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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무협물
흑첨향
작가 : 박재영
작품등록일 : 20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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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기연의 시작2.
작성일 : 16-04-02 13:52     조회 : 814     추천 : 0     분량 : 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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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기연의 시작2.

 

 

 

 천뢰도에서의 생활은 적어도 능비령에게 있어서는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흑화고는 부모님의 묘에 성묘를 하고 아직까지 만나지 못한 친척들을 만나는 등 바쁘게 보내 천뢰도에 들어온 뒤부터는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여교 역시 천뢰도 내부의 지형과 고수들의 배치, 기관진법 등을 파악하러 다닌다며 한시도 방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능비령에 대한 천뢰도 사람들의 대접은 융숭하기 그지없었고 어느 곳을 가든 아무런 제약도 없었지만 어차피 내부의 지리도 몰라 갈 만한 곳도 없었다.

 능비령을 구제해 준 건 작은 부경령이었다.

 "뭐 하고 있어? 심심하지?"

 꼬마 부경령이 느닷없이 능비령의 방을 찾아온 건 삼 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옷차림도 깨끗했고 얼굴 또한 말끔했다.

 "음, 사실은 이건 비밀인데… 오빠는 내 맘에 들었어. 잘생겼으니까."

 꼬마 부경령은 심각한 비밀을 털어놓는 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후 능비령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따라와! 내가 이 안을 안내해 줄게. 뭐, 별로 재미있는 건 없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덜 심심할 거야."

 꼬마 부경령의 선심이 기특해 능비령은 그녀를 따라 천뢰도 안을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방 안에만 처박혀 있는 것도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오후 무렵에 꼬마 부경령 덕분에 능비령은 천뢰도의 지하 서고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지하 서고는 원래 천뢰도주의 혈족이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비지(秘地)인 듯했다. 하지만 꼬마 부경령의 안내를 받은 데다 능비령이 이미 흑화고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어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

 "책을 좋아하면 앞으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

 꼬마 부경령은 서고의 엄청난 책들을 둘러보며 능비령이 기뻐하는 빛을 드러내자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좋아했다.

 "이 서고는 기관진법에 의해 하루에 한 시진만 개방되는 곳이야. 그 시간이 지나면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으니 조심해야 할 거야. 그리고 어떤 책이든 읽을 수는 있어도 절대로 이 안에서 책을 가져 나가면 안 돼."

 그녀는 책이라면 쳐다보는 것조차 따분하다는 듯 능비령을 내버려 둔 채 서고를 빠져나갔는데 나가기 전에 한마디 주의를 잊지 않았다.

 그날부터 능비령은 지하 서고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지하 서고는 모두 삼 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 층마다 이십여 개의 석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석실마다 수십여 개의 서가(書架)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또한 한 서가마다 수백여 권의 책들이 꽂혀 있어 실로 지하 서고 전체의 서책이 몇 권이나 될지 그 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책들의 종류도 다양해 죽간 형태도 있었고 족자 형태의 비결도 있었다. 또 어떤 것은 너무 낡아 손만 대면 바스러질 것 같았다.

 '천뢰도가 중원에 온 게 700년이 넘었다더니 과연 역사가 깊은 집안답게 책이 많구나.'

 능비령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지하 서고 안을 돌아다녔다. 첫날은 그저 지하 서고 전체를 돌아보며 어떤 종류의 책들이 있는지 그 윤곽만 파악하는 데도 한 시진이 흘러가 버릴 정도였다.

 둘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능비령은 서가의 책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무공 비급들도 엄청 많았지만 능비령은 무공 비급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고가 닫힐 시간이 되면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

 능비령은 매번 겨우 한 시진밖에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지하 서고를 드나들기 시작한 지 칠 일째 되던 날, 능비령은 누군가가 서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것을 느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이었다. 입고 있는 흑의는 색이 바래 먼지처럼 회색을 띠고 있었고 깡마른 체격에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 눈빛이 형형하기 이를 데 없어 감히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능비령은 정신없이 책을 읽다가 언제부터인가 노인이 자신의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름살투성이인 노인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넌 정말 책을 좋아하는구나. 어쩌다 들어와서 무공 비급이나 뒤지다 가는 다른 놈들과는 달라. 한 시진밖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안타깝겠구나."

 "예. 왜 이런 귀찮은 규칙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능비령은 노인에게 어쩐지 호감을 느껴 솔직하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노인이 이빨도 없는 입을 벌려 크게 웃었다.

 "원래는 하루에 한 시진씩이라도 글을 읽으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었지. 또 책을 보호하는 목적도 있고. 하루에 한 시진을 빼놓고 나머지 시간은 책들도 휴식을 취해야 하거든."

 "책들이 휴식을 취한단 말입니까?"

 "이곳에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 때문에 책이 상하는 법이야. 그 사람의 몸에 묻어 들어온 먼지들도 나쁘지만 가장 나쁜 건 사람이 내뿜는 숨결 속의 습기이지."

 "아…!"

 능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지하 서고의 공기는 쾌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이 쉬지 않고 들어오고 있었으며 지하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책을 좋아하는 걸 보니 이 늙은이가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내 너에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능비령은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무척이나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원래 이 방법은 이 늙은이가 서고의 책들을 관리하면서 저절로 터득한 신공인데 수유관(須臾觀)이라 이름 붙였다."

 "수유관? 그만치 빨리 읽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 제대로만 터득하면 한 시진에 수십 권을 읽을 수 있지. 뭐,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너처럼 책을 좋아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터득할 수 있을 게야."

 노인은 흐뭇해하는 눈으로 능비령을 보며 비결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비결이라 해봤자 크게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노인이 가르쳐 준 방법은 책 안의 글자들을 하나하나씩 읽는 게 아니라 글씨가 적혀 있는 전체를 한꺼번에 눈에 박아 넣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족자 형태로 된 비결을 읽을 때 그 족자 속의 글씨를 읽는 게 아니라 족자 전체를 한꺼번에 머릿속에 담아버린다. 이런 식으로 한 번에 책자의 한 장을 기억한 뒤 시간이 날 때 기억을 떠올려 그 속의 글자를 하나씩 읽으면 된다.

 능비령은 과연 그런 신공을 터득하게 되면 하루에 한 시진밖에 서고에 머무를 수 없다는 걸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책장을 넘기며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에 나중에 한 글자씩 머릿속에서 읽으면 되는 것이다.

 능비령은 노인의 도움을 받으며 수유관을 익히기 시작했다.

 족자 하나를 한꺼번에 본 뒤 눈을 감고 그 족자 안의 글귀를 떠올린다. 처음에는 족자 안의 글자들 중 겨우 십여 개 정도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글의 순서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한 시진밖에 서고에 머무를 수 없는 데다 어차피 할 일도 없어 노인이 가르쳐 준 수유관을 계속 연마했다.

 서고 밖에 나갔을 때도 능비령은 주위의 지형지물이나 심지어 사람의 얼굴을 보며 수유관을 익혔다.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눈을 감은 뒤에 그 사람의 얼굴에 점이 몇 개 있는가, 수염은 어떤 형태인가 하는 걸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늘 수유관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서고 안에 들어갈 때마다 노인은 능비령의 수유관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뤘는지 확인해 본 후 부족한 점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되자 열흘 뒤에는 서책의 한 장에 적혀 있는 글자들의 반 이상을 떠올릴 수 있었고 글의 순서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능비령은 한번 본 책장의 글씨들 중 열에 아홉은 다시 기억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열흘이 지나자 단지 한 번 보니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면 책장에 적혀 있는 글자들이 모조리 선명하게 떠올랐다.

 심지어는 책장의 여백에 묻어 있는 먼지의 얼룩마저 떠올랐다.

 읽고 싶을 때는 다시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 머릿속에 책장 전체를 떠올린 후 그 속의 글씨들을 하나씩 읽으면 그만이었다. 마치 책장 전체의 형태가 고스란히 머릿속에 박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 기공은 내공도 필요 없었다. 단지 눈을 밝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야만 터득할 수 있었다.

 능비령은 이 기공이 많은 효용이 있다는 것을 뒤에야 알게 되었다.

 수많은 군중들을 한 번 보고 난 후에 다시 그 장면을 떠올려 그 군중들 속에 섞여 있는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고, 상대가 펼치는 무공을 한 번 본 후 나중에 차분히 떠올려 그 변화와 근간을 알아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두 달이 지나가 버렸다.

 능비령은 하루에 한 시진씩 서고에 들어가 십여 권의 책을 머릿속에 담아 나온 뒤에 자신의 방에서 그 책들을 다시 떠올려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수유관은 이제 경지에 올라 휙 하고 한 장을 넘기는 순간 이미 그 내용이 머릿속에 박혀 버릴 정도였다.

 천뢰도에 들어온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건만 흑화고는 아직도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능비령은 그녀의 이런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팔십 년 만에 돌아온 집인 것이다.

 "오늘은 이 책을 읽어 두어라."

 어느 날 능비령이 평소처럼 서고에서 책장을 넘기며 그 안의 내용들을 머릿속에 넣고 있을 때 노인이 다가와 두 권의 서책을 건넸다.

 한 권은 천을단(天乙端)이라고 표제가 적혀 있었는데 내공심결과 장법(掌法), 도법(刀法)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나머지 한 권은 동원검법정록(洞元劍法正錄)으로써 한 가지 검법이 적혀 있는 무공 비급들이었다.

 "가문의 멍청이들은 죽어라 하고 가문 무공만을 익히고 있어."

 능비령이 책자를 살피며 의아해하자 노인이 말을 이었다. 자못 분개한 태도였다.

 "물론 본가의 천뢰정법(千雷正法)이 뛰어난 신공이기는 하지만 원래 선조들은 만류귀원(萬流歸元)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다른 무공들을 섭렵하고 연구한 뒤에 비로소 천뢰정법을 익혔는데 지금의 멍청이들은 그저 가문의 무공만이 최고라는 아집에 빠져 다른 무공들을 무시하고 있다."

 능비령은 눈앞의 노인이 평생 서고의 책들만 관리해 온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노인은 오히려 도주보다도 배분이 높았는데 아무도 나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이미 이 갑자가 훨씬 넘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무공들이 천뢰정법보다 더 강해. 너라도 후에 그 두 가지 무공을 익혀 언제고 가문의 멍청이들에게 교훈을 내려 주거라."

 노인의 말에 능비령이 난감해하는 빛을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무공을 익힐 수 없습니다. 단전이 폐쇄되어 내공을 쌓을 수 없습니다."

 "단전이 폐쇄되어 있다고?"

 노인은 크게 놀란 빛이었지만 능비령의 말을 기이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노인은 잠시 동안 고개를 숙여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얼굴을 들었다.

 "단전이 폐쇄되어 있다고 내공을 쌓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 기(氣)를 단전 말고 다른 데다 모아놓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아암! 있고말고!"

 노인은 능비령을 향해 미소를 던진 후 서고 안쪽으로 갔다가 한참 뒤에야 돌아왔는데 그의 손에는 낡은 족자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테두리에 이상한 부호와 문양들이 빽빽이 그려져 있는 족자였다.

 테두리 안쪽의 그림이 보면 볼수록 실로 기이했다.

 분명히 산과 숲을 그린 산수화였는데 아무리 보아도 이 세상의 경관이 아닌 듯했다. 숲과 산이 그려진 아래쪽의 여백에 알 수 없는 문양이 깨알처럼 잔뜩 적혀 있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신기한 일도 많이 있는 법이야. 난 그것들을 모두 믿지는 않지만 또한 무시하지도 않는단다."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그림의 여백에 적혀 있는 글귀들을 해석해 주기 시작했다. 만물의 기(氣)를 받아들여 자신의 몸에 쌓는 방법이었는데 일반적으로 단전에서 시작된 기를 각 경혈로 일주천시켜 내공을 증진시키는 운기법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이건 심장에 기를 쌓아두는 구결이야. 심지어 몸의 외곽에 쌓아 보이지 않는 옷을 입은 형태가 될 수도 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열심히 여백의 문양을 해석하던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인은 새삼 족자 안의 산과 숲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족자에 그려진 이계(異界)로 들어가서 기를 쌓게 되면 더 빨리 기를 모을 수가 있다고 적혀 있어. 이계로 들어가는 방법은 음, 그러니까… 그건 글씨가 지워져서 모르겠구나."

 노인은 족자를 다시 말아 능비령에게 건넸다.

 "아까 내가 불러준 구결을 다 외웠느냐?"

 "예. 별로 어렵지는 않은 것 같은데 과연 단전이 폐쇄되어 있어도 내공을 쌓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능비령은 노인이 해석해 준 구결의 내용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어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그 족자는 나중에 필요하게 될지도 몰라 너에게 주는 것이니 갖고 가거라. 도주에게는 내가 말해 두마."

 능비령은 천을단과 동원검법정록의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둔 뒤에 두 권의 무공 비급을 다시 노인에게 돌려주었다.

 우연히 두 종류의 절세 무공을 얻는 기연을 만났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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