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자문정(刺文庭)2.
"멍청이, 일어나! 누군가 오고 있어."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서 왜 안 일어나지?"
"살기(殺氣)가 없잖아."
능비령은 모로 돌아누우려다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잠들기 전에 피워놓은 모닥불 맞은편에 흑화고가 어둠처럼 앉아 있었다.
모닥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 둥그렇게 깊은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능비령은 모닥불 저쪽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약초 캐는 사람들조차 다니지 않는 이런 깊은 숲 속을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흑화고의 눈에 의혹의 빛이 솟아났다.
능비령의 눈은 정확히 누군가 오고 있는 방향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직 백여 장 저쪽에 있어 흑화고로서도 간신히 기(氣)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며칠 전 살수들이 암습해 올 때도 너는 내가 알려주기 전에 먼저 알고 있었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냥… 용병으로 정찰이나 매복, 침투 따위의 일을 오래했더니 저절로 그런 능력이 생기더군."
"저절로 그런 능력이 생겼다니 말도 안 돼."
"매복 중에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능비령이 흑화고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거야 당연히 적에게 발각되는 거 아닐까?"
흑화고가 아무 생각 없이 입을 열자 능비령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쥐야. 매복 중에 가장 무서운 적은."
"쥐?"
흑화고는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능비령이 표정을 보니 절대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매복 중에 잠들어 버리면 쥐가 갉아먹지. 발이나 손을 갉아먹는 건 아무것도 아냐. 아침이 되었을 때 바로 옆에서 함께 매복하던 동료가 머리부터 갉아 먹힌 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 적도 있어. 그 뒤부터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쥐의 움직임조차 알 수 있게 되더군."
흑화고는 일시지간 무어라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가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연 것은 짧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지옥이었군. 한데 그런 지옥을 겪은 사람치고는 눈빛이 맑아."
능비령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눈에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언젠가는 한번 그 지옥에서의 생활을 떠올려 본 뒤 내 손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괴로워할 생각이야. 한 번 정도는 말이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모든 걸 마음 한구석에 넣고 닫아버렸어. 미치지 않기 위한 도피 방법이지.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살아남았다는 것만을 즐거워했어. 내 손에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싸움이 끝나는 순간에 깨끗이 지워 버렸고."
흑화고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능비령의 내면의 슬픔을 엿본 것 같은 느낌에 그녀 자신의 마음도 알 수 없는 그림자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흑화고는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짐짓 밝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얘기 좀 해봐."
"무슨 얘기?"
"네 이야기. 아무 거라도 괜찮아."
"별거 없어. 열네 살 때 같이 살던 할아버지가 죽었어. 용병이 된 건 할아버지가 죽으면서 강해지라고 한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선 먹고 살기 위해서였고. 그 어린 나이의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열네 살 때? 그렇다면 너 지금 몇 살이라는 거지?"
흑화고의 눈에 문득 기이한 빛이 스쳐 갔다.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한 기이한 눈빛이었다.
능비령은 그녀의 눈빛을 보지 못한 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열아홉."
"뭐야? 그렇게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해갖고 열아홉이나 먹었다는 거야? 내가 팔십 년 동안 가사 상태에 빠져 있던 것을 빼면 나와 별 차이도 없잖아."
흑화고가 깜짝 놀라 새삼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기실 흑화고는 가사 상태에 있던 기간을 빼면 능비령보다 겨우 한 살이 많았던 것이다.
"내 얘기만 들을 게 아니라 흑화고도 얘기 좀 해봐. 왜 팔십 년 동안이나 가사 상태로 있게 된 거지?"
"정극풍천에 법신검을 탈취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법신검에 제압당했던 거야. 그저 한잠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팔십 년이 흘러버렸다는 것을 알고 나서 정극풍천의 놈들을 모조리 때려죽이려고 했는데 그때 정화군이 공격해 왔어. 너 때문에 깨어나긴 했지만 또 너에게 귀속되어 버렸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원망을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어."
능비령의 질문에 흑화고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어찌해야 마음을 티끌 없는 거울처럼 맑게 닦아서 욕망의 찌든 때를 씻어버리고 그릇됨이 없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순간, 능비령이 응시하고 있는 어둠 저쪽에서 노랫가락 같은 웅얼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전에 꽤나 시끄러운 누군가의 음성이 먼저 밤의 정적이 깨며 들려온 것이다.
"어찌해야 명백하게 드러남이 사면팔방을 관통함에도 헤아릴 수 없는 앎으로써 신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能창兒乎 滌除玄覽 能爲雌乎 明白四達]…."
숲 저쪽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칠 척에 달할 듯 컸고 그 거대한 전신이 근육으로 뭉쳐져 있는 듯 단단해 보였다.
머리에는 도관(道冠)을 썼지만 옷은 평범한 청의였다. 허리에는 검이 두 자루나 걸려 있었다.
안정된 걸음걸이와 흐트러지지 않는 호흡, 거대한 철탑이 미끄러져 오듯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위압감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누가 감히 뭇 사람들의 혼탁한 본성(本性)을 가지고 고요한 가운데 맑아지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감히 원초적인 평안함이 오래 머물도록 유지됨을 허물지 아니하면서 생성(生成)의 원활함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대략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능비령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면서 쉬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구절 같았는데, 워낙 시끄러워 무슨 말인지 정확하지 않았다.
도인(道人)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복장을 한 사내는 능비령의 세 걸음 앞에 이르러서야 혼자 떠들던 것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혼자 머리를 흔들며 떠들던 모습과는 달리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무량수불! 불빛을 보고 반가움에 서둘러 오긴 했지만 정말 이런 곳에서 노숙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모닥불 가까이 다가 온 사내는 능비령 혼자 모닥불 옆에 앉아 있는 모습에 놀란 듯한 눈빛이었다.
사내의 모습이 보일 때쯤 흑화고는 다시 허공에 몸을 감춘 상태였다.
능비령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이런 곳을, 더구나 이런 어둠 속에서 여행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딘가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부끄럼 많고 숫기 없는 소년이 낯선 사람 앞에서 간신히 호의를 드러내 보이는 듯한 미소였다.
능비령의 그 미소에 사내는 친근감을 느낀 듯 물어보지도 않고 모닥불 앞에 앉았다.
"빈도는 막능여(莫能與)라 합니다."
스스로를 소개하는 사내의 태도는 정중해도 너무 정중해 오히려 상대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아, 예, 능비령입니다."
능비령은 엉겁결에 이름을 밝힌 후 사내, 막능여를 바라보았다.
"저어… 그것이 도호(道號)입니까, 아니면 본명이십니까?"
"아직 도사가 되지 못했으니 도호는 아니고 그냥 이름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능비령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가 내심 아차 했다. 하지만 막능여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능비령이 질문은 던진 이유는 사내의 이름이 너무 기이했기 때문이었다.
막능여(莫能與)라 함은 더불어 능히 경쟁할 상대가 없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실로 광오한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노자의 도덕경에 의하면 그 의미가 정반대로 해석된다.
바다가 능히 바다로써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온갖 하천의 물길을 모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 법칙에 미루어 성인(聖人)은 반드시 먼저 자기를 낮추고 남과 대립되어 다투지 않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때문에 세상에는 성인과 더불어 능히 경쟁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내의 이름은 너무도 광오한 이름이기도 했지만 또한 스스로를 낮추어 물러서는 겸양(謙讓)을 뜻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막능여의 눈이 문득 능비령의 옆에 놓여 있는 도에 멈춰졌다. 들고 다니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도였다.
일순 막능여의 눈에 노골적으로 탐욕의 빛이 솟아났다. 과연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저 도(刀)는… 무척 귀한 것이로군요. 하지만 아무래도 빈도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병기입니다."
능비령은 쓴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막능여의 태도가 너무 솔직한 탓도 있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도는 과연 거대한 체구를 지닌 막능여에게 안성맞춤일 듯싶었다.
막능여가 별안간 자신의 허리에 있는 두 자루의 검을 풀어냈다. 두 자루 모두 검집 안에 들어 있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검집만 보더라도 명검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이까짓 검과 바꾸자고 하면 큰 실례가 될 거야."
잠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던 막능여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두 자루의 검을 허리에 찼다. 이어 그는 능비령을 향해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빈도가 나중에 그 도에 못지않은 좋은 병기를 구하게 되면 서로 바꾸는 것 말입니다."
"그, 그건…?"
능비령은 다소 어이가 없는 기분이었다.
막능여는 아직 도와 바꿀 만한 병기를 구하지도 못한 상태이다. 게다가 능비령과 그는 또 언제 서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이였다.
'사람이 좀 모자란 건지 아니면 순박한 건지 모르겠구나.'
능비령은 내심 중얼거린 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형제는 착한 분이로군요."
능비령이 허락하자 막능여는 매우 기뻐했다. 마치 곧 능비령의 도가 수중에 들어오기라도 하는 듯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고마워했다.
"그건 그렇고… 말씀을 편하게 하세요. 부담스럽군요."
막능여가 고개를 들어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처음 만났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소형제의 부탁대로 편하게 말을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막능여는 별안간 무엇이 생각난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처음에 왔던 방향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