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가려고 아파트 현관 밑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엄마가 나왔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엄마가 놀란 얼굴로 묻는다.
“어머, 얼굴이 왜 그러니?”
에이 씨발 좆됐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선 채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엄마가 불렀지만, 모른 척하며 걸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놔, 뭐라고 핑계 대지? 원래 밖에 있을 시간인데 왜 하필 지금 계신 거냐고.
엄마가 따라오며 꼬치꼬치 물었다.
“현민아. 무슨 일이니? 엄마랑 얘기 좀 해. 싸웠니? 요새 방 밖으로 통 나오지도 않고.”
아, 엄마는 그냥 볼일 보면 되지. 왜 자꾸 귀찮게.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뛰었다. 에이 씨. 당분간 피시방에서 살아야겠다. 엄마는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아들을 돕는 거라고요. 기다리면 나중에 고딩들을 혼내준 후 알아서 술술 불 텐데. 그거 하나 못 기다리고.
뛰다 보니 어느새 다구리를 당했던 골목 앞이었다. 낄낄대는 소리와 함께 담배 연기가 바람에 휘청거리며 하늘로 솟아 흩어졌다. 그새를 못 참고 또 담배를 빨러 온 모양이었다. 무슨 너구리굴에 연기 피우냐? 새끼들아.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땐 아주 개박살 낼 테니까. 피울 수 있을 때 실컷 피워. 내가 금연주식회사처럼 강제로 담배를 끊게 만들어 줄게. 이를 악물고 뒤돌아 걷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어이, 꼰대 아저씨. 이리 와서 잠깐 얘기 좀 하지?”
꼰대 아저씨? 가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골목을 나온 고딩들이 담배를 물고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나를 다구리 시킨 놈들뿐만 아니라 못 보던 놈들까지 대략 7명은 넘어 보였다. 그 사이에서 나한테 오지게 맞았던 놈이 그때처럼 걸쭉한 침을 바닥에 뱉고는 옆의 놈을 보며 말했다.
“야, 우리가 저 새끼 존나게 팼거든. 근데 아까 겁도 없이 지나가더라? 부르니까 또 존나게 도망가.”
“나이 먹고 안 쪽팔리나. 소환사의 협곡에서 탈주하는 거 아님?”
“저 새끼는 브론즈도 안 될걸? 모친은 잘 계세요, 아저씨?”
시시덕거리는 놈들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패드립까지 치는 놈들을 가만히 놔둘 수 없지. 씩씩거리며 놈들에게 다가갔다. 7명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저번처럼 얻어터질 게 뻔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맞는 건 맞는 거고. 일단은 놈들을 두드려 패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니들이 개념을 상실했구나. 어디 좆고딩이 다구리 까서 이겨놓고는. 혼자선 암 것도 못하지?”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다 같이 덤비는 건 쪽팔린 일이라고 상기시키자. 그러기 위해서는 저번에 나한테 맞았던 놈을 자극해 혼자 덤비게 만들어야 한다. 직살나게 패준 후 전체를 제압하는 거지.
“어이 너 외계인처럼 대가리만 큰 새끼. 저번에 나한테 줘터진 거 기억 안 나냐? 뭐라고 했더라? 죄송하다며, 다신 안 그러겠다고 그랬잖아.”
쪽팔리지? 분명히 반응이 올 터였다.
“뭐래. 저 븅딱이.”
7명의 고딩들이 한꺼번에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이게 아닌데? 저놈들은 그때 이후로 집단의 힘에 대해 자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 계기였다. 잘못 생각했다. 따로따로 족쳐야 했다. 튈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불리하다. 일단 후퇴한 후 한 명씩 개인 면담을 하면 지들이 어떻게 할 거야? 울고불고 빌겠지. 하지만, 내가 이대로 도망가면 몰려다니면서 더 지랄발광할 거다. 싸워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후. 갑자기 끊은 담배가 고팠다. 어이, 거기 누구 담배 있으면 하나만 줘라.
는 개뿔. 일단 살고 봐야 한다. 안 그래도 온몸이 편찮은데, 또 맞았다간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고딩들을 피해 달아났다.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다. 진짜 도망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훗날을 기약하는 거다!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공원으로 뛰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진입로에 들어서자 마음이 놓였다. 미친놈들이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않겠지.
벤치에 앉아 아까 일을 떠올리자 울컥 화가 치솟았다. 절대 가만히 안 놔둔다. 그 좆같은 새끼들을 어떻게 잡아 족치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도 모르게 벤치 등받이를 팔꿈치로 쳤다.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아픈 것도 잊은 채 주먹으로 벤치 앉는 부분을 수차례 내리쳤다. 쾅! 쾅! 도망쳐서는 안 됐다. 너무 창피하고 분했다. 분명히 도망친 나를 비웃을 터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갈까?
아얏! 갑자기 손등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얼른 손을 들어 확인했다. 손등 정중앙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렸다. 뭔가에 물린 자국이다.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살폈다. 발밑으로 붉은 형광으로 빛나는 작은 뱀 한 마리가 길가에 난 풀숲으로 사라졌다. 얼른 뒤 쫓아 발로 풀숲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밟히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풀숲을 헤쳤다. 없다. 아무리 여기저기를 헤집어 봐도 풀숲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을 확인했다. 탁 트인 잔디밭이 펼쳐졌다. 그쪽으로 도망갔다면 분명히 보였을 터였다. 분명히 이 안으로 들어왔다. 풀숲은 작은 나무 밑동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됐다. 이상하게도 안에 있어야 할 형광 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잘못 봤나? 손등의 상처를 확인했다. 붉은 구멍이 두 개. 틀림없는 송곳니 자국이었다. 뱀에게 물렸다면. 그리고 두 개의 송곳니라면. 그건 독사였다. 소름이 쫙 끼쳤다. 얼른 119에 신고해야 한다.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몸을 가눌 수 없어 벤치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누웠다. 지진이 난 것처럼 사방이 흔들렸다. 우리나라의 독사 중에 제일 독성이 강한 뱀은 까치살모사였다. 인터넷으로 대충 사진을 본 적 있는데 색깔이 붉은 형광은 아니었다. 그럼 그 뱀은 뭐지?
지금 이런 잡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벤치에 누운 상태에서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핸드폰으로 119에 신고해야 한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만 조금씩 까딱거릴 뿐 아예 팔 자체를 움직일 수 없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도와달라고 소리쳐야 한다.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숨도 쉴 수 없었다. 마치 팔다리가 꽁꽁 묶인 채 좁은 관 안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두 눈이 녹고, 코도 녹아 비뚤어지고, 벌린 입은 흐르는 피부로 메워져 영영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읍읍. 이제는 주변이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이렇게 나는 공원 벤치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