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귀환(歸還)2.
능비령이 불안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우피(牛皮)로 만든 검은색의 가죽 주머니 하나가 불쑥 능비령의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물론 그 가죽 주머니를 쥐고 있는 손은 바로 흑화고의 손이었다.
"이거 맞지?"
능비령은 멍청히 은자 주머니를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뭐가 이렇게 빨라? 아무래도 이상한데?'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능비령은 저잣거리를 뒤져 여행에 필요한 물품과 흑화고의 새 옷을 한 벌 구입한 후 할 수 없이 객점에 들렀다. 1층은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주청(酒廳)으로 되어 있고 2층은 객실로 꾸며진 그런 곳이었다.
능비령은 의심쩍어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점소이에게 곧 일행이 올 거라고 얼버무리면서 방 두 개를 잡았다.
잠자리는 편했다.
숲에서 노숙을 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능비령은 어쩐지 흑화고에게 오히려 당한 것 같은 기분인지라 별로 편안하지 못했다.
"비령."
억지로라도 잠이 들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바로 흑화고였다.
"넌 식사를 했지만 난 아직 안 했어. 식당으로 가."
"으…!"
능비령은 울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객방을 나서던 그의 눈이 커졌다.
능비령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은 과연 흑화고였다. 하지만 예전의 그 흑화고가 아니었다.
산발되어 있던 머리는 깨끗이 빗겨져 허리 아래에서 검은 흑단처럼 출렁인다. 홍의경장은 타는 듯 붉었는데 홍기 어린 얼굴과 어울려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소매 끝에 드러나 있는 새하얀 손은 이 순간 더욱 하얗게 빛을 뿌리고 있는데 이 세상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버릇인 듯 그녀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냉랭함이 그녀의 미모를 감추지는 못했다. 오히려 빙결 같은 맑음이 느껴져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댁이… 그 귀신같은 여자가 맞는 거야?"
능비령의 눈이 멍청해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배고파. 빨리 내려가."
흑화고는 능비령이 얼굴을 붉히고 자신을 멍청히 바라보는 모습을 대하고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능비령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기랄! 예뻐도 너무 예쁘잖아.'
능비령은 흑화고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자신이 왜 위축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주청은 한가한 편이었다.
"이 식당에서 제일 잘하는 음식이 뭐지?"
흑화고는 구석진 자리에 앉기 무섭게 점소이를 불러 대뜸 값비싼 요리를 주문했다.
능비령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새어 나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후, 보기에도 그럴듯한 요리들이 나오자 능비령은 울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은 간신히 소면 한 그릇으로 때웠는데 얻어먹는 사람은 황제처럼 먹는구나.'
누군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 그 앞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일은 남이 보기에도 궁색해 보이고 또한 처량한 일이었다.
능비령은 음식 값을 치르고 객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멍청히 앉아 그 값비싼 음식들이 흑화고의 입 안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심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앉아. 할 이야기가 있어."
능비령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흑화고가 손을 흔들었다.
할 말이 있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능비령은 다시 제자리에 앉지 않을 수 없었다.
흑화고는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능비령은 남이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세상에서 가장 궁색하고 처량해 보이는 처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밥 한 끼 지을 시간쯤 되어서야 저를 내려놓은 흑화고는 점소이에게 물 한 그릇을 시켰다. 맑은 물이 담겨 있는 그릇이 도착하자 그녀는 물을 마시지 않고 물그릇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물은 먹으라고 있는 거지 들여다보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조용히 해. 방해되니까."
흑화고의 표정은 엄숙했다.
능비령은 그녀가 장난을 하는 게 아님을 깨닫고 의혹의 눈으로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는 물그릇을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흑화고가 들여다보고 있는 그릇 속의 물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물의 표면에 파문(波紋)이 일기 시작했다. 파문은 점점 작은 소용돌이로 변하기 시작해 이내 그릇 속의 물들이 맹렬히 회전했다.
"누가 날 불렀느냐?"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의 표면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난 것은 그 소용돌이가 멈춰진 뒤였다. 고목의 껍질처럼 굵은 주름살들이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 중년 남자의 얼굴이었다.
능비령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청 안은 한가한 편이고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구석진 자리여서 다른 사람들은 물그릇의 변화를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수면에 얼굴만 비쳐지고 있는 사내가 짜증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어 그의 눈이 흑화고의 얼굴에서 멈춰졌다.
"설마… 흑화고 부경령(復炅翎)?"
사내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극심한 공포의 빛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흑화고의 얼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네놈 따위가 입에 올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흑화고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내의 눈에 떠올라 있는 공포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부(復) 저저(姐姐:소저의 높임 말)를 대합니다."
다음 순간, 흑화고를 향해 무릎을 꿇은 사내의 전신이 수면에 비쳐지고 있었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공포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태도였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흑화고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수하를 대하듯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거긴… 운남성의 무정(武定)이로군요."
사내가 주위를 확인하듯 눈을 떼구르 굴린 후 대답했다.
"이곳에 무기를 살 만한 곳이 있느냐?"
"무기라시면 법력(法力)이 깃들어 있는 것을 말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수면에 비쳐지고 있는 사내가 뭔가 생각하듯 눈을 굴렸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다행히도 그곳에도 법력 무기들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위치는 지금 계신 객점에서 나가서 오른쪽으로 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골목 안입니다."
"됐어."
흑화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면 위의 사내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정중하게 절을 한 후 그 형체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막 형체가 희미해지며 사라져 가던 사내의 눈이 짧은 순간 능비령의 얼굴을 스쳐 갔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무엇인가 엄청난 것을 발견한 듯한 경악의 빛이 그 눈에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설마…!"
사내가 신음처럼 중얼거리자 흑화고가 아미를 찌푸렸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자 사내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황급히 소리친 사내의 모습이 점차 흐려져 갔다. 수면에 파문이 일고 다시 소용돌이가 친 후 사내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흑화고는 사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물그릇을 집어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그걸 먹어?! 어째 내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까?'
능비령은 지금까지 흑화고가 보여준 광경에 그야말로 어리둥절해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람의 모습이 물에 비쳐지고 그 사람과 이야기까지 나눈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수경망(水鏡網) 고랍(枯臘)이 널 알아봤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 몸 안에 있는 법신검을 알아보았다고 해야겠지."
'수경망 고랍? 아까 그 물에 비쳐졌던 사람인가?'
흑화고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언가 걱정스러운 일이 있는 듯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러나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인 양 화사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어나. 갈 곳이 있어."
"어, 어딜?"
능비령은 엉겁결에 흑화고를 따라 일어나며 더듬거리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흑화고의 말에 능비령의 자신의 불안이 고스란히 적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 이곳에도 법력 무기를 파는 곳이 있다더군."
'이래서 또 내 돈만 축나게 생겼군.'
능비령은 반항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녀를 길들이기 위해 어설픈 짓을 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호되게 당한 조금 전의 경험을 떠올린 것이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 하지만 능비령은 소매치기 사건이 흑화고가 조작한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2.
거리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밤이 이미 깊었지만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데다 대로 양쪽의 기루와 객잔에서 등(燈)을 내걸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한데 아까 그게 무슨 술법이지?"
흑화고와 함께 무기점을 찾아가며 능비령이 질문을 던졌다.
"별거 아냐. 내가 알고 싶은 정보가 있어서 흑첨향의 수많은 이계(異界) 중 환환수계(幻幻水界)의 사람을 불러냈던 거야."
흑화고는 정말이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능비령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흑화고의 태도가 너무 심드렁해 더 이상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문득 능비령은 기이한 느낌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흑화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끄응,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능비령은 내심 고개를 저은 후 흑화고를 돌아보았다.
"안 되겠어."
"뭐가?"
"도로 숨어. 이렇게 남의 이목을 끄는 상태로는 길을 갈 수도 없잖아."
"호호호호···!"
흑화고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