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아! 날려 버려라!”
“배덕의 기사가 밀리고 있다!”
사람들은 소군악이 우위를 점하는 듯 보이자 노골적으로 응원하고 나섰다. 그간 앙트와 베리츠 상단에 당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 저놈들이 미쳤나?”
베리츠가 눈알을 부라렸다. 하지만, 담벽을 사이에 둔 채였고 또 마을 사람들과 베리츠 상단 사이에 앙트와 소군악이 대치 중이었기에 눈을 부라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 환호성 때문인지 격렬하게 주고받던 둘의 공방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채챙.
소군악이 바닥에 버린 장검이 두 동강 나 버렸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장검이 애처롭게 보였다.
사람들이 숨죽였다.
소군악의 모습을 보고 온몸이 땀범벅인 앙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검을 버린 걸 보니 영 멍청이는 아니군. 무릎 꿇고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그 말에 소군악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랄프가 쥐고 있던 창을 건네받아 쥐고는 붕붕 돌렸다.
“익숙한 검이 아니라서 버린 것뿐인데, 착각했나 보군.”
임독양맥을 타통한 옛날의 몸이었다면 병기가 무슨 대수겠는가?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싸웠더라도 단 일 수에 앙트의 목숨을 취했을 것이다.
지금도 일 수는 무리겠지만 이십 합도 넘기 전에 소군악은 앙트를 죽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실전 대련 삼아 앙트와 검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점점 익숙해지는군.’
지금 제이미의 몸은 전과 키도 다르고 몸의 외형도 조금씩 달랐다.
그간 적응한다고 적응했지만 소군악이 중점적으로 행한 것은 몸 안의 내공을 늘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체와 영혼 사이에 약간의 괴리가 있었는데 이번 싸움이 마침 기회라 여겨 한동안 공방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러나 싸구려 검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자, 이 지루한 공방을 끝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부부부붕. 착!
창을 위협적으로 이리저리 돌려 보던 소군악이 앙트를 향해 창 끝을 겨누었다.
“오너라.”
처음과 똑같은 말투로 내뱉은 말.
그 말에 앙트의 좁은 눈매가 꿈틀거렸다.
분명 동수를 이루며 공방을 주고받던 놈이 한껏 여유가 넘쳤다. 자세히 보니 그리 지친 기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앙트는 사실 지쳐 있었다.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타난 거냐!’
피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영주를 배신할 때부터 배덕자라는 불명예가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그런 앙트가 베리츠에게나마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공포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싸움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덕자라는 오명은 뒤집어쓰더라도 겁쟁이라 불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막상 덤벼들려고 하면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 어느 방향을 치고 가더라도 창날이 따라올 것 같았다.
‘근접 거리로 파고들 수만 있다면, 내가 이긴다.’
창은 장병이다. 사정거리가 긴 만큼 유리했지만, 그 거리를 제하는 순간, 판도는 뒤집힌다. 유리해지는 것은 앙트 자신인 것이다.
“내가 가지.”
앙트가 고민하며 움직이지 않자 소군악이 땅을 박찼다.
슈아아앙.
쾌섬일창!
흑룡대의 필수 무공인 극창십결(極槍十訣) 제1초식.
극쾌의 요결을 담은 찌르기는 오로지 한 점만을 노린다. 극성에 이르면 거대한 바위도 그대로 관통해 버린다는 창술이다.
앙트는 검을 들어 창을 쳐 냄과 동시에 몸을 좌로 숙이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창은 그의 면전에 다가온 상태였다.
카아앙!
창두가 앙트의 검면을 찌르자 그대로 검이 산산조각 났다.
푸우욱!
앙트의 검도, 두꺼운 흉갑도 쾌섬일창을 견뎌 내지는 못했다. 소군악의 창은 무덤하게 앙트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흐어어억.”
앙트가 실핏줄이 터진 눈을 부릅뜨며 가슴에 박힌 창대를 쥐었다.
“쿨럭!”
한 움큼의 피를 게워 낸 앙트의 목이 꺾였다.
이윽고 장내는 적막감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피의 기사, 배덕의 기사라 불리며 기사도에 먹칠하고 다른 기사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왔지만, 실력만은 대단해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자가 바로 앙트였다.
한데 그런 그를 정체불명의 흑기사가 꺾어 버린 것이다.
“이겼다…….”
누군가가 읊조린 그 목소리가 들불처럼 번졌다.
“피의 기사를 이겼다!”
“우와아아아아!”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대단한 싸움이었다. 일반인은 눈으로 쫓지도 못할 속도로 검을 주고받더니 창을 들자마자 빛살 같은 찌르기로 피의 기사를 이겨 버렸다.
“흐에엑.”
베리츠는 앙트의 등 뒤로 튀어나온 창두를 멍하니 보다가 기겁했다.
쑤욱.
소군악이 창을 뽑자 앙트의 시신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소군악이 창을 몇 번 허공에 털었으나 아직까지 피가 묻은 창두와 창날은 여전히 섬뜩함을 발했다.
그는 몇 번 더 창을 흔들더니 베리츠에게 다가갔다.
“히엑!”
그 모습을 본 베리츠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꿈치가 계단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엉거주춤 쓰러진 베리츠는 두려움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사, 살려 주시오.”
빌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지만 빌었다. 소군악의 눈빛을 보니 꼭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던 것이다.
소군악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베리츠는 서둘러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제발, 살려 주시오.”
“…….”
소군악이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베리츠는 더욱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입니다요.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뭘 하지 않겠다는 거지?”
“예에?”
베리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라, 랄프를 다시는 건드리지 않겠습니다요. 그러니 목숨만은…….”
“틀렸다.”
“예에? 하면…….”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베리츠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입니까. 다시는 귀찮으실 일이 없을 겁니다.”
소군악이 피식 웃었다. 베리츠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하하, 약소하지만 선물이라도…….”
“말을 한 마리 내어 와라.”
베리츠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캄캄했던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어서 말을 내어 오너라!”
베리츠가 소리치자 하인하나가 부리나케 뛰어가 말 한 마리를 내어왔다.
“잘 쓰도록 하지.”
“헤헤, 이를 말씀이십니까? 그보다 저와 이야기를 좀 나눠 보시는 것이…….”
하지만, 베리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 언제 날아들었는지 모를 비수가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부릅뜬 베리츠의 얼굴은 죽음을 느끼지도 못한 듯 비굴하게 웃는 모습 그대로였다.
털썩.
앞으로 고꾸라지는 베리츠를 보는 소군악의 얼굴은 무심했다.
중원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베리츠는 절대 약속을 지킬 자가 아니었다. 두고두고 소군악을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했다.
앙트보다 더한 실력의 자객을 매수해 보내고도 남을 자였다.
천년신교의 2공자였던 소군악이다. 후환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뿌리째 뽑는 것이 당연했다.
한편, 베리츠가 죽자 상단의 인원들이 엉거주춤 소군악을 포위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나를 쫓는다면 누구도 무사치 못하리라.”
은은한 내력까지 실어 내뱉은 그 말에 상단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주가 죽고 피의 기사 앙트마저 죽어 버렸다.
그들에게서는 전혀 싸울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소군악이 말의 등자를 밟고는 훌쩍 올라탔다.
히이이잉.
말은 투레질을 하며 버둥거렸으나 소군악이 목을 두어 번 두드리자 금세 진정했다.
다가닥, 다가닥.
소군악이 정문으로 향하자 겁에 질린 상단의 일꾼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사정은 구경 나온 마을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환호하던 마을 사람들도 조용히 소군악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주시했다. 몇몇은 통쾌해 했고, 몇몇은 두려운 눈으로 소군악을 보았다.
랄프의 앞으로 간 소군악이 가방을 넘겨받으며 말했다.
“그간 고마웠소.”
“아닐세. 내가 고마웠지.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소군악이 고개를 까닥하고는 말의 배를 찼다.
“하얏.”
히이이잉.
놀란 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어지러이 흩어져 길을 터 줬다.
“허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
“그러게 말일세.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소군악이 저 멀리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은 금세 랄프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랄프, 저 흑기사는 대체 누구인가?”
“소군악이라는 방랑 기사네.”
“방랑 기사? 저만한 실력자가 방랑 기사란 말인가?”
“허어, 참 별일이로세.”
“그보다 큰일이구먼. 베리츠 상단주를 죽이고 저리 가 버렸으니, 수배라도 걸리지 않을지…….”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
마을 사람들은 착 가라앉은 분위기의 베리츠 상단을 보았다. 아직도 많은 용병들과 일꾼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상단에 속한 사람들은 악인이 아닐 수도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서글프고 더러워도 참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가 억울함을 표출하고 정의를 표출할 수 있다면 애초에 정의니 억울함이니 하는 말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지금 이 순간, 치라토 마을 사람들에게 소군악은 정의로써 남았다.
베리츠 상단은 치라토 마을의 가죽 가공품의 취급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가 죽었다지만 앞으로 베리츠 상단이 얼마나 바뀔지는 미지수였다.
치라토 마을의 사람들은 소군악이라는 정체불명의 흑기사와 피의 기사 앙트와의 싸움을 오래토록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대륙을 질타할 영웅의 첫 행보를 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창을 비스듬히 쥐고 저 멀리 말을 달려가는 소군악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두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베리츠 상단의 마당에서 울음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아버지!”
베리츠를 쥐고 흔드는 가녀린 어깨의 여인. 아직은 앳된 그녀의 흐느낌이 상단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녀 또한 절대 소군악을 잊지 못할 것이다.
*
윌리스 남작성은 지금 손님 맞을 준비에 한창이었다.
장차 디엘 가문을 물려받을 코모라 공자가 엄청난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윌리스 남작성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서신으로 받은 날짜를 생각하면 한 달을 전후로 해서 당도할 것이다.
그 시간 안에 코모라 공자를 맞을 준비를 모두 마쳐야 했다.
다행히 코모라 공자를 위해 마련해 둔 선물이 있었다.
선물에 들어간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그리 아까운 것도 아니었다.
‘디엘 가문과 사돈이 된다? 하하핫.’
윌리스 남작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소피아의 방이었다.
똑똑.
“아비다.”
“들어오셔요.”
소피아는 테라스에 앉아 해를 쬐고 있는 중이었다. 웨이브 진 금빛 머리칼에 오뚝 솟은 콧날까지, 그녀는 죽은 제 어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무얼 하고 있었더냐?”
윌리스 남작은 더없이 상냥하게 물었다.
처음에는 아들이 아니라 딸아이가 태어나서 실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아이가 장차 윌리스 가문을 부흥시킬 것이야.’
사내는 아니지만 소피아에게는 그런 사내들을 홀릴 무기가 있었다. 소피아 또한 여태껏 자신의 뜻에 따라 훌륭히 자라 줬다.
“……그는 어찌 되었을까요?”
소피아의 물음에 윌리스 남작의 얼굴이 굳었다. 소피아가 말하는 ‘그’가 누군지, 윌리스 남작도 잘 알고 있었다.
“녀석에게 라일의 검을 찾아오게 하자고 한 건 네가 아니더냐?”
소피아는 피식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설마 녀석을 그리워하는 게냐?”
질문을 해 놓고도 윌리스 남작은 긴장했다. 정말 자신의 딸이 그 기사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일까?
하지만, 이어진 소피아의 대답은 윌리스 남작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설마요.”
소피아는 싱긋 웃으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제이미를 그리워한다는 말인가? 그의 여인이었던 때에도 단 한 번조차 마음을 준 적이 없던 소피아다.
“전 제가 할 일을 잘 알고 있어요.”
“오오, 내 딸 소피아. 장하구나.”
애초에 그녀는 바람의 기사로 세상을 떠돌던 실력자인 제이미를 붙잡기 위해 그에게 접근했던 것이었다. 그 배후에는 윌리스 남작의 청이 있었다.
그때 당시만 하여도 바람의 기사 제이미는 윌리스 남작에겐 꼭 붙잡고 싶은 물고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더 큰 물고기가 걸려들었으니 어망을 비울 필요가 있었다.
고지식하고 우직한 제이미를 없애기 위한 계책도 그를 가장 잘 아는 소피아가 생각해 낸 것이었다. 다른 기사라면 도망갈 법한 불가능한 임무를 제이미는 우직하게 수행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임무 중에 죽을 것이다.
소피아는 시선을 거두고는 정원을 보았다.
하인들이 바쁘게 오가며 정원수를 다듬는가 하면 부랴부랴 이끼 낀 조형물을 닦아 내고 광을 내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귀족의 여식이라면 자신의 마음 따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정략 결혼을 하는 것이 운명이었다.
그렇게 교육 받으며 자라온 소피아는 자신의 마음을 절제할 줄 알았다. 누구보다 가문을 위하고, 누구보다 권력욕이 강한 소피아였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분명 어린 시절 은근히 아들을 바라며 자신의 존재에 실망한 아버지의 탓도 있으리라. 소피아는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윌리스가를 번창시키고 싶었다.
‘한 달 뒤면 코모라 백작가의 여인이 된다.’
소피아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생기로 가득 빛났다.
그런 소피아의 눈에 저 멀리 성문에서 소란스러운 병사들의 모습이 담겼다. 그들은 매우 당황한 듯 필사적으로 성문을 막고 있었는데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응? 웬 놈이지?”
윌리스 남작도 그 광경을 본지라 고개를 갸웃했다.
가끔 정신 나간 미친놈들이 약속도 없이 남작성을 찾아오는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상대를 내쫓지 않고 쩔쩔매는 모습이 이상한 탓이었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집사 코웬이 부랴부랴 뛰어와 고했다.
“무슨 일인가?”
“그, 그가 돌아왔습니다.”
“그라니?”
“제이미 경 말입니다. 제이미 경이 돌아왔습니다!”
“뭣이라!”
윌리스 남작이 고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