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기연의 시작1.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저녁 무렵에는 별로 크지 않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방을 잡고 마차를 맡긴 뒤 마차 안의 중년인을 방 안으로 옮기자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렸는데 내상이 심한지 거동이 불편했다.
정신을 차린 중년인이 구명의 은인인 흑화고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예를 갖추지 않아도 괜찮아요. 같은 식구이니까요."
"같은 식구이시라면…?"
중년인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흑화고는 잠시 감회의 표정이 되어 허공을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지금 천뢰도를 맡고 계신 도주가 어떤 분이신가요?"
"도주님은… 은염종(銀髥宗) 어르신입니다."
중년인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흑화고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은염종이라고만 하면 사실 난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그 사람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중년인은 잠시 망연히 흑화고를 바라보았다. 그가 흑화고의 말을 기이하게 여긴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천뢰도의 식구라면서 도주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도주의 외호를 듣고 다시 이름을 물어오니 이것은 크나큰 결례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중년인은 상대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순순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주님의 존성대명은… 부석숭(復奭崇)이십니다."
"아! 셋째 오라버니가 아직도 살아 계셨군요. 셋째 오라버니가 집안을 맡고 계시다니…."
흑화고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파도쳤다. 어느새 그녀의 맑은 눈에 이슬이 맺혀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했다.
중년인은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의 소녀는 아무리 보아도 이십 전후일 듯하다. 한데 이미 나이 일백이 넘은 천뢰도주의 여동생이라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한데 무엇 때문에 쫓기고 있었나요? 그들은 누구인가요?"
중년인이 망연해하는 순간 흑화고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중년인이 대답하려는 순간 시켜놓은 음식이 방으로 들어왔다. 중년인이 거동하기 힘들어 아예 음식을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점소이가 방 안의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은 뒤 나가자 중년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동천산장의 수하들이었습니다."
"동천산장이 감히 본가의 사람을 건드렸다는 건가요?"
흑화고의 눈썹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단지 아미를 살짝 찌푸린 것에 불과했는데 그 순간 방 안에 찬 공기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중년인은 눈앞의 소녀가 대단한 신공을 지니고 있음을 그제야 깨닫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우리는 원래 신분을 감추고 천곤목에 잠입해 있었는데 그만 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동천산장의 수하들은 천곤목의 명령을 받고 우리의 종적을 추적한 것입니다. 열두 명의 동료들 중 나 혼자만 간신히…."
중년인은 비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여교가 주위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혼자서만 음식을 집어먹고 있다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동천산장이라면 아까 정신없이 도망친 그 개새끼의 집안이에요. 쯧쯧, 그런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아작 내는 건데 정말이지 아깝군요."
중년인이 멍청히 여교를 바라보았다. 순진무구하게 생긴 어린 소녀의 입에서 너무도 거친 말이 튀어나온 때문이었다.
"어멋! 내가 또 나도 모르게…."
중년인이 멍청히 바라보자 여교가 목덜미까지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귀로 능비령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흑화고는 중년인의 내상을 치료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 다음날부터 중년인은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었다.
일행은 그로부터 삼 일이 지난 뒤 육반산에 도착해 천뢰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서너 개의 봉우리를 안에 담은 채 그 외곽을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들이 길게 이어져 둘러싸고 있었다.
능비령이 천뢰도를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너무도 웅대하다는 것이었다. 천뢰도는 과연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답게 그 규모의 웅대함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화아! 이건 무림 단체가 아니라 아예 하나의 왕국이로구나.'
천뢰도는 육반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해 건축되어 있었는데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정문뿐인지라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닐 수 없었다.
"본가가 섬을 떠나 이곳에 자리 잡은 게 벌써 칠백 년 전이라고 했어. 그 긴 세월 동안 성벽을 쌓고 또 보수하고, 그리고 안에 전각들을 지었으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놀라는 게 당연해."
천뢰도 안에 들어서자 흑화고는 감회 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담겨져 있었다.
한데 천뢰도에 들어서기 무섭게 주위를 유심히 휘둘러보는 건 흑화고만이 아니었다.
여교는 천뢰도의 정문을 넘어서면서부터 무언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태도가 기이해 능비령은 슬그머니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거야? 그리고 발걸음은 왜 세는 거야?"
여교가 여전히 눈은 주위의 지형을 세밀히 살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모든 것이 정보예요. 후에 자문정의 동료 중 한 명이 이곳에 잠입할 일이 생기면 이 정보들은 무척이나 유용하게 쓰일 거예요."
"뭐야?"
능비령은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자문정의 일을 그만둘 수 없니?"
여교가 그제야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빛이 감돌고 있는 눈이었다.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에요."
"뭔데?"
"시집가는 것. 오빠가 내게 청혼해 주세요."
"끄응!"
능비령은 안내를 받으며 두어 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흑화고를 따라 걸음을 빨리했다. 여교가 천뢰도 안의 지형이나 보초들의 위치, 몸을 감추고 있는 고수들의 배치 등을 열심히 머릿속에 담고 있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잠시 후 일행은 천뢰도주가 기다리는 빈청으로 안내되었다.
천뢰도주는 원래 강호에 나가 있었는데 흑화고에 대한 전갈을 받고 서둘러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고 했다.
천뢰도주 은염종 부석숭은 체구가 장대하고 아직도 청년의 그것처럼 피부에 탄력이 넘쳐 일백 살이 넘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흑화고를 보고 격동을 금치 못했다.
"정말… 령아가 맞구나.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천뢰도주는 자신의 여동생이 자그마치 80년도 넘은 뒤에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도 늙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많이 늙으셨네요, 오라버니는…."
흑화고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었다. 그녀 역시 감정이 격해 일시지간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뢰도주는 격정을 가라앉힌 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무림의 기공 중에 주안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것도 아니고, 설마 반노환동한 것도 아닐 테고… 내 일신의 공력은 팔십 년이 넘는다. 이런 나도 늙는 것은 피할 수 없었는데 너는 어떻게 해서 아직도 네가 집을 나간 열여덟 살 때의 모습 그대로일 수 있느냐?"
흑화고는 한숨을 내쉰 뒤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들려주었다.
옆에 능비령과 여교가 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긴 이야기를 끝마쳤다.
천뢰도주의 눈에 다시 놀란 빛이 떠올랐다.
"너는 태어난 뒤 단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는데 언제 비요둔을 계승할 수 있었단 말이냐? 너의 사부가 누구였느냐?"
"실은 저의 글 선생이셨던 분이 비요둔의 전대 문주이셨어요."
"천규 선생(天揆先生) 말이냐? 그랬구나. 어딘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그래! 이제 기억나는구나. 글 선생인 천규 선생이 죽고 나서 얼마 뒤에 네가 사라졌었지."
천뢰도주가 부드러운 눈으로 흑화고를 바라보았다.
"네가 집을 나간 뒤 우연히 밀법을 익힌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통해 네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쪽 사람들에게 흑화고라 불리고 있는데 거의 사신(死神)으로 통한다고 하더구나."
"사부님의 원수들을 제 손으로 모두 죽였어요. 사문인 비요둔을 능멸한 다른 사람들 역시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지요."
"호오…."
천뢰도주는 탄성을 흘려냈다.
흑첨향과 무림은 엄연히 서로 달랐지만 또한 무림에서 활약하고 있는 흑첨향의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이 적어도 밀법을 익힌 사람들 세계에서는 절대자에 가까운 신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흡족한 듯했다.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때 빈청의 문이 열리며 시비 한 명이 들어섰다. 시비의 전갈에 천뢰도주는 흑화고의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너의 다른 오빠들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너에게는 가족들이 있단다. 자, 모두들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어서 가보자꾸나."
천뢰도주가 흑화고를 데리고 간 곳은 도주의 일가들이 살고 있는 내성(內城)이었다.
내성에도 역시 손님을 맞이하는 빈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수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흑화고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뢰도주는 먼저 흑화고의 조카들을 소개했는데 대부분 칠십이 넘은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첫 번째 오빠의 아들은 이미 구십이 넘어 있었다.
'그래, 생각이 나. 큰오빠의 아이였어. 그 꼬마가 이제 완전히 노인이 되어 있구나.'
흑화고는 가장 먼저 소개받은 장조카를 대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집을 떠날 무렵 막 열 살이 되었던 조카였다. 그녀는 기억을 떠올린 후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가장 잘 따랐던 조카였던 것이다.
그나마 흑화고는 큰오빠의 아들만을 간신히 알 수 있을 뿐 모두들 그녀의 일가친척이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한 명씩 흑화고 앞으로 나와 자신을 소개하며 절을 올렸다.
흑화고는 머뭇거리며 절을 받았지만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조카뻘 되는 사람들이 절을 마친 후에는 다시 그 조카의 아들과 딸들, 혹은 며느리들이 인사를 했다. 원래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이면 수백여 명에 달할 것이나 그나마 직계로 삼 대(三代)까지만 인사를 온 게 이 정도였다.
삼 대를 내려가자 청년들과 여인들이 흑화고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흑화고보다는 나이가 많을 듯했다.
흑화고에게 모두를 인사시킨 후 천뢰도주는 그제야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이분 소협은?"
천뢰도주의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흑화고가 워낙 늙지 않아 혹시 능비령도 그런 게 아닌 가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흑화고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의 주인이세요."
"호… 그렇다면 내게는 매제 되는 사람이군. 반갑네."
천뢰도주가 반색하며 능비령의 손을 잡았다.
능비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당황해서 헛기침을 터뜨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허공만 노려보았다. 딱히 눈 둘 곳이 없었다.
여자가 남자를 소개하면서 주인이라고 한다면 남들은 으레 남편으로 생각할 게 아니겠는가. 과연 천뢰도주의 일가들은 능비령을 흑화고의 남편으로 여긴 듯 그 대접이 융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찌 되었든 능비령의 신분은 족보상으로 그들보다 아득히 높았던 것이다.
능비령이 흑화고를 한번 노려본 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쩔쩔매는 순간 빈청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소녀가 뛰어 들어왔다.
대략 7, 8세가량 되었을까?
흙 밭에서 뒹굴다 왔는지 전신이 흙투성이인 소녀였다.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기에 나만 빼놓고 모두들 여기에 모여 있는 거지?"
소녀는 당돌하게 빈청 안의 사람들을 둘러본 후 허리에 양손을 턱 걸치고 거칠게 내뱉었다.
"령아!"
"이,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여기저기에서 당황스러워하는 호통들이 터져 나왔다.
소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빈청 안을 둘러보다가 흑화고를 발견하고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못 보던 언니네."
한 중년 미부가 황급히 뛰어나와 소녀를 잡아끌며 소리 죽여 말했다.
"쉿! 너에게는 대조모가 되시는 분이야. 제발 함부로 입을 열지 마라."
소녀가 여인의 손을 뿌리친 뒤 쪼르르 흑화고에게 뛰어왔다.
"그 딴 거 어려워서 싫어요. 난 그냥 예쁜 언니라고 부를래요."
흑화고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거침없이 흙투성이 소녀를 가슴에 안아 들고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렇게 부르렴. 한데 넌 이름이 뭐지?"
"난 령아예요, 경령! 그게 내 이름이에요. 성은 부씨고요."
흑화고가 흠칫 이채를 머금으며 천뢰도주를 바라보았다.
천뢰도주가 물기 어린 눈으로 흑화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벌써 오래전에 죽은 줄 알았다. 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네 생각이 나서 네 이름을 붙여주었지. 요사이 저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면 영락없이 어린 시절의 네 모습이더구나."
흑화고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소녀를 끌어안아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