가 특별히 축복까지 내려줬도다.”
“오호호호! 그런 감사할 일까지!”
갈란은 짐짓 자랑스러운 듯 콧대가 높아진다.
“앞으로는 조심히 다루는 게 좋을 것이다. 알겠느냐?”
갈란이 공양 사발을 건네자 아주머니는 받으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리고 갈란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맞다, 무녀님. 마침 사과 파이를 만들었는데, 드시고 갈래요?”
사과파이?! 갈란의 동공이 흔들리고 입가에 침이 절로 새어나온다. 달콤한 사과파이. 새큼한 그 맛. 상상만 해도 배가 꼬르륵 거린다. 갈란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고 애써 침착한 척 큼큼 거린다.
“으음. 좋도다. 은혜를 베풀어준 보답이라면 감사히 받겠도다.”
갈란은 아주머니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간다. 코를 킁킁거리니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갈란은 입맛을 다시며 식탁에 앉는다.
“자! 무녀님~ 드세요~”
아주머니가 갈란의 앞에 사과파이를 대령한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사과, 줄줄 흐르는 달콤한 시럽, 바삭바삭한 테두리. 갈란은 학학대며 사과파이를 잘라 한입 먹는다.
“으으으음!”
뜨거워! 하지만 달콤해!
“어때요, 무녀님? 맛있나요?”
“으음으, 으으음!”
아주머니는 킥킥 웃는다.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으으므음으!”
갈란은 차곡차곡 씹어서 삼킨다. 맛있다. 그런데 순간 슬픈 기분이 든다. 내게 엄마가 있었으면 매일매일 이런 맛있는 사과파이를 먹을 수 있었을까. 에잇! 아니야. 울면 안 돼. 갈란은 화사하게 웃는다.
“이렇게 맛있는 사과파이는 처음이다!”
갈란은 사과파이를 티끌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해치웠다. 다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불러서 자꾸 트름이 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런 품위 없는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시, 신도여. 맛있었다. 고, 고맙다. 끄윽!”
아주머니는 호호 웃으며 갈란에게 우유를 건넨다. 얼굴이 빨개진 갈란은 우유를 또 단숨에 들이킨다.
“덕분에 살......”
갈란이 감사의 말을 하려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상하다. 원래 같으면 이렇게 시끄러울 일이 없는데. 누가 싸우기라도 하나. 안 돼! 우리 마을에서 절대 싸우는 건 안 돼. 갈란은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하고 우다다다 밖으로 달려 나간다. 보니까 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신도들이여. 무엇 때문에 이렇게들 모여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