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신분의 비밀(秘密)1.
장원을 떠난 능비령과 막능여는 길을 재촉해 어둡기 전에 오십여 리를 강행군 한 뒤에 노숙할 준비를 했다.
능비령이 지니고 있던 건량도 다 떨어져 사냥을 해서 요기를 때워야 했다.
막능여가 사냥을 하기 위해 숲을 뒤지고 능비령은 모닥불을 피웠다.
"그러므로… 우적! 스스로 죽음을 부른다 해도… 쩝쩝!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우걱우걱! 또한 삶을 희구한다 해서 모두 스스로 어짊을 베푸는 것이라고만 할 수도 없으니… 끄윽···!"
고기가 다 구워지자 막능여는 거침없이 고기를 뜯으며 한편으로는 도덕경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 도사들은 비린 것을 잘 먹지 않는다더니 역시 막형은 가짜 도사로군.'
능비령은 이미 막능여가 현음소정을 훔쳐 내기 위해 태방시원이라는 도가 일문에 거짓 입문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한데 막능여는 길을 걸으면서도 쉬지 않고 도덕경을 떠들어대고 있어 남이 보면 영락없이 도(道)에 심취한 사람 같았다.
어느 정도 시장기를 면한 뒤에 막능여가 능비령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능 소제는 어디로 가는 중인가?"
"하북(河北)의 북당하(北塘河)에 갈 예정입니다."
"하북이라면 꽤 먼 곳인데 그곳이 고향인가?"
능비령이 고개를 저었다.
막능여는 그의 얼굴이 굳어지자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능비령이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그저 그림 그리는 장 노인이라는 것밖에는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님의 말씀에 의하며 내 부모님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그렇다면 능 소제는 부모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인가?"
"예, 나를 키워준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제가 찾으려는 장 노인이라는 분이 맡겼다고 하더군요."
막능여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능비령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출신 내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스스로의 근본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막능여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항상 밝다가도 가끔씩 얼굴에 그늘을 떠올린 이유가 그것이었나?'
막능여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과장된 몸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함께 가기로 하세. 사실 난 집을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갈 곳이 없네. 뭐 이곳저곳에서 쫓기는 신분이니 서둘러 인적이 없는 곳에 처박혀 황언령을 익혀야 할 입장이지만 그것도 급하진 않네."
능비령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막능여를 바라보았다.
"출가한 게 아니라 가출을 했다는 겁니까? 그리고 태방시원이라는 문파에서 추적하고 있다는 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또 다른 곳에서도 막형을 쫓고 있습니까?"
"그렇다네. 이미 말했지만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바람에 집에서도 날 찾아다니고 있네."
막능여가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안은 십승관의 십대 세력 중 하나인 건곤철축(乾坤鐵築)이라는 곳인데, 어머니께서 날 같은 십대 세력 중 한 곳의 딸과 억지로 혼인을 시켰네. 이른바 정략결혼이라는 거지."
막능여는 힘든 말을 꺼내듯 땀까지 흘려가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한데 내 부인이 된 그 여자가… 그 여자가… 휴우! 관두세. 어째 그 여자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니 말일세."
"설마… 부인이 무서워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겁니까?"
막능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다물자 능비령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질문을 던졌다.
막능여가 더욱더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음… 그게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충 비슷하네."
"못 생긴데다가 성질마저 무서운 모양이지요?"
"응? 그, 그래, 바로 그렇다네."
"그래도 그렇지, 다 큰 남자가 부인이 무서워 도망을 치다니 나 원 참!"
막능여는 입을 다물었다. 능비령이 부인에 대해 은근히 캐물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진 데다 날이 이미 어두워져 능비령은 모닥불 옆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막능여의 일만 생각하면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날이 밝아오자 능비령과 막능여는 일직선으로 숲을 벗어나기 시작해 하루 만에 호북성(湖北省) 의도현(宜都縣)으로 들어섰다.
능비령은 의도현에 도착한 뒤에 막능여와 함께 헤맨 산이 형문산(荊門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도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능비령은 그동안 계속 노숙을 해온 터라 오랜만에 푹신하고 편안한 침상에서 잠을 자기 위해 서둘러 객잔으로 들어갔다.
각기 하나씩 방 두 개를 잡은 뒤에 막능여가 자신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능비령은 다시 은밀히 점소이를 불러 또 하나의 방을 잡았다. 바로 흑화고를 위한 방이었다.
밤이 너무 늦은 데다 쉬지도 않고 산을 빠져나오느라 지쳐 능비령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소협, 문 좀 열어주십시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능비령은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사람이 객잔의 점소이라는 걸 알고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조금 전 방을 안내해 주었던 점소이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능비령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객방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점소이가 아니었다. 이마에 살(殺)이라는 글자가 문신되어 있고, 군청색의 장삼을 걸친 냉막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이었다.
아직 미처 잠에서 덜 깬 능비령의 가슴으로 짧은 비수 하나가 파고들었다.
방심하고 있던 능비령으로서는 이 암습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능비령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몸으로 체득한 본능으로 순간적으로 왼쪽 팔을 내밀어 가슴을 보호했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살수의 턱을 쳤다.
이 순간, 뒤쪽의 창문을 통해 스며든 또 한 명의 살수가 능비령을 향해 검을 쳐냈다.
모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객방의 문을 열기 무섭게 자문정의 살수가 능비령의 가슴을 향해 비수를 뻗어냈고, 거의 동시에 뒤쪽 창문을 통해 또 한 명의 살수가 소리없이 스며들어 검을 쳐왔다.
하나 두 번째 살수는 미처 능비령의 몸을 베지 못한 채 허공에서 몸이 둘로 갈라지며 피를 뿜어냈다.
두 번째 살수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자 그 뒤에 흑화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화고는 첫 번째 살수를 바라보았다.
능비령이 반사적으로 뻗어낸 오른손에 적중된 살수는 객방 앞의 통로에 쓰러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얼굴이 턱을 경계로 깨끗하게 두 조각으로 베어져 있었다.
얼굴이 두 동강이 난 상태로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능비령은 단지 두 번째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오른손을 쳐냈을 뿐인데 상대가 얼굴이 갈라져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화고는 아직도 방 안에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첫 번째 살수와의 중간에는 능비령이 서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손을 쓸 공간이 전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흑화고는 첫 번째 살수가 얼굴이 둘로 베어진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며 능비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능비령은 막 흑화고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려다가 입을 딱 벌렸다.
"그럼 흑화고가 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멍청히 반문을 던지던 능비령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이것 때문에?'
능비령은 시험 삼아 힘껏 오른손을 휘둘러보았다. 하나 묵환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흠, 천잔은 공력을 운용해서 펼치는 것이라 했는데 한 줌의 공력도 없는 내가 어떻게 이걸 펼쳐 낼 수 있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구나.'
능비령은 첫 번째 살수를 죽인 것이 천잔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른손을 휘둘러도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흑화고 역시 첫 번째 살수를 죽인 병기가 능비령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묵환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거… 이리 줘봐."
"응?"
능비령은 탐스런 물건을 바라보는 듯 눈을 빛내고 있는 흑화고의 모습이 어쩐지 불안했지만 천잔을 풀러 그녀에게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흑화고는 천잔을 오른손에 차고 공력을 주입했다.
순간, 팔찌 전체가 형태가 변하며 위쪽으로는 검은빛의 얇은 철판으로 변해 보호대처럼 손등을 덮었고 손목 아래쪽으로 가느다란 검은빛의 사검(絲劍)이 세 자 길이로 뻗어 나와 손에 쥐어졌다. 손잡이만 일반적인 검의 손잡이와 같을 뿐 검신은 실처럼 가늘었다.
흑화고가 실검을 벽을 향해 휘두르자 두터운 흙으로 쌓아 만든 벽면이 소리도 없이 베어져 버렸다.
흑화고의 눈이 커졌다. 검기(劍氣)를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검은 검기를 운용한 것과 같은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내가 가질게."
"뭐야?"
흑화고는 묵환을 풀러 다시 능비령에게 내밀었다.
"지금은 우선 네가 갖고 있어. 내가 다른 병기를 구해줄 때까지만 말이야."
'나 원··· 다들 내가 뭘 갖고 있는 꼴을 못 보는군. 왜 모두들 내가 갖고 있는 병기만 탐을 내는 거냐고! 하긴 뭐, 여인들이나 차는 장신구 같아 영 께름칙하긴 했지. 한데 그러고 보니 흑화고에게 딱 어울릴 것 같은 물건이로구나.'
능비령은 일단은 천잔을 돌려받았기 때문에 흑화고의 말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실 그의 신경은 지금 첫 번째 살수의 공격을 막았던 왼쪽 팔에 가 있었다.
치명적인 부상을 피하기 위해 첫 번째 살수의 공격을 팔로 막지 않았던가.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고 이치대로라면 그의 팔은 비수에 꿰뚫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팔에는 피부가 긁힌 정도의 상처조차 없었다.
"흠, 영류정인가 뭔가 하는 거… 정말 대단한 거였구나."
능비령은 진정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연히 이계에 들어갔다가 영류정을 얻었고 또 화고라는 영물을 만난 것이었다.
능비령의 왼쪽 팔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흑화고도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
"안 되겠어. 내가 좀 손해이긴 하지만 네놈이 스스로를 보호할 정도의 무공은 지니도록 해야겠어. 앉아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흑화고는 능비령으로 하여금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게 했다.
"잘 들어!"
"듣고 있어."
"이건 내 방까지 알아서 잡아주는 네 마음이 기특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니까 정신 차려서 들어야 해."
"주인으로서 할 도리를 한 것뿐이야. 그렇긴 해도 은혜를 모르면 안 돼."
"뭐야!"
흑화고는 태연히 중얼거리는 능비령을 향해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한 구절을 읊은 후 능비령에게 외우게 했고 완전히 외운 뒤에야 다음 구절을 가르쳐 주는 식이었다.
반 시진 정도가 흘러 능비령이 모든 구결을 완전히 외운 것을 확인한 후 흑화고는 그의 등 뒤에 정좌하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려준 건 불문의 운기법이니까 후에 법신검이 체내에 융화되어도 서로 부딪치는 일은 없을 거야."
능비령은 흑화고가 손을 뻗어 자신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자 의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구결대로 운기를 해봐. 처음이지만 내가 진기를 인도해 줄 테니 어렵지 않을 거야."
흑화고의 손에서 부드러운 기가 능비령의 명문을 따라 흘러 들어왔다.
그 기는 명문에서 곧바로 단전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능비령에게 운기의 묘(妙)를 자신의 기를 이용해 가르치려는 듯했다.
이 방법은 속성의 효과를 지닌 것으로써 혼자서 운기에 입문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수배나 빨리 내가기공의 운용을 터득할 수 있게 해주는 이득이 있었다.
하나 일단 능비령의 단전으로 기를 흘려낸 뒤 다시 각 대혈을 따라 순서대로 기를 일주천시키려던 흑화고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나지 않을 수 없었다. 능비령의 단전이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크게 놀란 흑화고는 진기를 회수한 뒤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넌 누구지?"
"뭐? 난… 나야."
흑화고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미 자신의 질문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단전을 폐쇄시키는 건 상승의 내가기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 내 말은… 네가 누구이기에 어떤 사람이 너에게 이런 악독한 수법을 펼쳐 놓았느냐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냥 난데?"
능비령이 중얼거리자 흑화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능비령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태도였다.
"너의 단전을 폐쇄시켜 놓은 수법이 아주 기이해. 나는 기연을 얻어 육십 년의 공력을 지니게 되었지만 나의 공력으로도 그 금제를 풀어낼 수가 없었어. 법신검이 지금까지 조금도 융화되지 않고 각 경혈에 흐트러져 있는 이유 역시 네 단전이 폐쇄되어 있기 때문이었어."
일반적으로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단전에 형성된 진기를 상승의 내가구결에 따라 일주천시킨 뒤에 다시 단전으로 회수하는 일을 반복하며 점차 내공을 증진시켜야 한다. 한데 진기가 단전으로부터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게 단전이 막혀 있다면 내공을 익힐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근련을 단련시켜 외공이나 초식을 위주로 하는 검법 정도는 익힐 수 있어도 내공을 운기해야 하는 상승무공을 연성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흑화고가 고개를 저었다.
"너의 신분 내력에 어떤 비밀이 있는 모양이군. 하북의 북당하로 가는 이유가 장 노인이라는 사람을 찾아 네 신세 내력을 알아내기 위해서라고 했었지?"
"그래."
"아무래도 네 단전이 폐쇄된 이유를 알아내려면 먼저 너의 신분 내력을 알아내야만 할 것 같아."
능비령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단전이 폐쇄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