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딘은 벽거울 앞으로 가 목에 난 상처를 살펴본다. 참 깊게도 베었군. 지금까지 사람 목은 많이 베어봤지만 내가 베인 적은 처음인걸.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보던 아딘은 흠칫 놀란다. 거울에 무언가 잔영이 비췄기 때문이다.
놈들인가-!
기세 좋게 뒤돌아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불안해서 아딘은 별로 넓지도 않은 집 구석구석을 뒤진다.
“망할, 대체 뭐야. 오늘 밤은 뭐가 이렇게 뒤숭숭해?”
“이 바보야. 여기야, 여기.”
“뭣?! 누, 누구야! 썩 나와!”
아딘은 단검을 꺼내들고 주위를 잔뜩 경계한다.
“내가 아까처럼 호락호락 당할 줄 알아?”
“이 멍청한 인간아! 여기라고!”
“으응?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아까랑은 다른데...”
“여기라고 말하잖아, 이 귀머거리야! 넌 바보냐!!”
“어?”
아딘은 벽거울을 본다. 웬 여인의 형체가 비춘다. 그 여인이 누구의 형체인지 알게 된 아딘은, 입을 떡 벌리고 놀란 나머지 단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카, 카멜리아!”
거울 속의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 친다.
“멍청아! 그렇게 외쳤는데 이제야 눈치 채냐! 그리고 난 카멜리아가 아니야!”
아딘은 거울의 테두리를 부여잡고 거울 속의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카멜리아처럼 보이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흥, 콧소리를 낸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손짓을 한다.
“나는 너희들이 석상이라 부르는 것에 잠들어있던... 뭐라 할까. 이른바 요정님이지! 하여간 인간들은 부탁만 해대고 고마워할 줄을 모른다니까! 내가 널 살렸...”
“근데 왜 카멜리아의 모습으로-.”
거울 속의 여자는 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 소리친다.
“내 말 끊지 마!! 무례한 인간!! 넌 할 줄 아는 말이 카멜리아~ 카멜리아~ 밖에 없냐? 이 한심한 인간아!!!”
기세에 눌린 아딘이 입을 다물자 거울 속의 여자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든다.
음, 적어도 카멜리아가 아닌 건 분명하군. 내가 아는 카멜리아는 이렇게 건방지지 않아.
거울 속의 여자는 긴 말을 시작한다.
“한 번 설명할 때 잘 들어라, 이 바보 같은 인간아. 널 구해준 건 바로 나고, 나는 샘의 주인이자 혼이다. 왜 살렸냐고? 뒈져버린 네 꼴이 너무 한심해고 불쌍해서 그만 살려버렸지 뭐야! 아하하하! 근데 내가 그냥 베풀어주기만 할 것 같아? 나도 원하는 게 있걸랑! 몇 백 년 넘게 갇혀있으니까 좀이 쑤시는 거 있지? 그래서 바깥세상을 좀 보고 싶어서 널 살린 김에 네 몸 속으로 들어갔지! 날 쫒아버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되면 넌 죽거든! 여하튼 근데 난 형태가 없으니까 펜던트에 있던 여자의 모습을 빌린 거야. 그러니까 고마운 줄 알면 어서 날......”
아딘은 눈치 없이 끼어든다.
“잠깐, 몇 백 년? 그럼 너는 고대왕국 시절부터 존재한 건가?”
“또 말을 끊냐!! 콱!!! 게다가 싸가지 없게 반말까지! 인간은 이래서 짜증난다니까!”
고대왕국 ‘닐리님’은 한 때 대륙을 제패했던 나라이자 아티팩트 제작자들의 나라이다. 그러나 대지진으로 인해 허망하게 멸망해버린 나라이다.
고대왕국이 누렸던 문명의 경이는 아티팩트가 전부가 아니다. 원래는 더욱 굉장했을 터, 그러니 이러한 존재가 자신의 눈앞에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고 아딘은 생각했다. 사실 지하 던전을 탐사하다 보면 이것만큼이나 신기한 걸 많이 봐서 익숙해진 것도 있다.
아딘은 팔짱을 낀다.
“뭐, 일단... 날 살려준 건 고마워. 내 이름은 살렘 아딘이다. 근데 넌 내 안에 있다면서 왜 거울에 나타나는 거야?”
거울 속의 여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소통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넌 바보냐! 감사하자마자 딴지를 걸기는! 그리고 네 이름은 이미 알아!”
그러더니 곤란한 얼굴로 입매를 만진다.
“근데 내 이름이 없네?”
아딘은 침대에 앉으며 말한다.
“우리가 샘에서 만났으니까, 스프링은 어때?”
“너무 진부해! 프린으로 하자!”
“센스가 없네.”
“무엄한 놈! 꼬꼬마 주제에 감히-.”
쾅!
아딘과 프린 둘 다 잔뜩 긴장하며 무서운 소리가 난 문을 노려본다.
“뭐, 뭐냐!”
그렇게 말하는 프린의 몸이 거울 밖으로 빼꼼 나와 있다.
“몸을 내밀 수 있는 거였네? 정말 신기한걸.”
“뭐냐니깐!”
쾅, 쾅 소리가 계속 울린다. 아딘은 단검을 쥔 채 살며시 문 쪽으로 다가간다.
“넌 잠시 조용히 있어봐.”
음산한 목소리에 기가 눌린 프린은 슬그머니 거울 속으로 쏙 들어간다.
“알았어...”
아딘은 문 옆의 벽에 몸을 기대고 타이밍을 잰다.
근데 뭔가 이상한데. 만약 놈들이라면 그냥 처음부터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되지 않나? 그럼 이건 누구지?
아아.
아딘은 문고리를 잡고 문을 휙 열었다. 무언가 둔탁한 게 집 바닥에 떨어진다.
“길드장님?”
얼굴이 빨간 도둑길드장이 쓰러진 채 신음한다. 오른손에는 와인 병이 들려있다. 또 과음했군. 길드장은 술에 취할 때마다 지인의 집을 찾아가 귀찮게 하는 고약한 주사가 있다.
“오늘은 참 뭣 같은 날이군.”
아딘은 길드장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질질 끌어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앉혔다. 길드장은 숙취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뜬다.
“길드장님! 제 말 들려요?”
“아, 아암~ 자알 들리지!”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압니까? 저야 뭐 쫄따구니까 그렇다 쳐도, 사모님한테 뭐라 변명하실래요?”
“으, 지겨운 여편네 이야기를 여기서도 들어야 되냐! 내 명령하건대, 그 지루한 년은 말도 꺼내지 마라! 알간?”
“하... 이렇게 퍼마신 이유가 있겠죠? 이번엔 또 뭐가 문제에요?”
길드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짧은 머리를 북북 문지른다.
“내가 말이지~ 오랜만에 우리 아딘이가 보고 싶어서 왔지~ 어으, 딸꾹!”
아딘은 주위를 둘러본다.
“물을 좀 끼얹어야겠는데.”
“야야! 근데 너 지금, 임무 할 때 아닌가? 뭔가 엄청 중요한 걸 맡긴 기분이 드는데...”
“그걸 알면서 여기 온 겁니까? 정말 죄송하지만, 임무는 실패에요. 뭐라 변명할 여지도 없이.”
길드장은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본다.
“실패?! 어으! 네가 임무 실패한 건 처음인 거 같은데, 뭐어. 내가 네 집에 쳐들어 왔으니 쌤쌤이로 치지! 어후, 취해라...”
아딘은 마음속으로 씩 웃었다. 세이프.
“에휴우우!”
길드장은 고개를 푹 떨군다.
“그게 문제가 아냐! 아이고야...”
“말해 봐요.”
“그... 어떤 아티팩트가 있는데... 진짜 미치겠구먼!”
길드장은 또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입에 묻은 자국을 손등으로 닦아낸 뒤, 다시 말한다.
“그래. 어떤 아티팩트가 있어. 우리가 그걸 손에 넣었지... 매우 중요한 거라서 내가 극비 중의 극비로 했는데 서해회사랑 쿠샤나바, 둘 다에 정보가 흘러갔어! 젠장, 누군지 찾기만 하면... 그래서 지금 서로 자기한테 팔라고 난리야! 빌어먹을!”
“흠. 되게 중요한가 보네요?”
서해회사는 대륙 서방 끝단의 한 나라에서 만들어진 무역회사인데, 아티팩트 유통과 서해 해상무역을 독점해 거대한 부를 쌓은 대륙 최대의 패권집단이다. 그리고 쿠샤나바는 옛날에 서해회사에 대항했다가 멸망한 쿠슈 제국의 복수와 재건을 목표로, 서해회사 타도를 위해 유물 테러, 서해회사 간부 암살, 공작질을 일삼는 테러집단이다. 서해회사는 이러한 쿠샤나바의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유물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아티팩트 수집과 보호를 담당하는 조직이다. 그리고 날 죽인 놈들이지, 아마.
아딘은 어깨를 으쓱인다.
“잘 된 거 아닙니까? 어디든 더 높은 값을 부르는 쪽에 팔면 그만이죠.”
“그게 아냐.”
길드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두 놈들 모두, 상대 쪽에 팔면 우리를 전부 죽일 거라고 했어.”
“뭐라고요?”
아딘은 잠시 그 말을 이해하느라 멍해진다.
“왜 그렇게 막무가내인거죠? 아니... 여차하면 도둑길드 전부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건데, 부담이 너무 커.”
아딘은 쪼그리고 앉아 길드장을 응시한다.
“그 아티팩트가 대체 뭡니까?”
길드장은 눈을 찡그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른다.
“미안하다. 지금은 말 못해. 맞다. 이왕 임무 실패해서 집에 있는 거, 너도 내일 도둑회의에 와라. 나 혼자서는 답이 없어서 간부들 다 모아서 끝장토론을 해볼 생각이야.”
“당연히 가야지요. 시간은요?”
“내일 정오다. 젠장! 이 얘기를 하니까 숙취가 날아가는군.”
길드장은 침대에 손을 얹고 일어난다.
“끄응... 괜히 걱정만 끼친 것 같아 미안하다.”
아딘은 길드장을 부축해 문까지 데려다준다.
“괜찮아요.”
아딘은 떠나는 길드장을 향해 손을 흔든다.
“들어가세요.”
아딘은 문을 닫고 목을 좌우로 꺾으며 다시 침대로 간다. 어지간히도 피곤한지 목에서 뚜두둑 소리가 난다.
아딘은 대강 신발만 벗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는다. 그렇게 잠을 청할 무렵.
“야, 자냐?”
“...왜, 또?”
“내가 하나 빼먹은 게 있어!”
아딘을 실눈을 떠서 거울에 비친 프린을 본다.
“뭔데?”
프린은 활짝 웃으며 양 팔을 쫙 펼친다.
“널 살려준 보답을 받아야지! 난 모험을 떠나고 싶어! 그걸 위해 널 살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너무도 의기양양한 표정에 아딘은 코웃음을 치고 다시 눈을 감는다.
“싫어.”
“이 고마운 줄 모르는 인간!!”
프린은 분한지 마구 발을 구른다.
“저주하겠어! 저주! 평생 저주할거야! 각오하라고!”
아딘은 몸을 뒤척인다.
“제발... 잠 좀 자자, 이 화상아...”
오늘은 정말이지 안 풀리는 날이다.
창문 밖에서 달과 별들이 키득거리며 두 사람의 말싸움을 구경했다. 창문 밖에는 아딘의 집과 비슷하게 생긴 흙벽으로 지어올린 주택들이 줄지어있었다. 생쥐가 기어 다니는 더럽고 복잡하게 얽힌 길가마다 욕망이 잠자코 맥동하는 도시는 밤하늘 아래 숨죽인다.
그런 도시를 멀리서 조망하는 자가 있다.
늑대 얼굴처럼 생긴 기암괴석 위에 서있는 그 자는 검은 형체이다.
옆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있다. 생명은 꺼진지 오래.
그 자는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를 낀 도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