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악연(惡緣)의 시작2.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먼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 음성들이었다.
"어이구! 머리야···!"
능비령은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시퍼런 하늘이었다. 너무나도 맑아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두 번째로 능비령의 눈 속으로 파고든 것은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물체였다.
"우악! 이게 뭐야."
능비령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좌우를 두리번거린 후에야 자신이 본 게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시꺼먼 턱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을 지닌 사내 한 명이 누워 있던 능비령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바람에 제일 먼저 수염만이 보인 것이다.
"어… 이제 깨어났군."
"거봐! 저 자식은 절대로 안 죽는다고 했잖아!"
"야! 비령!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누워 있던 능비령이 벌떡 일어나 턱수염이 얼굴을 덮다시피 한 사내를 괴물 보듯 바라보다 멍청해지자 여기저기에서 반가워하는 음성들이 터져 나왔다.
능비령은 그의 좌우에 눕거나 앉아 있는 사내들을 어리둥절해 둘러보았다. 그가 깨어난 곳은 비스듬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는 숲 언저리였다.
십여 채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던 사원은 완전히 폐허가 된 채 아직도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구층의 원탑 주위에는 수십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마치 탑을 포위하듯 둥그렇게 탑을 감싼 채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능비령의 주위에는 오십여 명의 용병들이 사원과는 다소 떨어진 숲 언덕에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전투가 이미 마무리 된 상황이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능비령은 이곳저곳에서 아는 체를 하며 말을 걸어오는 사내들을 무시한 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만… 그러니까… 난 분명히 사원의 불전에서 정신을 차렸다가 늙은이들과 함께 어떤 지하로 내려갔고, 그리고 어떤 귀신같은 여자를 본 것 같은데?'
능비령은 목덜미를 만지며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흠, 너무 자주 기절하는 것도 좋지 않은 모양이군. 아무래도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리가 안 되잖아!'
능비령은 결국 스스로 지금의 상황을 유추해 내는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 생각난 것이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능비령은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털보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털보사내가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하는 눈빛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봐야 되는 거 아냐? 그걸 우리에게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냐."
"글쎄… 그게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넌 저쪽 계곡에 쓰러져 있었어. 척후를 맡았던 삼십 명 중 살아남은 건 너뿐이야."
털보사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능비령과 함께 척후에 나섰던 동료들이 생각난 듯했다.
'내가 계곡에 쓰러져 있었다고?'
능비령의 눈빛이 다시 멍청해졌다.
"넌 삼 일 만에 깨어난 거야. 뭐, 죽을 만치 큰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영 깨어나질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능비령은 어쩐지 머리가 아파져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넓은 불전과 열두 명의 노승들, 끝없이 지하로 이어져 있는 나선형의 계단.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자세로 죽어 있다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
'설마… 꿈이었다는 건가? 그렇게 선명한 꿈도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꿈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자··· 꿈이면 어떻고 꿈이 아니면 무슨 상관이냐! 어쨌든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
좋은 게 좋다고 능비령은 더 이상 골머리를 썩이지 않기로 작정했다. 한번 모르는 일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결국 알 수 없는 법인 것이다.
"한데 저 친구들, 저 탑에서 도대체 뭘 하는 겁니까?"
능비령은 탑 주위를 완벽하게 둘러싼 채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도 대답은 털보사내의 몫이었다.
"글쎄, 본진에서 나온 일행이 저 탑 안에 들어간 후 다른 사람들은 일체 탑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지키고 있으니 뭔가 수상쩍긴 한데 그게 뭔지 우리가 알 게 뭔가."
능비령의 오른쪽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다른 용병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 엄청난 보물이 있는 게지. 그렇지 않다면야 이까짓 이름도 알 수 없는 사원을 공격하기 위해 이 많은 병력을 출동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긴···"
털보사내가 고개를 끄덕인 후 팔베개를 한 채 뒤로 벌렁 누었다. 정화군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태도였다.
정화군은 그 뒤로 열흘간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본진에서 나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원탑의 지하로 내려간 뒤 열흘 만에야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난 열흘 동안 탑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지하에 있는 모든 밀실들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소문에 의하면 원탑의 지하 계단을 따라 장장 열흘이나 내려갔어도 지하 계단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 * *
성조(成祖) 영락 삼년(永樂三年, 1405)부터 출사하기 시작하여 장장 이십칠 년 동안 이어진 정화군(鄭和軍)의 서역 출병은 결국 선종(宣宗) 선덕 칠년(宣德七年, 1432)에 이르러 최후의 정벌군이 귀환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성조(成祖)가 정화의 출병을 명한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었다.
첫째, 성조는 스스로 폐위시켜 버린 혜제(惠帝)가 죽지 않고 바다로 숨지 않았는 가 의심하여 정화의 병단을 파견해 찾아보도록 했으며, 그리고 둘째로는 골육상잔의 병란 끝에 스스로 제황의 보위에 오른 자신의 강함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정화군의 서역 출병에는 출병을 명한 황제의 의지와는 또 다른 힘(力)이 은밀히 개입되어 있었으니….
용병들은 본래 정화군 중군(中軍)에 속해 있었다. 사원을 공격했던 부대와 용병대가 중군에 합류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열흘이 흐른 뒤였다. 그들이 합류할 무렵 중군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회군(回軍)에 대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과연 삼 일 후에 회군 명령이 떨어졌다. 병사들과 용병들은 고향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들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숙영지(宿營地)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열대림 속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군막(軍幕) 위에 파르스름한 빛을 흘려내고 있는 여인의 눈썹 같은 잔월(殘月)이 떠올라 있었다.
능비령은 자신의 막사에서 잠들어 있었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잠을 잘 수 있는 대형 막사의 한구석이었다.
규율이 엄한 정규군과는 달리 용병들은 요즘 들어 회군의 분위기에 들떠 저녁마다 술잔치를 벌이곤 했는데 오늘도 예외 없이 모두들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능비령이 문득 잠에서 깨어난 것은 무언가 섬뜩한 감촉이 손에 느껴진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잠버릇이 고약한 능비령이었다.
아침마다 잠을 자기 시작했던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서 눈을 뜰 정도였다. 옆에서 함께 자고 있는 사람의 배 위에 다리를 올리는 것은 약과이고, 심지어는 남의 몸을 요로 삼아 깔고 자다가 굴러 떨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문에 동료들 중 어느 누구도 능비령의 옆에서는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
한데 오늘따라 누군가 그의 옆에 누워 있었다.
단순히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으로 잠에서 깨어날 능비령이 아니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몸이 너무 차갑기 때문이었다.
'뭐가 이렇게 차가운 거야?'
능비령은 자신도 모르게 옆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더듬으며 비몽사몽간에 상체를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놀랍게도 능비령의 옆에는 한 여인이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두 눈은 감겨져 있는 상태였고 두 손은 허리 옆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가슴의 기복이 전혀 없었고 몸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우아아악! 이게 뭐야?"
능비령은 기겁해서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정신없이 자다가 깨어보니 자신의 옆에 여자의 시체가 놓여 있다면 천하의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야?"
"어떤 자식이 잠 안 자고 이 밤중에 애를 때리는 거야?"
능비령의 비명 소리에 놀라 여기저기에서 용병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엉거주춤 앉아 있는 능비령을 향해 사나운 눈길을 돌렸다.
하나 그들의 눈은 능비령에게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능비령의 옆에 반듯하게 눕혀져 있는 여인의 시체를 본 것이었다.
"어? 여자 아냐?"
"여자라니? 이곳에 무슨 여자가 있다고… 으잉? 정말이잖아?"
어느새 같은 막사 내의 십여 명에 달하는 용병들이 모두 일어나 능비령 옆의 시체 앞으로 몰려들었다.
"여자는 여잔데… 죽은 여자구만."
"맙소사! 여자 시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여자 시체 앞에 모여든 용병들은 이 해괴한 광경에 모두들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능비령을 바라보았다.
능비령이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 거의 결사적인 표정이었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난 아니라니까! 자다 보니까 이 여자가 옆에 누워 있었다니까요! 정말이란 말입니다!"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능비령을 빤히 바라보던 용병들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용병들 중 누군가가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빨리 내다 버려! 정화군 친구들이 알게 되면 괜히 우리가 오해받게 돼."
난데없이 여인의 시체가 막사 안에서 발견된 것이 괴이쩍기는 했지만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할 용병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누군가 장난삼아 가져다 놓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