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귀환(歸還)1.
정화군의 병단이 중원으로 귀환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삼군(三軍)으로 나누어진 대선단은 세 곳의 항구로 나뉘어 입항했는데 그중 능비령이 속해 있는 중군이 닻을 내린 곳은 뇌주반도(雷州半島)의 유사항(流沙港)이었다.
그곳에서 군역(軍役)에서 해제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은 다른 곳으로 배속이 되었고, 용병들은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동료들과 헤어진 능비령은 험한 산지(山地)를 택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관도를 따라 여행하는 것이 편하지만 지금의 능비령에게는 산지를 통해 여행하는 것이 더 편했다. 지난 5년 동안 서역 정벌군을 따라 열대림을 누비며 생활한 습관 때문이었다.
인적이 드문 숲과 험준한 산악을 통과해 능비령이 보름 만에 도착한 곳은 운남성(雲南省) 북쪽에 위치한 무정(武定)이라는 곳이었다.
무정은 본래 만이(蠻夷)의 땅이었으나 원(元) 때 예속되어 무정로(武定路)와 화곡주(和谷州)를 두었고, 명대에 이르러 무정부(武定府)로 개명된 곳이었다.
운남과 사천, 서강, 3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까닭에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대도(大都)였다.
성내로 들어서자 좌우로 상가와 객점, 기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그 중앙 대로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쉬지 않고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과 상점마다 그득히 쌓여 있는 온갖 상품들, 그리고 양쪽의 점포에서 손님을 부르는 소리….
능비령으로서는 이런 대도를 접해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령…!"
능비령이 주위의 소음과 눈에 뜨이는 온갖 현란한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잠시 멍청히 서 있는 순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음성 하나가 그의 귀를 찔렀다.
능비령은 흠칫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나 주위에는 그를 부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처음 와본 이곳에 날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고… 내가 잘못 들었겠지.'
능비령은 수많은 사람들로 소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고개를 흔든 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령, 부탁이 있다!"
그 순간, 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제야 능비령은 자신을 부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바로 흑화고의 음성이었다.
지난 한 달 보름여 동안 흑화고는 단 한 번도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말을 건 적도 없었다. 해서 능비령은 차츰 흑화고와 사원의 일을 잊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무슨 부탁이지?"
능비령은 자신의 주위에 늘 흑화고가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꺼림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포목점에 들러 내 옷을 한 벌 산 뒤에 객점에 들러 방을 얻어."
흑화고의 모습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은 능비령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능비령은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해하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혼자 중얼거리는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기 싫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음성이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80년 전에 입던 옷이야. 낡기도 낡았지만…."
흑화고는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이듯 뜸을 들인 후에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유행이 지났단 말이다. 게다가 난 80년 동안 씻지도 못하고 화장도 못했으니 객점에 들어가자고 한 것이다."
'낡은 건 둘째 치고 유행이 지나서 새 옷을 사야 한다고? 훗! 그러고 보니 귀신같기만 한 이 여자도 여자는 여자였군.'
능비령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짐짓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한 채 질문을 던졌다.
"호, 그래서 힘들게 자꾸 공령인가 뭔가 하는 은신대법을 펼쳐 계속 허공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만물의 기를 받아들였다가 내 몸과 동화시켜 내뿜으며 허공에 몸을 감추는 거니까 알고 보면 별로 힘들지도 않고 공력 소모도 많은 편은 아니야."
흑화고의 음성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는 달리 매우 부드러웠다. 아마도 능비령이 곧 새 옷을 사주고 방을 잡아줄 것이라는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흑화고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능비령이 단호하게 입을 떼었다.
"힘들지 않으면 계속 몸을 감추고 다녀. 아깝게 돈을 써가면서 새 옷을 살 필요도 없네 뭐."
"…!"
능비령이 단호하게 말하자 흑화고는 말문이 막힌 듯 더 이상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감추고 있는 듯한 능비령의 바로 옆 허공 한곳에서 화악 하고 살기가 솟아났다.
잠시 후, 당장이라도 덮쳐들 듯한 기세가 지워지며 허공에서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비령, 내가 정중히 부탁해도 안 되는 거야? 정화군에 용병으로 5년이나 있었으면 돈도 제법 많이 벌었을 텐데 죽으면 갖고 갈 생각이냐고."
그녀의 말투가 무척 부드러워졌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좀 전의 오만했던 말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나이 차이가 별로 없는 누이가 남동생에게 오히려 애교를 떠는 듯한 음색이었다.
능비령이 고개를 저었다.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목숨을 담보로 번 돈이야. 함부로 쓸 수 없어."
"이 자식…!"
허공이 갈라지는 기이한 음향과 함께 하나의 손이 불쑥 능비령의 코앞에 나타났다. 몸은 보이지 않고 손만이 나타나 그를 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능비령은 그 손을 막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태도 같았다.
과연 흑화고의 손은 능비령의 코앞에서 뚝 멈춰졌다가 누군가 볼까 두렵다는 듯 황급히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흠, 제대로 풀려가고 있는 것 같군. 이 기회에 누가 주인인지 확실히 가르쳐 주지.'
능비령은 내심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잘만 진행되면 흑화고의 오만한 태도를 고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주인 대접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능비령은 내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로 옆의 식당으로 들어가 소면 한 그릇을 시켰다. 대번에 그의 귀로 흑화고의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왜 한 그릇만 시켰지?"
능비령은 식탁에 앉아 멀뚱멀뚱 딴청을 하며 태연히 대꾸했다.
"넌 새 옷을 입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고 했잖아."
능비령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뭔가 흑화고가 알아서 하지 않는 한 옷을 사주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계속 굶길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능비령의 이런 태도에 흑화고는 어이가 없었던지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능비령은 소면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은 후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식당을 나섰다.
능비령으로서는 이곳 무정(武定)에 특별한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서 그는 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을 구입한 후 떠날 생각이었다.
어느덧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능비령은 서둘러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저잣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상인들과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로 붐벼 서로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였다.
능비령은 사람들을 뚫으며 자신이 필요한 물품들을 파는 점포들을 찾기 시작했다.
"멍청이!"
문득 능비령의 귀로 다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예의 음성이 흑화고의 것임을 깨닫고 짐짓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뭐가 불만이지?"
"불만은 없어. 네놈이 멍청하게 은자 주머니를 소매치기당하고도 희희낙락하고 있으니까 멍청이라고 부른 것뿐이야."
능비령의 눈이 커졌다.
그는 지나가던 행인들이 사람들이 보든 말든 황급히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과연 소매 속에 넣어두었던 은자 주머니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능비령은 크게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수상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그 은자 주머니에는 그가 지난 5년 동안 용병 생활을 하며 번 은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어지간한 일가족이 5년은 먹고 살 수 있는 큰 액수였다.
능비령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그때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
"내 돈이 아니니까. 게다가 어차피 쓰지도 못하는 돈이잖아."
"으… 안 돼! 그게 어떤 돈인데… 5년 동안 죽어라 하고 모은 돈이야. 죽어도 그 돈은 안 돼!"
능비령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빙글빙글 웃음을 참는 듯한 흑화고의 음성이 들려왔다.
"찾아주면 얼마 줄 거야?"
"뭐야? 그 소매치기를 잡을 수 있다는 거야? 정말이야? 좋아. 내 은자 주머니를 찾아주면 밥을 사주지."
"새 옷과 몸을 씻을 수 있는 잠자리도 포함시켜. 물론 앞으로 내 음식도 책임져야 하고."
"끄응, 알았어, 알았다고!"
능비령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화고의 장난기 어린 음성이 이어졌다.
"한데 그 소매치기 말이야, 잡으면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손을 잘라주고 올까?"
"그건 좀 심하잖아."
"그럼 남의 물건을 훔치지 못하게 눈을 뽑을까?"
능비령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됐네, 이 사람아! 그냥 돈만 다시 돌려받으라고."
능비령 주위의 공기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한줄기 미풍이 불어온 듯한 미미한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