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추배도(推背圖)1.
…내가 삼가 삼책(三冊)의 추배도(推背圖)를 살펴보았더니, 그 내용이 광대하고 그 심오함이 아득하여 안으로는 마음과 몸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천지간의 만물을 부릴 수 있으며 나아가 다가올 일을 볼 수 있고 이미 지나간 일도 거스를 수 있으니 참으로 천지간의 비밀이 모두 담겨 있었다.
무승휴(武昇烋)는 소주(蘇州) 곤산(崑山) 사람으로 밭 갈고 고기 잡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나 삼십이 될 때까지 늘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삼십이 되었을 때 무승휴는 고기를 잡아 근근이 모은 돈으로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해 큰물이 들어 키우던 종돈(種豚)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일이 생겼다.
무승휴는 그 돼지만이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재산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물에 뛰어들어 돼지를 건져 내려 했다. 하지만 결국 돼지는 건져 내지도 못한 채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갔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은 줄 알았다.
무승휴가 깨어나 정신을 차린 곳은 지하로 수맥(水脈)이 흐르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지하로 흐르는 물길의 한쪽 물가에 걸쳐지는 바람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갈 방도를 찾기 위해 지하 공간을 헤매던 무승휴는 열흘째에 비석 형태의 거대한 바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듯한 입석(立石)은 직각의 장방형으로 그 폭이 일 장, 넓이가 삼장이었으며 높이는 무려 아홉 장에 달했다.
입석의 각 면에는 깨알 같은 글귀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무승휴는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입석은 분명히 전체가 검은색이었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빛이 사라지고 투명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안은 보이지 않았다.
무승휴는 입석 표면에 가득 채워져 있는 무수한 글귀와 문양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알 수 없는 지하 공간에 이렇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바위가 우뚝 서 있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무승휴는 끝내 밖으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한 채 입석의 매끄러운 표면과 음각되어 있는 기이한 문양과 글귀들을 어루만지며 입석 옆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지하 공간 안에는 기이한 힘이 가득 차 있어 무승휴는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시장하거나 몸이 곤한 줄을 몰랐다.
어느 날, 입석에 기대어 잠을 자던 무승휴는 입석 안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입석은 조용히 진동하고 있었다. 그 진동은 입석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는데 진동이 커질수록 주위의 공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승휴는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공포와 기대를 품은 채 입석에서 떨어졌다.
이때, 뚜렷이 입석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입석 표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글귀들이 그의 눈으로 달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파고든 입석의 글귀들은 수많은 문양과 글귀들의 일부분으로써 오천 언(言)에 달했다.
시간이 흐르자 입석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진동이 점점 강렬해져 무승휴는 제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입석의 중심부에서 강렬한 섬광이 무승휴를 향해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휘몰아쳤다.
다시 정신을 차린 무승휴는 장강의 한 강변에 쓰러져 있었다.
며칠 만에 깨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머리는 비할 바 없이 맑았다.
그 후 무승휴는 무림에 나가 자신이 입석에서 읽은 오천 언으로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무림에 나아간 지 십 년 만에 자신이 세운 문파를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십승관의 십대 세력 중 하나로 만들 수 있었고, 다시 삼십 년이 지났을 때는 십승관의 대관주가 될 수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무승휴는 자신이 알 수 없는 지하 공간에서 본 입석이 전설 속에 나오는 참서(讖書), 추배도(推背圖)임을 알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추배도는 모두 삼책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 세 권의 책 안에는 천지 만물의 모든 비밀이 기록되어 있어 삼책의 참서 중 한 단 한 권만이라도 읽은 사람들은 역대의 제황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지금까지 존재했던 무림의 패웅과 영웅들은 모두 추배도와 관련이 있는 바,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의 근원이 바로 추배도 안에 있다 했다.
일설에 의하면 추배도를 만든 사람이 노자(老子)라고 했는데 또 다른 이는 추배도는 천지가 생길 때 함께 존재한 것으로써 삼책의 추배도를 모두 읽은 사람은 고금을 통틀어 단 한 명, 노자뿐이라고도 했다.
삼책의 추배도는 사십 년 만에 한 번씩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단 한 명에게 그 비밀의 단편을 전하는 바, 사십 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은 때에는 팔십 년 만에 다시 나타나 두 명에게 비밀을 드러낸다고 했다.
십승관의 대관주, 일정(一頂) 무승휴가 추배도를 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팔십 년 전의 일이었다.
* * *
태행산은 회남자(淮南子)에서 오행지산(五行之山)이라 불리는 대산으로써 천하의 허리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십승관의 십대 세력 중 하나인 건곤철축의 외사당(外事堂) 당주 곽자의(郭子宜)가 이 태행산에 들어선 것은 삼 일 전이었다.
기실 곽자의는 삼 일 전에 태행산에 들어설 때만 해도 하루면 목적하는 곳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목적지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대동했던 두 명의 수하 중 한 명은 이미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한 명도 부상이 심했다. 때문에 지금 곽자의의 목표는 오직 살아서 이 태행산을 빠져나가는 일 뿐이었다.
새벽안개가 드넓게 산을 뒤덮고 있었다.
곽자의는 살아남은 한 명의 수하와 함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무수히 뒤덮여 있었다. 그나마 그는 옆에 앉아 있는 수하에 비하면 상태가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부유물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을 멍한 상태로 바라보던 수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좋지 않습니다, 당주님!"
"또… 시작이군요."
낙엽을 밟는 발걸음 소리, 땅을 질질 끌며 가까워져 오는 소리, 어긋난 뼈끼리 부딪치는 듯한 절그럭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듯한 기척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착실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곽자의와 그의 수하 좌천강(坐遷降)은 지겹다는 표정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좌천강은 삼십 대 초반의 깡마른 체구를 지닌 사내였는데,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상관인 곽자의를 안타까워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이로 따진다면 상관인 곽자의는 동생뻘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좌천강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곽자의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상태였다.
물론 무공으로 따져도 곽자의가 더 고수였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자신이 상관인 곽자의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곽자의는 고요한 신색으로 안개 저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든 것은 다가오고 있는 그 무엇인가에서 기(氣)를 느낄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사람이든 야수이든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반드시 기가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한데 다가오고 있는 무엇인가에게서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익… 직!
발을 끄는 소리와 무언가 절그럭거리는 소리.
천천히 한 걸음씩 땅을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더욱 가까워지며 희미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무엇인가가 썩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곽자의가 검미를 찌푸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놈들과 다시 부딪치게 되자 새삼 마음속 깊이 또다시 충격이 느껴졌다. 어젯밤 동안 내내 싸우다가 수하 한 명을 잃었을 정도이지만 볼 때마다 지겹고 공포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다가오고 있는 것은 사람은 사람이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멀쩡해 보이는 시체도 있었지만 대부분 반쯤 부패되어 몸속의 뼈가 드러난 시체들이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시체들이 마구잡이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곽자의와 좌천강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향해 검을 쳐내지 않을 수 없었다.
퍼억!
곽자의의 검이 자신의 허리를 움켜쥐려는 시체의 어깨를 잘라냈다. 놀랍게도 한쪽 어깨가 잘려져 나간 시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반대 편 손으로 그의 목을 잡으려 했다.
곽자의의 검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시체의 목을 쳐냈다. 그제야 시체는 고목처럼 지면으로 무너져 내렸다.
시체는 그저 시체일 뿐이었다.
무공을 펼치는 것도 아니었고 행동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곽자의와 좌천강에게는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수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베어내도 끝없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