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그의 인기척에 일어난 그녀는 한쪽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그의 옷소매를 살짝 움켜쥐었다.
" .... 어디가냐니까... "
역시 그녀는 아직 잠을 제대로 깨지 못한걸까. 그녀는 잠길대로 잠겨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 ...알거 없어. "
그의 말투는 그녀에게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차가움이 아닌 전과 다른 느낌의 감정들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 .... "
전같으면 손을 뿌리치며 가려는 그를 보며 잡고 있던 손을 놓아줄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손을 놓기는 커녕 소매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세게 주었다.
" 오늘은 말해주면 안되는거야...? 나는 너의 파트너로서 알고 도와줄 수 있는거라면 도와주고 싶어..! 비록 저번에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건 정말 많이 반성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
그녀는 정말 가버릴 것같은 그를 보고 마음이 급해져 할 말을 정리하지도 않고 의식의 흐름대로, 감정의 흐름대로 마구 뱉어내다 결국 이어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고개를 숙이며 말 끝을 흐렸다.
그런 그는 갑자기 자신의 옷소매를 세게 움켜쥐며 곧 울것만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녀를 보고 살짝 당황하며 보간실 밖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 ...너도 사람 참 복잡하게 만든다... "
그리곤 머릿속이 복잡한 듯 그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뒤를 돌아 그녀의 머리를 살짝 헝클어뜨리는 쓰다듬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어 앉았다.
"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꼬맹아.. "
평소와 달리 너무 가깝게 마주 앉아버린 거리에서 아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세이렌은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 그렇게 알고 싶냐... "
나지막히 물어보는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 ..하아.. 별로 달가운 이야긴 아닐텐데 그래도 들을거냐. "
그는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가깝게 마주앉아있는 자신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 ...응, 궁금해.. "
그녀는 전보다 더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그를 보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뒤에 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 ...내가 너를 창고에 가둔 사람을 알아냈고 또 만나고 왔어. "
그녀는 그의 입에서 창고라는 단어가 나오자 움찔하며 좋지 않은 기억이 다시 떠오른 듯 표정에는 어두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는 평소 자신의 가족 모두에게, 그러니까 카렌에게도 애정이 많던 그녀가 큰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여 카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채 말을 이어갔다.
" 그리고 내가 그 때 판단력이 흐려져서 제안을 하나 받아들여버렸는데, 그게 내가 지금 고민하는 이유야. "
" ...제안..? 무슨 제안이었길래 고민까지..? "
그녀는 그의 말을,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 이번 중간점검에서 1등의 자리를 차지해낼 것. 그렇게 하면 더이상 너한테 손대지 않겠다 하더라. "
그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 ... 그래서 그렇게 여유가 없어보이고 그랬던거야.. ? "
그녀는 이제서야 그의 행동들에 대한 의문점이 퍼즐을 맞춰나가듯 풀려가며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물음에 그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거였으면 빨리 알려줬어야 할 거 아니야 바보야... "
그리고 그녀는 꽤 진지해진 분위기를 깨듯 배시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 .... 웃음이 나와...? "
그는 그런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그렇게 환히 웃어보이는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웃음에 기대어 안심하고 있었다.
" 그런 제안 쯤이야 우리가 전처럼 당당하게 해보이면 되는거잖아? "
어떨땐 이렇게 무작정 밝은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르는 너무도 밝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 꼬맹이 많이 컸네? 그런말도 할 줄 알고. "
아르는 세이렌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 그러려면 기숙사에서 씻고 교실에서 다시 만나는게 좋지 않을까 꼬맹아? 세수도 좀 하고. 진짜 못생겼다. "
" ....역시 싸가지는 변함이 없는거였어.. "
그런 그의 장난에 그녀는 그를 째려보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다시 돌아온 그를 보며 안도하고 있었다.
" 그럼 나 먼저 간다. "
그는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고는 다시 보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아니 지금 그의 웃음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따스했다. 죽을 때까지 한번 볼까말까한 미소였달까.
" 아, 으...응! "
그녀는 처음보는 그의 미소에 얼굴이 붉어지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싸움과 화해라는 벽을 멋있게 넘어보였다. 넘은 벽 앞에는 넘어야할 벽이 무수히도 많았지만, 왠지모르게 오늘만 같다면 어떤 벽도 다 넘어보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그럼 다시 서두르지말고 시작해볼까! "
수업을 알리는 수업종이 곳곳에 울려퍼지고, 다시 둘은 다른 파트너들처럼 연습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이좋게 연습을 하는건 정말 오랜만이기에 둘은 연습하는게 어색하다 느낄 정도였다.
" 연습 시작하기전에 너 마력은..."
그는 연습할 의욕이 너무나도 넘쳐보이는 그녀에게 차마 하기 미안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연습하기전 알아야할 사항이었기에 꽤 조심스레 물었다.
" 그럼 먼저 확인해볼까...? "
그녀는 전날과는 다른 불안한 느낌이 있었지만, 긴장한 것이라 대충 생각하며 표적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 오늘은 화 안낼테니까 쫄지말고 천천히 해봐 꼬맹아. "
그녀는 응원인 것 같으면서도 응원같지 않은 그의 응원을 들으며 숨을 한번 고르고는 표적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 세이렌 펠디아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
중간까지 잘해낸 마법 영창, 하지만 평소와 다른 무거운 느낌에 그녀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멈칫했지만, 이어 다시 주문을 외워냈다.
" 앞의 표적에게 해를 입히기를... "
하지만 무언가 자신을 감싸 꽈악 조여오는 듯한 느낌, 그리고 점점 자신의 의식이 어두운 그림자속으로 잠겨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점점 세지기 시작했다.
" ...왜 하다 말아.. 계속 해야지.... ? "
이어 그도 그녀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챈걸까. 꽤 멀찍히 서있던 그는 왠지모를 불안한 느낌에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때 1등의 자리까지 꿰찼던 그들이 그렇게까지 내려간 것을 본 옆의 아이들이 비웃는 듯한 눈치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 ..... "
" 야, 꼬맹아 장난치는거라면 여기까지만 하자. "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녀는 방금까지 의욕 넘치던 모습과는 다르게 생기없고 풀린 눈 그리고 웃음기가 싹 사라져 버린 무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는 처음보는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 ....없애고 싶어.. "
" ....뭐? "
그는 평소 그녀라면 말할 것 같지 않은 말에 잘못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다시 되물었다.
" ....사라져... "
그리고 이어 그녀는 그가 말릴 틈도 없이 반 아이들 쪽으로 몸을 틀어 손을 들어올렸다.
" .... 해를 입히길 원하노니. "
[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