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살렘 아딘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다. 바람에 검은 머리칼이 사정없이 휘날려진다.
사실 이곳이 하늘이 맞는지 아딘은 확신할 수 없다. 추락하는 그의 아래 저 멀리 구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약속된 처지에 놓인 아딘의 얼굴은 초연하기 그지없다.
후회는 없다.
구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제는 놓아버린 일이다.
아딘은 스르르 눈을 감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런 끝을 맞이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딘은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생각해본다.
역시 그 날이다.
그 날 밤, ‘그것’과 만난 날.
밤하늘 아래에서 죽음과 함께 그것과 만난 날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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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렘 아딘은 밤하늘 아래 절벽을 걷고 있다. 딱히 그가 초능력자라든가, 도둑길드의 에이스는 역시 뭔가 다르다던가, 발바닥에 접착제를 붙여서 그런 것도 뭣도 아니다. ‘아티팩트’ 덕분이다. 그가 신은 검붉은 가죽 장화는 아티팩트이다. 간단히 말하면 멸망한 고대왕국이 남긴 마법 도구이자 욕망과 공포의 유산이다.
아딘은 슬쩍 뒤를 돌아본다.
사막의 풍경이 이렇게 소름 돋을 줄이야!
“시작도 못했는데 이렇게 고난이도라니, 장화가 없었으면 엄두도 못 냈겠네.”
그런 말 한 것 치고는 금방 정상에 도착했다.
“읏차.”
아딘은 모서리를 확 밟아서 정상적으로 선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정리하고 달걀 모양 펜던트의 위치도 바로 한다.
“오호라...”
사람을 홀리는 여우같은 광경이로다. 아딘은 멈춰선 채 영롱한 빛을 내는 요정의 샘과 그 샘 가운데의 석상을 바라본다. 석상의 틈새 틈새에 이끼가 꼈지만 거기까지 갈 눈길이 없다.
“이런 데 이런 게 있다니. 딱히 수원도 없을 텐데. 아니, 그러니까 던전이겠지.”
던전. 고대왕국이 자신들의 경이로움을 담은 기록과 유물, 특히 아티팩트를 보관해놓은 지하 사원이다. 말이 사원이지 보통 사람은 접근도 못 한다. 위치파악부터 까다롭고 던전에 들어가도 수많은 함정과 몬스터가 기다린다.
그런 던전에는 전문가가 필요한 법이다.
아딘은 종종걸음으로 샘 근처로 간다. 다가가면 갈수록 샘에 반사된 별빛이 주변을 예쁘게 채색한다. 아딘은 샘 중앙의 요정 석상을 올려다봤다.
“고대인의 솜씨는 언제 봐도 놀랍군.”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근데...”
아딘은 쪼그리고 앉아 샘을 들여다본다. 선이 굵은 턱과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얼굴이 보인다.
“입구는 대체 어디 있지? 설마 이 샘 안에 있나?”
응시.
“내 얼굴 밖에 안 보이는걸.”
계속 응시.
“뭐지?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드는데...”
계속, 계속, 응시.
“이거 보통 샘이 아니-”
샘에 비춘 또 하나의 얼굴, 검은 실루엣. 아딘은 기겁하며 몸을 뒤로 홱 돌리려고 한다.
젠장, 방심했어!
“쉬이잇.”
아딘의 목에 단검의 칼날이 닿는다. 시체가 몸을 어루만지는 느낌이다. 아딘은 굳어버린 그대로 침을 삼킨다. 꾸울, 꺽. 울대가 날을 건드린다.
“잠깐만 기다려봐. 대화를 하자.”
“내가 왜?”
단두대로 목을 치는 듯한 말투에 아딘은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 청명한 음색, 여자다. 아딘은 슬쩍 샘을 본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너 혹시 유물단 소속이야? 젠장, 유물단이 지키는 던전에 찾아오다니 재수도 없지. 하하하...”
“네가 알 필요는 없지.”
아름다운 목소리, 하지만 어딘가 화끈하다.
어? 내 목이 왜 이렇게 뜨겁지?
아딘은 샘에 비춘 스스로를 봤다. 뭐지? 언제부터 내 목에 저런 게 있었지? 너무도 큰 틈이, 너무도 큰 틈이 벌어져 있어.
아하, 이년이 그어버린 거구나.
그 순간 아딘의 목에서 피가 확 뿜어져 나와 샘에 후두두둑 떨어진다. 진홍빛이 더해지자 샘이 내뿜는 빛은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그녀가 아딘을 놓아주자, 머리가 샘 위에 정통으로 떨어진다.
뭐야? 나 죽는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70살까지는 살아보고 싶었는데, 아직 48년 남았는데. 인생 참 허무하네.
아딘은 실소한다. 물론 진짜로 웃진 못했다. 목에 난 틈새 사이로 바람만 빠져 나올 뿐이다.
한 숨 한 숨 내쉴 때마다 시야가 좁아지고 세상이 검게 변해간다.
고통마저 무뎌가고 묘한 편안함까지 느낄 무렵,
아딘의 눈에 끊어진 펜던트가 보였다.
손을 뻗어 집는다.
매우 힘겹게,
연다.
그 안에 카멜리아의 초상화가 담겨 있다. 아딘의 삶에 있어서 유일하게 빛이고 행복이었던 그녀. 금색 장발에 새하얀 피부, 잘 익은 사과 같은 입술. 그 날의 감촉이 밀려온다. 그런 그녀가 2년 전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너무도 허망하게.
그 부드러웠던 팔이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비틀리고, 총명했던 눈동자는 딱딱한 돌처럼 생기를 잃고, 촉촉했던 혀는 종이 부스러기처럼 메말라버리고, 꼬집으며 장난쳤던 통통한 볼은 집기조차 어렵게 되고, 희망을 얘기했던 입은 잠겨버렸다.
빛이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다.
아딘의 손에서 펜던트가 굴러 떨어져 샘에 반쯤 잠긴다. 아딘이 팔이 무너지는 바람에 손이 샘 속으로 빠져버린다. 물 위에 떠있는 아딘의 머리 옆에는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나풀거린다. 쉼 없이 새어나오는 핏물은 둥글게둥글게 원을 그린다.
아딘을 암살한 여자는 단검에 묻은 피를 그의 가죽 옷에 슥슥 문질러 닦는다.
“이놈은 대체 뭘까? 쿠샤나바는 아닌 것 같은데.”
여자의 왼쪽에 있는 자가 대답한다.
“쿠샤나바가 아니면 아마 도둑길드 쪽일 거라고 나는 본다.”
여자는 바닥에 침을 퉤 뱉는다.
“생쥐 같은 놈들.”
여자의 오른쪽에 있는 자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이거 계속 두면 완전 위험한 거 아냐? 키킥! 지금도 피 엄청 나오네. 무슨 돼지 도축하는 것 같잖아. 그래도 아깝다~ 생긴 건 완전 반반한데.”
“그렇게 좋으면 지금이라도 하던가.”
“우엑! 완전 거절이거든요!”
“그럼 치우는 거나 도와.”
그렇게 말하며 여자가 아딘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려고 할 때, 불길한 직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녀는 튕겨지듯 몸을 들어올린다.
“우왓! 깜짝이야, 왜 그래?”
“침입자가 더 있다. 이놈은 일단 놔두지. 둘 다 날 따라와.”
장난스러운 말투의 소유자는 요정 석상을 향해 엄지를 날렸다.
“오늘 완전 인기 터지시네요! 푸하하!”
요정의 샘은 다시 한적해졌다.
바람이 분다. 풀잎이 흔들린다. 수면이 미미하게 진동한다.
샘 근처에는 오직 부엉이만이 있다.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노란 눈을 형형히 빛낸다.
그리고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분다.
수면의 진동은 그쳤다.
요정 석상의 미려한 얼굴 앞에 빛이 모인다.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하나로 합쳐진다. 지금까지 샘이 반사하던 별빛들도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빛의 구가 만들어져간다. 빛으로 짠 옷을 입은 순수한 에너지의 덩어리가 천천히 밑으로 떨어진다.
구체는 수면 바로 위에서 멈춘다. 수면이 덜덜 떨린다. 물방울마저 튀어 오른다. 구체는 유유히 물결을 따라 아딘의 시체로 다가간다. 그 전에 잠시 카멜리아가 담긴 펜던트 앞에 멈춰 선다.
무언가 생각하듯 있던 구체는 다시 움직여 아딘의 목옆으로 간다. 핏빛까지 더해져 한층 강렬해진 색감이 된 구체는 목의 상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마치 떡이 목구멍을 넘어가듯 꿀렁 들어간다.
검은 세상 속에 빛이 한 점 반짝, 그러더니 물방울이 하나둘 솟아오른다.
아딘...
점점 더 많아지는 물방울들.
아딘......
끓어오르듯 솟아오른다.
이제, 살아나.
잠겨있던 아딘의 손이 쫙 펴지더니, 단번에 펜던트를 쥔다. 아딘은 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들어올린다. 흠뻑 젖은 머리칼이 그의 얼굴을 가린다.
“허억! 헉! 으, 으읍! 우에에엑!”
아딘은 헛구역질을 하고 나서도 한참동안 숨을 몰아쉰다. 부릅뜬 두 눈은 아직도 무엇이 일어난 건지 이해를 못 하는 듯하다.
“대체... 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을 만진다. 칼이 낸 상처는 아물어서 반질반질하다. 마치 살을 이식한 것 같은 감촉이다.
“난... 분명히... 죽었는데? 살아난, 건가?”
아딘은 갑자기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이럴 때가 아냐. 일단 여길 떠야겠어.”
일어나려던 아딘은 자신이 왼 손에 쥐고 있던 펜던트를 눈치 챈다. 나도 모르게 집은 건가. 아딘은 주머니 속에 펜던트를 집어넣는다.
떠나려던 아딘은 문득 신경이 쓰여 요정 석상을 봤다.
설마......
아니야, 지금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야.
아딘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부엉이의 몽환적인 두 눈이 아딘을 배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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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덜컥 열리며 아딘이 집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온다. 평소에는 싫던 흙벽의 냄새도 지금은 반갑다. 아딘은 탁자에 놓여있던 포도주를 병 째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익숙한 천장을 바라본다. 멍하다. 아직도 현실 같지가 않다.
아딘은 손을 들어 올려 위아래로 뒤집어보고,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쥐었다가 펴보기도 한다. 너무 잘 움직여서 오히려 무섭다.
“대체 무엇이 날 살린 거지? 그리고 날 죽인 놈은 또 누굴까.”
그 어느 것도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