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자문정(刺文庭)1.
자문정(刺文庭)이라 함은 이마에 문신을 새긴다는 의미이다.
살(殺)이라는 글자가 보기 흉하게 이마에 문신된 상태로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다. 자문정의 살수가 되었다 함은 이미 그 자신을 버린 것이다. 때문에 천하제일의 살수니 뭐니 하는 칭호는 적어도 자문정의 살수들에게는 존재할 수 없었다.
단지 문파의 이름만 남을 뿐, 자문정의 살수들은 입문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격리시켜야 한다. 감춰져 있다는 것, 비밀에 가려져 있다는 것 자체가 병기로써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었다.
자문정의 살수들은 오랜 시간 철저하고도 혹독한 지옥 훈련을 거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일생 동안 한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의 임무밖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단 한 번이 평생을 걸 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대가는 크다. 그들이 스스로를 희생시킴으로써 삼백여 가구가 모여 사는 서하촌(西霞村) 전체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누이가 있고 어머니도 있으며 형제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자문정의 살수들은 기꺼이 자신을 버릴 수 있었다.
자문정 살수들의 공격 방법은 특이했다.
임무를 맡아 직접적인 살인에 나서는 것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언제나 세 명의 살수가 같이 움직인다.
두 번째 살수는 첫 번째 살수의 근접 거리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동료가 실패할 경우에만 나선다.
두 번째 살수는 동료의 실패를 이용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암습을 막아낸 뒤에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정도는 방심하는 법이다. 게다가 살아났다고 해도 거의 대부분 작은 부상이라도 입고 있는 상태인지라 두 번째 살수의 살인은 의외로 성공률이 높았다.
세 번째 살수의 임무는 앞의 두 동료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임무는 두 명의 동료가 모두 실패했을 경우 그동안의 경과를 상부에 보고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임무에 실패했을 경우 그 원인을 분석해 두 번 다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한 대책이었다.
첫 번째 살수가 실패한 경우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살수의 공격마저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세 번째 살수가 임무의 실패에 대한 분석 결과를 보고한 적은 없었다.
한데 자문정이 탄생한 이후 처음으로 실패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사천성(四川省) 부강(浮江)은 가릉강의 지류로 감숙성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합천현에 이르러 가릉강과 합류된다.
뱃길이 편리해 상류의 중패(中珼)까지 작은 배로 중패에서 집산되는 약재를 반출할 수 있었다.
그 부강의 중류에 대화진(大和鎭)이 있고 대화진에서 동쪽으로 이백여 리 정도 들어가면 서하촌(西霞村)이라 불리는 여(麗)씨 성만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었다.
서하촌은 땅이 척박해 무엇을 심어도 잘 자라지 않았고, 뒤로 등지고 있는 산도 벌채나 약초 채집조차 할 수 없는 험산이었다. 때문에 서하촌 사람들은 대대로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작은 고을이었다. 서하촌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쪽으로 해가 기울 무렵 서하촌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한 폭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그 노을을 바라보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보기에도 칠순은 넘어 보이는 촌로였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은 갓 이십을 넘겼을 듯한 청년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힘든 밭일을 끝내고 해가 지기 전에 잠시 정자에서 쉬고 있는 부자지간 같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는 결코 일개 농사꾼의 그것이 아니었다.
"허··· 실패했다고 했느냐?"
"처음부터 청부 금액이 너무 많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정도의 금액이면 능히 구파(九派)의 제자 중 한 명을 죽여 달라고 해도 기꺼이 수락했을 액수가 아닙니까?"
"정화군에 속해 있던 일개 용병에게 걸린 청부 금액치고는 너무 과했지. 하지만 실패하다니…."
노인은 매우 허탈한 표정이었다. 자문정이 생긴 이래 최초의 실패였다.
청년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영준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이마에는 문신이 깊게 새겨져 있어 섬뜩한 느낌이었다.
"보고 드린 대로 그자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리 기척을 죽이고 접근을 해도 그자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누군가 옆에서 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죽여야 할 대상이 용병으로 5년이나 있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
"용병이라면 정규군과는 달리 정찰이나 매복, 침투(浸透)와 적장 암살 등의 특수 임무를 맡는 법이지. 그는 아마 그 과정에서 바람의 흐름이나 동물들의 움직임, 곤충이나 새의 울음소리 등으로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법을 저절로 몸에 익혔을 것이다. 이것은 내공으로 상대의 기(氣)를 읽어내는 것보다 오히려 더욱 효과적이다. 심지어 오 리(五里) 밖의 적도 알아낼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
"오 리 밖의 움직임마저 알아낼 정도란 말입니까?"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면 불가능하지만 숲이라면 가능하다."
노인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 자신은 납득했을지 몰라도 청년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노인의 눈이 다시 청년에게 돌려졌다.
"그래서… 네 형들은 이미 상대에게 종적이 발각된 것을 알면서도 결국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냐?"
노인은 서하촌의 촌장이자 자문정의 문주(門主)였다.
그의 음성에는 질책의 빛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독백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은 질문을 한다기보다는 실패하게 된 경과를 머릿속에서 되새기는 듯 담담하기만 했다.
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일호(一號)는 암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정면 공격을 한 것입니다. 마침 인적이 없는 산속이기에 주위의 이목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청년의 인상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는 죽은 살수들에 대한 호칭이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죽은 일호는 기실 그의 친형이었던 것이다.
"한데 오히려 당했다?"
"야수의 감각을 지닌 자였습니다. 체계적인 무공이 아니라… 수많은 실전(實戰)을 통해 쌓여진 효과적인 전투 기술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 일부분을 내주는 대신 일호의 생명을 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다시 2호를 막았다는 것이냐?"
이미 모든 경위가 자세하게 기록된 보고서를 받은 상태였다. 노인은 그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청년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보고하는 것처럼 차분히 말을 이었다.
"2호가 어떻게 당했는지는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2호는 목표에 접근한 순간 허공에서 저절로 몸이 갈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단 일 초도 펼치지 못한 상태로 말입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노인의 눈이 청년의 눈에 고정되었다.
청년의 얼굴이 굳어졌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습니다. 청부를 맡긴 그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게 있습니다. 청부를 완수하려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내야 합니다."
노인의 눈이 다시 환상처럼 아름다운 노을을 응시했다. 마치 그 노을의 아름다움에 취해 모든 것을 잊은 듯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능비령이라 했던가, 우리가 죽여야 할 소년의 이름이?"
"예."
"그에게 삼 개 조(組)를 보낸다. 기한은 없다. 임무를 완수하기 전까지는 돌아올 수 없다. 그리고 능비령이라는 소년에 대한 좀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일은 교아에게 맡겨라."
"여교(麗嬌)에게 말입니까? 그 말괄량이를 강호에 내보낸단 말입니까?"
"덜렁대기는 해도 실력은 믿을 만하지."
"예."
청년은 고개를 숙였다. 공손히 문주 앞을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의 눈에는 이 순간 의혹의 빛이 솟아나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문주의 명령은 순서가 바뀐 것 같았다.
문주는 먼저 목표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낸 뒤에 형제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문주는 삼 조(三組)를 한꺼번에 보내면서 다시 여교를 시켜 목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문주께서는 설마… 새로 투입하는 형제들마저 실패할 가능성에 대비해 여교에게 정보를 알아내라고 따로 지시한단 말인가?'
문주에게서 전이된 것일까?
청년은 어떤 섬뜩한 불안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