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계(異界)의 문(門)1.
거대한 절벽의 하단에 뚫려 있는 동굴은 넝쿨에 가려 있는 데다 입구가 좁아 언뜻 보기에는 동굴이 아니라 암석의 갈라진 틈새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단 안에 들어가니 두 사람 정도가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동굴은 안으로 계속 이어져 있었지만 능비령은 동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비를 피하기 위해 동굴을 찾았던 것이다.
한데 동굴 안에 들어선 뒤 막능여는 계속 동굴 안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동굴은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밀력(密力)이 느껴져."
능비령은 막능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굴 안쪽에서는 비릿한 짐승의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냄새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어 아마도 어떤 동물이 잠시 동안 보금자리로 삼았던 곳 같았다.
잠시 후, 결국 막능여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능비령은 혼자 있는 것도 따분해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안쪽으로 십여 장이나 들어갔을까?
동굴은 점점 어두워져 종내에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막능여는 소매 속에서 작은 대나무 통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더니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흔들며 뭐라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웅얼거렸다.
대나무 통 속에서 작은 종이 조각들이 날아올라 동굴의 천장에 달라붙으며 환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종이 조각에는 각기 이상한 부호와 주문들이 적혀 있었다.
동굴 안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마치 수십여 개의 야명주를 천장에 박아놓은 듯했다.
"와아! 정말 신기하군요."
능비령은 막능여가 보여준 이상한 술법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순간 그의 눈에 동굴 벽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또 다른 부적들이 들어왔다.
"한데 언제 저런 부적까지 붙였어요?"
"내가 붙인 게 아니네."
능비령이 어리둥절해져 질문을 던지자 막능여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내 뒤를 바싹 따라오게! 절대로 세 걸음 이상 떨어지면 안 되네."
막능여가 잔뜩 긴장한 채 동굴 안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능비령은 그의 뒤를 바싹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데 온갖 괴이한 부적들이 벽면에 잔뜩 붙어 있는 지점을 지나 세 걸음 정도 들어간 순간 느닷없이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 버렸다. 동굴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막능여와 능비령은 놀랍게도 어떤 우거진 숲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비는 오지 않았고 하늘에는 손에 잡을 수 있을 듯이 거대한 달이 낮게 떠 있었다.
능비령은 한순간에 주변의 풍물이 바뀌어 버리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환영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자신들이 나온 동굴이 그 뒤쪽의 나무들이 보이는 반투명하게 희미한 형태로 눈에 들어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누군가가 밀법을 펼쳐 그 동굴을 이계와 연결되는 문(門)으로 만들어놓았네."
"이계의 문? 그럼 여기가 다른 세상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네. 흑첨향의 수많은 이계 중 한 곳이지.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기로 하세. 내가 만든 통로가 아니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시 돌아나갈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니···"
'흑첨향? 이 사람도 과연 흑첨향에 대해 알고 있었구나.'
능비령은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기분이 되어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나무들의 형태가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잎사귀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이리저리 뒤틀린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있는 나무들이었다.
거대한 달이 지면과 맞닿을 듯 낮게 떠 있는 것도 괴이했지만 그 나무들의 형태는 더욱 괴이했다.
이런 엉뚱한 상황 속에서도 막능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가까이 있는 큰 나무의 밑동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태평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좀 먹을 게 없는가?"
"이런 상황에서 먹을 생각이 납니까?"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지금 비가 오고 있으니 비가 그칠 때까지 머물러 있다 다시 나가면 그만이네. 아마 한잠 자고 나가면 비도 그쳐 있을 것이네."
"끄응…."
능비령은 막능여의 옆에 앉으며 품속에서 건량을 꺼내 막능여에게 나눠 준 뒤 자신도 조금씩 뜯어 입 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사실 빗속을 걷느라 꽤 오랫동안 건량조차 먹지 못해 무척 시장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한참 정신없이 건량을 뜯어먹던 능비령이 돌연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인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를 느낀 때문이었다.
과연 능비령과 삼 장 정도의 거리 저쪽에서 작은 동물 하나가 나무에 몸을 감춘 채 얼굴만 내밀고 능비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긴 체형이 족제비를 닮았지만 족제비보다는 작았고 털이 풍성한 꼬리와 몸 전체에는 금빛과 검은빛이 회오리 형태로 얼룩져 있어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능비령은 처음 보는 그 괴이한 동물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건량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먹고 싶어 하는 눈치이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태도였다.
능비령은 빙긋 웃으며 건량이 쥐어져 있는 손을 동물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동물은 능비령의 얼굴을 한번 힐끔 보더니 다시 손을 보며 머뭇거렸다.
능비령은 계속 웃는 얼굴로 건량을 내민 손을 흔들었다. 해치지 않을 테니 와서 먹으라는 몸짓이었다.
알 수 없는 괴상한 동물이 나무 뒤에서 나와 머뭇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막능여는 능비령의 이런 행동에 관심 없는 듯 어느새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회오리 문양처럼 전신을 맴돌고 있는 윤기 흐르는 털과 사슴의 눈처럼 순박한 눈이 진정 귀엽기 이를 데 없었다. 기이하게도 꼬리가 번개 문양으로 휘어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능비령은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다가온 괴상한 동물에게 건량을 내밀었다.
예의 괴상한 동물은 얼른 건량을 잡아채더니 쏜살같이 원래 있던 나무 뒤로 돌아가 버렸다.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무척이나 귀여운 놈이군."
능비령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길게 몸을 뉘었다. 빗속에서 강행군을 한 탓에 무척이나 피곤했던 것이다.
막능여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느닷없이 터져 나온 엄청난 괴성 때문이었다. 마치 상처 입은 야수가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놀란 짐승이 신음을 터뜨리는 것 같기도 한 괴상한 소리였다.
"뭐야?"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막능여의 옆에는 능비령이 망연히 앉아 자신의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능비령의 표정은 해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듯한 절망과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듯한 황당함, 꿈이겠지 하는 기대감 등등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있는 정말이지 괴상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웃고 싶지만 웃을 수도 없다는 듯한, 거의 울 듯한 능비령의 표정을 보고 막능여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의 그 괴성이 능 소제가 내지른 거였나?"
"으으으… 도대체 이게 뭐냐고요?"
능비령은 턱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며 울 듯한 표정으로 막능여를 바라보았다.
막능여의 눈이 커졌다.
능비령의 오른쪽 턱 아래에 큼직한 혹이 달려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살덩어리가 축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건가?"
"모르겠어요. 자고 일어났더니 이런 게 턱에 붙어 있더라고요."
"원래 있던 게 아니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막능여는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바싹 들이민 채 능비령의 턱에 매달려 있는 혹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킨 막능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류정(攖瘤精)일세!"
"영류정? 그게 뭡니까?"
"뭐긴 뭐야, 그냥 혹이란 말일세."
"으으, 혹인 걸 누가 모릅니까! 왜 이런 게 별안간 생겨난 거냐고요!"
"몸에서 생긴 게 아냐. 어디선가 와서 턱에 붙은 걸세."
능비령의 눈에 기대의 빛이 번뜩였다. 몸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뗄 수도 있습니까?"
"혈관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그냥 잘라낼 순 없네. 잘라내면 피가 멈추지 않아 결국은 죽게 되니까."
"으···!"
기대의 눈빛을 머금고 있던 능비령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막능여가 말을 이었다.
"영류정은 일종의 요괴야. 쉽게 말하면 혹이지만 인간계의 혹인 영류(攖瘤)와는 달리 약간 보기 흉하다는 것 외에는 별로 큰 해를 끼치지 않네. 숙주로 삼고 있는 인간의 몸에서 그야말로 미세한 양의 혈액과 영양분을 취할 뿐이니까."
"약간 보기 흉할 뿐이라고요? 이게 약간 흉한 정도냐구요! 난 아직 장가도 못 갔단 말입니다!"
능비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절박한 심정과는 달리 막능여의 태도가 너무 태평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정히 그렇다면 떼어주겠네."
막능여는 소리 지르는 능비령을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보다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능비령은 깜짝 놀라 막능여를 바라보았다. 그는 매달리는 듯한 음성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뗄 수 있는 겁니까?"
"이미 말했지만 이 영류정은 몸에 기생해도 해는 없네. 오히려 잘만 이용하면 도움이 되지."
막능여는 말과 함께 능비령의 턱에 붙어 있는 혹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살덩어리 같은 해면체가 꿈틀거리며 능비령의 턱밑에서 뽑혀져 나왔다.
막능여는 해면체처럼 꿈틀거리는 한 무더기의 살덩어리를 능비령의 왼손 손등에 올려놓았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무척이나 욕심나는 놈이지만 자네 것이니까 할 수 없이 자네에게 주는 거네."
"엉? 싫어요! 갖고 싶으면 당신이 가지라고요!"
능비령은 기절초풍할 듯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그의 손등에 놓여 있던 한 무더기 살덩어리 같은 물체가 피부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막능여는 계속 능비령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놈은 생명력이 질기네. 이놈을 손에 넓게 자리 잡게 만들면 그 손은 무쇠처럼 단단해지지. 수명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보다는 꽤 오래 사는 걸로 알고 있네."
능비령은 영류정이 손에 완전히 스며들어 손등과 손목은 물론 팔꿈치까지 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워낙에 넓게 퍼진 듯 원래의 손과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막능여는 영류정이 완전히 넓게 스며든 것을 확인하듯 능비령의 왼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영류정은 기생하고 있던 숙주가 죽을 때가 다가오면 다른 숙주의 몸으로 이동해 가지. 물론 기생하고 있던 숙주가 죽기 전에 이동하지 못하면 이놈 역시 죽게 되니까, 아마 이놈들이 죽게 되는 건 그런 경우뿐일 걸세."
능비령은 자신의 왼손과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원래의 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영류정이 스며든 느낌도 없었다.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능 소제는 복연을 만난 거야. 영류정이 기생하고 있는 그 손은 이제 금강불괴일세. 게다가 영류정의 힘까지 더해져 그 손은 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야."
"예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막능여가 정말로 부럽다는 눈빛이었다. 그 태도가 워낙 진지해 능비령은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지 못하는군. 손을 이리 내보게."
막능여는 허리에서 한 자루 검을 뽑으며 막무가내로 능비령에게 손을 내밀라고 했다.
능비령이 우물쭈물하는 순간 어느새 검이 그의 손목을 쳤다.
능히 손목이 베어질 정도의 강력한 힘이었다. 하지만 능비령의 손목은 베어지지 않았고, 검이 손목을 강타한 충격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손과 팔에 스며든 영류정이 충격을 흡수해 버린 것 같았다.
"이제 복연을 만났다는 내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막능여가 능비령을 보며 씨익 웃었다.
능비령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손과 팔을 만지며 멍하니 서 있었다. 아직도 실감할 수는 없지만 막능여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가세. 저 문이 언제 닫힐지 모르니 이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네."
막능여는 어안이 벙벙해 멍청히 서 있는 능비령을 뒤로한 채 반투명한 형태로 희미하게 떠올라 있는 동굴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막능여를 따라 이계와의 통로가 되어 있는 동굴 입구로 들어서던 능비령은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미미한 움직임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잠을 자기 전에 건량을 주었던 괴상한 동물이 능비령을 쫓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