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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이대로 괜찮은.
작가 : 이하지
작품등록일 : 2017.11.7

어른들은 모른다,
우리가 이대로 괜찮은지.
우리들은 궁금하다,
우리가 이대로 괜찮을지.

 
제2화 - 같고 다른 발소리
작성일 : 17-11-09 23:09     조회 : 308     추천 : 5     분량 : 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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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은지는 자신만의 네모난 세상에서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안으로 새끼손가락이 들어간 줄도 모른 채 그러고 있었다.

  사각 사각, 샤프심과 종이가 맞물려 소음이 만들어진다. 옆의 아이가 지우개를 쓰는 진동이 미미하게 전해져 온다. 자신의 숨소리도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색 새액, 하고.

 은지가 오른쪽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접힌 핸드폰을 바라봤다.

  9시 34분이었다.

 아, 이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분주해 지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의 작디작은 소음들은 사라져만 갔다. 그 빈자리를 넘치도록 채우는 것은 지퍼 여닫는 소리, 책 덮는 소리, 가방에 물건들을 넣는 소리, 친구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

  소리들을 가만히 듣던 은지도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쓰다 만 노트에는 샤프가 무료하게 데굴거리고 있었고, 반듯한 교과서에는 단정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마치는 종이 야자실 안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야자실을 빠져나갔다. 시끌시끌, 북적북적. 그런 소리를 내면서.

 

 “이은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활짝 웃으며 저를 쳐다보는 하지를 보았다.

 

 “집에 가자.”

 

 “응.”

 

 은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은지쨘, 은지쨘. 이것 좀 봐봐.”

 

 “뭔데?”

 

 하지가 자랑스레 노트를 내밀었다. 노트에는 순서가 뒤죽박죽인 만화가 그려져 있었다. 은지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의 그림은 항상 순서가 엉망이었다. 왼손잡이인 이유도 있지만, 워낙 제멋대로인 탓에 그저 공간이 남는 곳에다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지의 만화를 읽기 위해서는 항상 한 번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건 어떻게 읽는 거야?”

 

 “아, 여기서부터 이렇게 쭉 밑으로 와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그 다음엔 밑으로, 대각선 위로. 은지는 배운 방향을 따라 만화를 읽었다.

 

 “어때?”

 

 하지가 가방을 앞으로 멘 채로 말했다. 오늘은 끝까지 가방을 앞으로 메고 갈 셈인 듯 했다.

 

 “잘 그렸네.”

 

 “그렇지?”

 

 칭찬을 들은 하지가 히 하고 웃었다.

 

 “이번에는, 그 검은머리 애가 후회한다는 내용이야. 음, 왜냐하면….”

 

  신이 난 하지가 잔뜩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의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했다. 언젠가 하지가 전부 설명해주었던 이야기지만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인물들을 창조하고, 조합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것도 좋아했다. 도르르륵, 풀어내는 형식은 다양했다. 지금처럼 그림일 수도, 글일 수도, 입에서 나오는 말일 때도 많았다.

  은지가 걸음을 딱, 멈추었다. 나란히 걷던 하지도 그에 맞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은지쨘?”

 

  제자리에 가만히 선 은지에게 하지가 찰싹 붙었다.

 

 “왜 그래, 재미없어? 그만 할까?”

 

 “넌 좋겠다.”

 

 은지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하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냥….”

 

 은지는 다시 천천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도 그에 맞춰 발걸음을 뗐다.

 

 “왜?”

 

 하지가 다시 물었다.

 

 “넌 아무 걱정 없어 보여서.”

 

  실제로 그랬다. 같이 하교하기를 수십, 어쩌면 수백 번. 은지가 하지와 나눈 이야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또 많았다. 하지만 그 많던 대화 속에 하지의 고민과 걱정은 적었다.

  아니, 사실 없었다. 그 조금의 고민과 걱정들은 게임과 창작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래 보여?”

 

 “아니야?”

 

  하지는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아닌데… ”

 

  둘은 나란히 걸었다. 서로가 서로의 발걸음에 맞추면서 걸었다. 자동차의 라이트가 두 아이를 비추고 지나갔다.

 

 “걱정이 있다고 해서 걱정하면 뭔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하지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니까 나는 말이야. 물론 다가올 일에 신경 끄고 나몰라라 하자는 건 아니고, 뭐랄까. 굳이 이러나저러나 나한테 일어날 일이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맞지? 음, 그래서…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걱정하지 말고 즐겁게 지내자는 거야.”

 

 은지는 하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하지도 은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는 웃고 있었다.

 

 “즐겁게?”

 

 “응.”

 

 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걱정해봤자 우리한테 손해잖아. 우리가 걱정하고 고민하고 끙끙대는 만큼 비례해서 결과가 좋아지는 게 아니니까. 네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최선을 다한 거야. 후련하게 떨쳐버리고, 그냥 내일까지 쉬어. 하고싶은 걸 하고, 먹고싶은 걸 먹고, 졸리면 푹 자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풀죽지 마. 넌 당당해도 좋아. 우리는 당당해도 좋아. 우린 잘못한 게 없잖아. 그렇지?”

 

 “우리는….”

 

 잘못한 게 없구나.

 그렇구나.

 

 “맞아.”

 

 은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회사에 떨어졌다고 해서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내가 왜 움츠러들어야 할까.”

 

 “시선 때문이지.”

 

 하지가 대답했다. 둘은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또박 또박, 은지의 곧고 바른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투덕 투덕, 제멋대로 딛는 하지의 발소리도 들렸다.

  두 아이의 발소리는 달랐다. 하지만 틀린 발소리는 없었다.

  아이들의 갈림길이 가까워져 갔다. 하지는 언덕 밑으로, 은지는 언덕 위로. 두 아이들의 길은 같지만 달랐다.

  10시 14분. 언제나 비슷하게 헤어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은지쨘.”

 

 하지가 언덕을 올라가는 은지를 불렀다. 그러자 은지가 뒤돌아보았다. 활짝 웃으며 저를 쳐다보는 하지를 보았다.

 

 “네가 즐거우면 돼. 마음이 중요한 거야.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이, 그렇게 지내다 보면 잘 될 거야. 내가 면접관이라면 널 뽑을 거야. 면접에서 떨어진 네가 잘못한 게 아니고, 널 떨어뜨린 면접관이 잘못한 거야. 당연하지.”

 

 은지는 마음 한 켠이 따뜻해졌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가도 저런 말을 해주는 친구는 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고 있다고 눈치 채기도 전에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고마워.”

 

 “뭘.”

 

 하지는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아, 똥마렵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한 은지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다리를 배배 꼬고 발을 탁탁거리는 하지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초조 그 자체였다.

 

 “푸하하하핫….”

 

 “아, 쓰, 난 진지한데.”

 

 “어련하려고! 푸후후….”

 

 하지는 창피하거나 쑥스러우면 말을 돌리는 버릇이 있다. 은지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가 봐. 네 파라다이스 타임을 즐기세요!”

 

 “잘 가, 은지쨘! 내일 봐!”

 

 하지가 손을 붕붕 휘두르며 멀어져 갔다. 은지도 손을 살래살래 흔들며 인사해 주었다.

 

 *

 

 특유의 곧고 바른 발소리가 복도를 더듬어 내려갔다. 은지의 집 문은 코앞이었다. 은지는 문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약간 망설였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망설이는 건 은지의 오랜 버릇이었다. 지레 겁을 먹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은지는 이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은지는 힘차게 문고리를 잡았고, 문을 열었다.

  집 안에서부터 오는 익숙한 공기에 숨을 힘껏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당당해도 괜찮다.

 은지가 힘차게 말했다.

 

 “엄마, 나 면접 떨어졌다!”

 

 왜냐하면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2화입니다.

 작품 특성상 약간 암울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즐겁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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