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카락을 움켜쥔 놈이 말했다.
“지갑 어딨어? 빨리 내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순순히 지갑을 내줬다.
“핸드폰은?”
내 지갑을 뺏은 놈이 다른 놈에게 지갑을 건네주며 다른 것도 요구했다.
“야, 지갑에 아무것도 없는데?”
“뭐?”
다시 지갑을 되돌려 받은 놈이 안을 확인하더니 나를 노려봤다.
“뭐야, 돈 어딨어? 신용카드랑 신분증은?”
놀이는 여기까지. 내 신분이 드러나면 안 된다.
“응. 없어.”
놈들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마! 너네 미성년자 아니냐? 얼굴 보니까 딱 고딩이네. 그럼 어디 보자. 미성년자가 다섯 명. 와, 이거 실화냐?”
“미친 새끼가, 처 돌았나.”
오빠 역할을 맡은 놈이 손바닥을 펴 내 뺨을 향해 휘둘렀다. 그렇지. 역시 상대방을 제압하기에는 싸다구만큼 좋은 게 없지. 내 머리카락을 잡은 팔을 한 손으로 잡아 비틀었다. 빠득! 팔목이 부러지면서 살이 짓이겨졌다.
“으아아악!”
놈이 손을 휘두르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집단 성폭행한 고딩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 하지 않은 놈들이었다. 아주 개박살 내주마.
중간에 서 있던 놈이 각목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동시에 뒤에 있던 놈이 각목을 버리고 칼을 들었다. 생각보다 위험한 놈들이었다. 부엌칼도 아니고, 회칼이었다. 칼집을 내던지며 회칼을 휘둘렀다. 뾰족한 칼끝이 복부를 향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각목은 그렇다 쳐도, 피부가 회칼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어떻게 될지 기다렸다. 머리를 맞은 각목이 반 토막 나고, 회칼이 3분의 1 정도 배에 박혔다. 밑을 내려다보니 회칼 사이로 피가 울컥 솟았다. 통증은 없었다. 다만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에 물들어 점점 번졌다. 타격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느 정도 방어력을 갖췄어도 피부는 날카로운 쇠붙이 같은 걸 전부 막아주지 못했다.
두 놈도 놀랐는지 엉거주춤 물러섰다. 그러고는 배에 꽂힌 칼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짐승의 얼굴이었다. 아마 내가 큰 충격을 받았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빠 역할을 맡은 놈은 침대 옆에서 나뒹굴고, 은지는 쪼그리고 앉아 나와 두 놈의 눈치를 살폈다. 친구는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회칼을 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미소를 지으며 놈들을 노려봤다. 킬킬대며 웃던 놈들이 깜짝 놀랐다. 아마 처음 보는 상대방의 반응일 터였다. 늘 가해자의 입장에서만 섰던 놈들이었다. 자신들이 신처럼 느껴졌겠지. 작은 균열만으로도 입장은 얼마든지 뒤바뀐다. 이런 말이 있지. 남을 해치지 말라. 이 말은 틀렸다. 얼마든지 해쳐도 된다. 단, 영원히 강자의 입장에 있을 자신이 있다면 말이지.
두 놈 앞으로 뛰어들었다. 양손을 뻗어 놈들의 팔을 각각 한쪽 팔씩 움켜쥐었다. 손에 힘을 주자 양옆에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왼쪽 놈은 잡힌 손목이 부러져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고, 오른쪽 놈은 팔뚝이 짓눌려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들었다.
문 앞에 서성이던 친구가 비명을 지르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열렸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 다급한 마음에 문으로 뛰었다. 주위의 모든 게 느리게 움직였다. 열린 문으로 친구가 천천히 뛰어들었다. 위험한 순간이라고 느끼면 집중력이 엄청나게 높아지는 모양이었다. 집단 성폭행한 고딩이 손을 휘두르자, 내 얼굴에 맞고 살이 출렁이는 걸 지켜보던 것과 똑같았다.
아직도 문으로 뛰어드는 친구를 뒤에서 잡아챘다. 급한 나머지 너무 힘을 썼다. 뒷덜미를 잡힌 친구가 뒤로 붕 날아가 소파 위로 떨어졌다. 위급한 순간이 지나가자 다시 주위의 움직임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았다. 앞을 막을만한 게 뭐가 있을까? 성큼성큼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각각 팔이 부러지고 짓이겨진 두 놈은 방바닥을 기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들 옆으로 걸어가 침대를 번쩍 들었다. 오빠는 아파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은지와 친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저앉아 뒷걸음질 쳤다.
침대와 테이블로 문 앞을 막고 가만히 그들을 지켜봤다. 여자애들은 눈 돌릴 곳을 찾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고, 조폭 흉내를 낸 양아치 새끼들은 바닥에 누워 질질 짜는 중이었다.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무슨 애 돌보는 것도 아니고. TV 옆으로 치워놓은 회칼을 들었다.
“이걸로 뭐하려고 했는데? 사람 죽이려고? 그럼 나도 이걸로 너네들 죽여도 되지?”
놈들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모두 피해자가 느꼈을 공포였다.
“꿇어. 다섯 명 모두.”
여자애들과 양아치 새끼들이 구르듯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팔이 부러진 아픔 따위는 그새 다 잊은 모양이었다. 하긴, 죽게 생겼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눈을 내리깔고, 벌벌 떠는 놈들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신고를 못 하게 해야 한다. 여기 다섯 놈은 이미 내 얼굴을 본 터라 입만 뻥긋해도 앞으로가 귀찮아진다. 가면이라도 쓸 걸 그랬나. 다음에는 복면을 준비해야지. 무엇보다 다른 성범죄자들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줘야 한다. 남을 짓밟으려면 나중에 자기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거다.
“귓구멍 열고 잘 들어라. 지금부터 너네들이 해왔던 범죄를 낱낱이 밝히는 거야. 어떻게 만났고, 어떤 식으로 역할을 나눠 피해자들을 협박했으며, 또, 갈취한 금액은 얼만지 등등.”
모두 말문이 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구나. 그치?”
회칼을 들고 나에게 회칼을 휘둘렀던 놈에게 다가갔다.
“이런 걸 들고 다닐 정도면 당연히 네가 찔릴 각오도 했겠지?”
회칼로 놈의 복부를 살짝 찔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놈이 오줌을 지렸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토해내라. 그리고 내 얼굴 본 거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걸리면 힘들게 새긴 문신 다 도려낼 테니까.”
다섯 놈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촬영했다. 피해자들에게는 신으로 군림했을 놈들이었다. 이제는 한낱 약자에 지나지 않았다. 촬영을 끝내고 양손에 침대와 테이블을 들고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이제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면 끝이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
“모자이크해줄 테니까 착하게 살아라. 뒤지려면 그거 계속하고.”
얼마 후 찍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반응은 살피지 않았다. 그러라고 올린 게 아니었다. 경고이자 만족감이었다. 힘을 쓸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한 셈이었다. 일종의 전리품이라고 할까?
회칼에 찔린 복부는 하루 푹 자자 금세 아물었다. 이제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는 발바리를 잡을 차례다. 주로 새벽이 범행 시간대였다. 오히려 잘됐다. 어둠이야말로 주위 사물과 사람을 구분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앞으로는 낮보다 밤이 더 바빠질 터였다.
몇 달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다. 휴대폰으로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을 확인했다. 제목은 발바리의 최후. 조회수가 벌써 5천만이 넘었다.
영상 안에서는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4층 빌라 외곽 벽에 붙어 한 남자의 몸을 으스러뜨린다. 뒤에서 붙들린 남자는 독의 영향으로 온몸이 마비돼 움직이지 못했다. 목에 이빨 자국이 선명하다.
복면은 한쪽 손으로 빌라 외곽의 홈을 잡은 후 나머지 팔과 다리로 남자를 껴안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먹이를 사냥하는 뱀처럼 천천히 한쪽 팔과 두 다리에 힘을 줬다.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더니 팔다리의 뼈가 부러지고, 상의와 바지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남자는 제발 놓아달라고 애원했다. 직접 경찰서로 가서 모든 죄를 말하겠다고. 여자들을 강간한 걸 후회한다고.
하지만 복면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더욱 세게 그의 몸을 조였다. 양쪽 갈비뼈가 부서져 비명을 지르던 남자의 숨이 턱 막혔다. 똥오줌을 지려 바지가 양옆으로 축축이 젖었다. 너무나도 치욕적인 모습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밑에서 실탄이 장전된 총을 겨누며 이제 그만 놔주라고 경고했다. 복면은 아래를 굽어보더니 옆의 창가로 남자를 끌고 가 베란다에 내던져 놓고는 마치 뱀처럼 미끄러지며 빌라 벽을 기어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놀란 경찰들이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쫓아가면서 영상이 끝났다.
발바리에게 당했던 피해자 대부분은 대인 기피증이 생기고,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병이 들어 정신과에 다녀야 했다. 또 다른 이는 봄과 여름에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창문을 열지 못했다. 창문을 통해 발바리가 침입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피해자는 아예 주위에 칼이 없으면 불안해 어찌할지 몰랐다. 칼을 품고 있어야 겨우 안심이 된다며 오들오들 떠는 피해자를 보니 안 그래도 차가운 몸이 더 차갑게 식었다.
유튜브 동영상의 복면은 바로 나였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침입하는 발바리를 잡았을 때 나는 순진하게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발바리는 열심히 용서를 비는 듯했지만, 그건 피해자들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발바리에게 피해자는 약자였다. 자신이 강자인 한은 영원히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남의 아픔과 고통, 치욕을 공감하려면 똑같이 당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마비시킨 채 경찰과 주민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포와 치욕을 준 거였다. 놈은 이제 평생 누워서 생활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잡고자 하는 놈이 더 있었다. 바로 상일고등학교에 나타난 발바리였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설마 내 존재를 눈치 채고 숨은 걸까? 찾아내야 한다. 아마도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진 놈일 터였다. 이 좁은 지역에 발바리가 둘이었다니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세상에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약자를 짓밟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노리는 건 그들이었다. 힘을 쓰는 자에겐 똑같이 힘으로 갚아줘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난 불쌍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람이 다른 대상에게 불쌍함을 느낀다는 건 기본적으로 혹시 자신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떨까 하는 공포에서 비롯되는 거였다. 전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이제 다른 먹잇감을 찾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