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완전 미친년이구만.〉
아딘은 속삭인다.
“네가 할 말은 아니야.”
“아하하하학! 아이고, 내 배야! 내 배 떨어지겠네!”
“이봐! 그 쯤 해두고 좀 진지하게 하면 안 돼?”
“진지하게?”
그녀는 돌연 폭소를 멈추고 아딘은 멍하니 쳐다본다.
“진지? 진지? 진지하게? 방금 진지하게라고 말했어? 이제 보니까, 너.”
그녀는 아딘을 삿대질한다.
“날 웃겨 죽이려고 온 거구나! 끼햐하하하하하핫!!”
그녀는 이제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며 마구 웃어댄다. 너무 웃어대서 눈물까지 흘려대며.
아딘은 또 속삭인다.
“프린. 아무래도 네 제안은 글러먹은 것 같다.”
〈이거 완전 대가리에서 광선 쏘는 괴물 년보다 또라이네.〉
프린 왈 또라이는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으힉! 으흐흑! 크흑! 크, 크크크! 와~ 몇 년 만에 이렇게 웃어보긴 첨이네! 우리 유물단 전속 광대로 적격이겠는걸.”
아딘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이제 적당히 하지?”
“적당히 해야 하는 건 너야.”
그녀는 휘파람을 분다. 그러자 지금까지 숨어있던 두 사람이 손쌀같이 날아와 그녀 옆에 선다. 움찔한 아딘은 조금 뒤로 물러난다.
“내 동료 두 명을 소개하지.”
그녀는 왼쪽에 선 자를 가리킨다.
“얘의 이름은 카릴이야. 쓰 투 카릴.”
생소한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하다. 카릴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종의 아종이라 할 수 있는 ‘동굴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두 눈가에 새겨진 각각 세 개의 역삼각형 문신이다. 또 다른 증거는 거의 속옷차림이라는 점이다. 동굴족은 동굴 속 환경에 적응한 인간이라서 바깥세상의 뜨거운 햇살에 닿으면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래서 낮에는 항상 두터운 후드로 온 몸을 감싸고, 밤에는 거의 알몸 차림으로 활보한다.
“아안뇽, 인간 친구. 이름은 아딘이라고 했나. 히야. 또 봐도 참 잘생겼네. 만약 네가 동굴족으로 태어났으면 하렘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는데?”
이리저리 삐죽삐죽 뻗친 붉은 단발을 가진 카릴의 눈은 장난기 넘치는 초록 빛깔이다. 프릴 왈 미친년은 카릴의 어깨를 토닥인다.
“너도 알다시피 대부분의 동굴족은 인간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깝지. 인간 구색을 하는 동굴족은 10%뿐이야. 그리고 그들은 전부 귀족 가문이지. 카릴?”
카릴은 배시시 웃는다.
“이건 언제 해도 좀 부끄러운걸.”
카릴은 몸을 숙인 채 입을 열고 혀를 밑으로 죽 뺀다. 혀의 가운데에 동그란 피어싱이 달려있다. 좌우로 흔들리는 풍만한 가슴 때문에 너무 야하다.
“에헤헷. 다 봤지? 이게 내 귀족이라는 증명이야.”
“그러면 다음. 이 친구를 볼까?”
그녀는 자신의 오른쪽에 서 있는 자를 가리킨다. 그를 보자마자 아딘은 깜짝 놀랐다.
“이거 해골 아니야?!”
아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영락없는 서 있는 해골이다. 그것도 가죽옷을 입고 머리에 화려한 터번을 쓴 해골이라니. 게다가 그 해골이 자기를 보는 것 같은데, 아딘은 착각이라고 믿고 싶다.
“아무래도 이 소년이 움직이는 해골은 처음 본 모양인 것 같다. 당황하게 해서 미안하군. 내 이름은 블뢰즈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 모습이 왜 이런지에 대한 설명을 해야겠지. 내가 이렇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야기는 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
“그만! 그만하면 돼, 아저씨.”
블뢰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터번을 벗어 아딘에게 격식 있는 인사를 올린다. 정수리에 커다란 금이 갔는데 그 금 사이로 붉은 아지랑이가 넘실거린다.
“그럼, 내 인사를 이것으로 끝마치지.”
자기도 모르게 아딘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말았다.
아딘을 죽였던 여자는 그를 보며 싱긋 웃는다. 도자기색처럼 새하얀 피부, 오른 눈은 음산한 호박색에 왼 눈은 번쩍번쩍 빛을 뿜는 사파이어로 만든 의안. 몸을 움직일 때마다 코발트색 장발이 넘실거린다. 그녀는 그렇게 색깔로 가득 차있다.
“마지막으로는 내 소개를 해야겠지. 내 이름은 카이룻 레이라야.”
“카이룻!”
아딘이 카이룻이라는 성별을 듣자마자 놀란 것도 당연하다. 이 다르카르사막 곳곳에 위치한 도시국가 중 하나가 카이룻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왕족은 아니지만 귀족 중의 귀족, 신분의 정점을 찍은 존재. 그 귀족가의 일원.
그런 자가 유물단장이란 말인가.
레이라는 아딘의 황망한 눈빛을 보고 킥킥거린다.
“왜? 단번에 기가 죽어버렸어? 우리들을 봐봐. 하나같이 대단하잖아?”
레이라는 검지로 아딘의 턱을 위로 휙 추켜올린다. 도발적인 눈길을 하고서.
“반면에 넌 뭐지? 도둑길드? 귀족도 아니고, 평민, 아니 천민보다 못한 놈들의 집단이지. 과연 너는 뭘까? 네게 이 유물단에 들어올 자격이 있을까?”
아딘은 입술을 씹으며 레이라를 노려본다.
“내 동료들을 모욕하지 마.”
“그거야 내 맘이지.”
“넌 망자를 모욕하는 취미가 있나보지?”
레이라가 눈살을 찌푸린다.
“망자?”
“바로 어제 쿠샤나바 간부가 도둑회의를 기습해서 도둑길드의 간부들을 몰살해버렸어. 남은 건 나뿐이지.”
레이라는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뭐?! 잠깐! 그거 설마 그건가. 빌어먹을!”
레이라는 아딘을 삿대질한다.
“그러면 ‘최후의 아티팩트를 여는 열쇠’를 쿠샤나바 놈들에게 빼앗겼다는 거야?”
“최후의 아티팩트? 열쇠?”
아딘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걸.”
레이라는 또 경악하며 자기 입을 때린다.
“내 정신 좀 봐봐! 그걸 말해버리다니, 이 바보!”
레이라는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쿵쿵 친다.
“젠장, 나답지 않게. 나답지 않게. 후우우... 진정하자.”
레이라는 아딘을 응시한다.
“극비를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 없지. 좋아! 특별히 단장으로서의 재량권을 이용해서 네 입단을 받아주마.”
아딘은 속으로 씩 웃는다. 어쩌다보니까 일이 풀려버렸네.
“나야 고맙지.”
“감사는 됐어. 어차피 한 명 더 필요했으니까. 그건 그렇고, 대체 도둑길드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줘.”
아딘은 전부 다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카멜리아가 옛 애인이었다는 사실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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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에 앉은 레이라는 파이프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고, 밤하늘을 향해 후 내뿜는다. 아딘은 담배 연기가 나풀나풀 거리다가 사라지는 걸 바라본다. 블뢰즈는 옆에 앉아 아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줬고, 카릴은 별로 흥미가 없는지 바닥에 누워 자고 있다.
레이라는 아딘에게 파이프 담배를 건넨다.
“한 모금 할래?”
“미안하지만 난 담배를 안 해서.”
“시시한 남자로군.”
아딘은 한참 얘기해서 얼얼해진 턱을 어루만진다.
“그럼 이제 내가 들을 차례네. 네가 말한 최후의 아티팩트는 뭐고, 열쇠는 또 뭐야?”
“고대왕국 닐리님이 예기치 않은 대지진으로 멸망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만약 그 대지진이 자연의 조화가 아니라면 어떨까?”
“음? 그러면 누가 대지진을 일부러 일으켰다고? 에이. 그 강대하던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의 대지진을 누가 일으킬 수 있겠어.”
“고대왕국이 후기에 이르러서는 쿠슈 제국에게 영토의 절반을 장악 당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 고대왕국은 자기들이 이윽고 쿠슈 제국에게 삼켜지는 건 아닌지 두려워했어. 도대체 무엇을 이용해서 쿠슈 제국이 고대왕국을 궁지에 몰아넣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고대왕국은 그때까지 없었던 최강의 병기, 즉 쿠슈 제국을 절멸시키기 위한 아티팩트를 만들려고 했어.”
아딘은 팔짱을 낀다.
“그러면 그 절멸의 아티팩트라는 게 대지진의 원인이란 거야?”
“아마도 그래.”
“그런데 멸망한 건 정작 자기들이잖아.”
“일이 중간에 틀어진 거겠지.”
“그리고 최후의 아티팩트는 봉인되었다 이건가. 그리고 그 봉인을 풀기위해 5개의 열쇠가 필요하다는 거군.”
아딘은 카멜리아와 싸울 때, 언뜻 보았던 그녀의 품속의 이상한 검을 떠올린다. 그게 최후의 아티팩트를 여는 열쇠인건가.
“그럼 지금까지 발견된 열쇠는 몇 개인데?”
“일단 서해회사 이사회에서 하나를 가지고 있어. 또 다른 하나는 도둑길드가 우연히 손에 넣었다가 지금은 쿠샤나바의 수중에 들어가 버린 거고.”
“뭐야. 아직 세 개나 미발견인거야? 그렇게나 대단한 아티팩트인데.”
레이라는 어깨를 으쓱인다.
“서해회사 입장에서 생각해봐. 약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의 최강자는 서해회사였어. 물론 지금도 최강이기는 하지만 쿠샤나바가 골칫덩어리지. 여하튼 딱히 그 최후의 아티팩트가 없어도 서해회사의 권력은 굳건했고, 또 고대왕국을 멸망시켜버린 그걸 다시 깨웠다가 잘못하면 자기들이 망하잖아? 그래서 관심이 없었지. 그런데 쿠샤나바가 등장하고 나서 바꿨어. 서해회사가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척 하지만, 쿠샤나바가 저지르는 유물 테러와 요인 암살, 공작, 사보타주는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어. 그리고 너도 싸워봤으니까 알겠지. 어떻게 손에 넣은 건지는 모르지만 인체 아티팩트화 기술을 가지고 있어. 서해회사도 없는 그걸. 그래서 서해회사가 작은 테러집단 하나에 쩔쩔매는 거야. 그때부터 서해회사가 이 최후의 아티팩트에 관심을 가지지 시작했지.”
“최후의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쿠샤나바를 절멸시키려는 속셈이군.”
“그렇지.”
아딘은 머리를 긁는다.
“난 잘 모르겠어. 만약 그게 성공한다쳐도, 그 다음에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무슨 문제?”
“서해회사가 지금보다 더더욱 강해져버린다면, 어쩌면 그게 더 재앙이지 않을까.”
레이라는 피식 웃고 풀밭에 머리를 기댄다.
“난 그런 거 몰라.”
아딘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건 좋은 소식이면서도 나쁜 소식이야. 결국 열쇠를 두고 서해회사와 쿠샤나바가 전면전을 언젠가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거니까. 그건 내가 원하는 무대야. 하지만 서해회사가 쿠샤나바보다 딱히 나은 놈들은 아니다. 물론 마구잡이로 테러를 벌이고 살육을 하는 놈들보다야 낫지만, 서해회사가 이 대륙에 미친 해악도 엄청나다. 과연 그런 서해회사에게 최후의 아티팩트를 안겨줄 전쟁에 참여하는 게 옳은 걸까.
짝!
아딘은 손바닥으로 가볍게 이마를 때린다.
‘이 바보! 그딴 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
“레이라......”
고개를 돌려 레이라를 본 아딘은 순간 말문을 잃는다. 밤하늘 아래에 누운 사파이어 의안을 박은 하얀 피부의 소녀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응? 왜?”
“너희들은 며칠 전부터 여기에서 죽치고 있던 것 같은데, 그건 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