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고르고 있던 유진의 감긴 눈꺼풀이 흔들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용기가 없기에 유진은 귀를 막고 감고 있는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저들에게 달려가 힘껏 매달리며 손가락이라도 깨물어 버릴까, 머리채라도 잡아볼까.
그러면 너에게 깨알만큼의 힘이라도 될까.
두려움 속에서 쓸데없는 용기가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유진은 의도적으로 막은 시, 청각에 일부러 더 자신을 숨기고 있고 싶었다.
“......”
질끈 눈을 감은 세상.
아득한 어둠 속으로 홀로이 내버려진 듯한 느낌에 유진의 오감이 쪼그라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이 괴로움이 낯설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을 헤쳐버리는 행위.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 스스로 체득한 것은 아니었다.
체화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제 자신을 감싸줄 수 있는 관용과 배포가 파도에 떠내려 가고 있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해일은 얕아진 물줄기가 되어버려서는 소심하게 모래사장에 입맞춤하고 힘 없이 뒤로 돌아서고 있었다.
비겁자가 되어도 상관 없었다.
자신을 놓아버리는 행위를 어린 소녀가 벌써 터득한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언니 오빠들. 세상 모든 사람들도 이런 경험이 있겠지, 라고.
나만 힘든 게 아니라고 자기위안을 수 없이 해봐도 이 순간만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조금 전 소란은 단지 무서웠던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공포였을 뿐이다.
단지 독이 오른 감정이 자신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
스윽.
생소한 감촉, 그리고 촉감.
껍질 동굴로 황급히 숨는 달팽이처럼 유진의 어깨가 웅크려졌다.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휘어 감는 손의 감촉이었다.
“나야.”
황재열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다리까지 후들거리며 떨렸다. 사력을 다해 귀를 막은 덕분인지 손까지 저릴 정도였다.
“......끝났어?”
“응.”
고마웠다.
분명 그는 나를 보호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온 것이다.
스스로를 말리려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열에게로 달려갔다.
눈을 감은 채로 그의 허리를 와락 감싸고 나니 단단하게 감겨져 오는 품.
그 생소한 경험에, 오히려 제 풀에 놀라 화들짝 눈을 뜨자마자 재열의 당황한 안색이 보였다.
“......풀어.”
“귀. 풀었는데?”
“네 손 말이야.”
“아, 미안.”
힘 없이 풀리는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아직 눈 감고 있어.”
난처한 듯이 흔들리는 재열의 눈이 보였다.
“왜?”
“그냥.”
저기 꼴사납게 누워있는 놈들을 보여주기 싫어, 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유진은 순진하게도 모르고 있었다.
“양 50마리 세고 눈 떠.”
그가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는다.
우스꽝스럽게도 황재열의 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기 보다는 자신을 이끄는 그 커다란 손에 온기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눈을 감은 유진의 감각에 눅진하게 눌러앉은 그 온기.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메마른 남자인줄로만 알았다.
엉겁결에 잡힌 손 때문인지 유진의 입가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실룩거렸다.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 건지 자신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
재열의 표정은 안 봐도 뻔할 뻔데기였다.
분명 냉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을 터였다.
이 좋은 날에 빙하기가 따로 없을 정도겠지.
유진은 그렇게 단언 짓고는 긴장한채로 양을 세기 시작했다.
*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50마리. 눈 떠도 돼?”
“떠도 돼.”
낮은 음성이 어두컴컴한 유진의 눈꺼풀을 자극했다.
파리한 안색의 유진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거리가 인접해 있는 인근 인도였다.
유진이 사는 곳과도 멀지가 않은 곳으로, 주변 곳곳에 가로등이 환히 비춰주고 있었기에 혼자서도 돌아가기엔 무리가 없었다.
재열이 아까 웃음을 보여주었던 것은 까마득하게 잊었는지 무신경하게 인도를 보며 눈짓했다.
“......이제 가라는 거야?”
가라는 거였다.
아쉬웠다.
희미한 달빛과 가로등, 아직 채 꺼지지 않은 간판의 불이 비추지 못한 곳에 재열의 잘 뻗은 긴 팔다리가 어둠을 등지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 또한 그대로였다.
유진의 시선이 마른 땅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발만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둘만이 남게 되자 마치 조금 전의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로, 이제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모습에 괜한 마음까지 생긴다.
“그래, 고마웠어. 나 갈게.”
체념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모셔다 줄 위인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는 이미 자신을 구해줬다. 그거면 충분했다.
어차피 이 곳에서 자신이 사는 곳까지는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을테니 굳이 데려다 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염치도 없었다.
더는 부탁하지 말자. 속으로 쉼호흡을 한 유진이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재열의 시선이 담담한 채로 돌아서려는 유진의 발목을 잡았다.
“다음부터는.”
“......”
“늦게 다니지 마.”
그것이 재열의 인사였다.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닌, 형식적인 인사치레도 아닌.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어찌 보면 느껴지는 대충 하는 그만의 걱정.
담담히 걷던 유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을 때였다.
“여기서 뭐하니.”
떠나는 유진을 묵묵히 보던 재열의 눈매가 그 음성의 진원지를 알아차리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걸려서는 안 되는 것을 들킨 마냥 놀란 눈빛이었다. 유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긴 용모가 한층 빛을 내어주는 여성.
나이가 쉽게 파악이 되질 않을 정도였다. 30대, 아니 20대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품격있는 음성과 손짓, 그리고 음성은 티비에서 보던 아나운서같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재열과 판박이인 듯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부 눈사람인가.
유진이 벙찐 듯 멈춰 서서는 심히 고민할 때 즈음이었다.
“......”
“그래, 이 친구는?”
유진이 머뭇거리며 재열을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대답할 때였다.
그보다 한발 앞서며 재열이 짤막하게 말했다.
“......친구에요.”
놀랍게도 재열의 냉담해 보이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주눅이 가득 든 표정을 내보이는 모습만이 보였다.
"친구......?"
친구, 라는 말을 들은 여성의 표정 또한 약간의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유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우리 친구 맞구나.
재열이 고갤 돌린 곳은 유진이었다.
“엄마야.”
살며시 베어 나오는 음성이 떨리고 있다고 느낀 건 유진의 착각일까.
“재열이 친구구나. 반가워요, 나는 재열이 엄마에요.”
“아, 안녕하세요.”
“그래요, 재열이가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여자라니.”
유진은 그 농담조의 말을 듣고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새벽 세 시를 달려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직 자신의 나이는 이 새벽을 활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마치 죄라도 지은 것마냥 마음 군데군데가 찔리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늦었으니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할까?”
“네.”
재열에게는 평소처럼 굴었던 딱딱한 음색이, 유진에게만큼은 달콤한 설탕처럼 흘러나왔다.
“이름이?”
“......하유진이에요.”
“그래. 유진이도 늦게 다니지 말고, 위험하니까.”
“네, 죄송합니다.”
“다음에 봐요.”
유진이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재열의 엄마인 정혜는 화려해 보이는 외모와 미소, 다정한 인사와는 다르게 유진이 멀리 보이지 않을 때 즈음이 되자 딱딱하게 고개를 돌려 재열을 이끌고 있었다.
***
네모꼴의 철문이 침입자를 반긴다는 듯이 제 자신을 순순히 열어주었다.
큼직한 구름 여러 개가 밤 하늘의 달빛을 받쳐주고 있었다.
널찍한 베란다에는 수수해 보이는 야경이 거리와 차가 달리는 도로들을 보여주었다.
간혹 선선한 공기가 넓은 창을 때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렸다.
“재열아.”
“......”
“안자고 있는 거 알아.”
“......네.”
정혜는 진주색 가운을 걸치고 고요를 잠식하고 있던 정적을 깨기 위해 손가락으로 따악,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놀랍게도 장형 스탠드가 입체적인 소리를 내며 단숨에 켜졌다.
인간의 시력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인체공학 스탠드가 적절하게 제 불빛을 뽐내고 있었다.
시야가 밝히자 왼쪽으로 재열이 누워있는 널찍한 침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자신의 앉은키에 알맞게끔 자동으로 높낮이가 조절되는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서재에는 놀랍도록 많은 책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위한 책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적은 분량이었다. 그 곳에는 온갖 알 수 없는 서적들이 넘쳐났다.
정혜는 침대 맡 옥석에 앉아 재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친구 말이야.”
“알아요.”
재열은 눈을 감은 채 짤막하게 대꾸하였다.
마치 무슨 말을 들을지에 대한 판단을 하고 제 스스로 말을 가로챈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오히려 정혜의 화를 돋구고야 말았다.
“안다는 녀석이!”
정혜가 꾸짖자 가만히 누워있던 재열의 입이 다시 한번 소심하게 벌어졌다.
“......죄송해요.”
눈을 질끈 감아버린 재열이 보였다.
“......알아들었으면 됐어. 잘 자라.”
정혜는 한숨을 내쉬며 재열에게서 더 반응이 없자 따악, 소리를 냈다. 불빛은 다시 꺼졌다.
턱.
잠깐의 침묵.
그 사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윽......으읍.”
입가를 비틀며 나오는 소리는 적어도 유쾌하지는 않은 듯 했다.
그 소리는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걸까, 아니면.
규격 50미리 밖의 방문에 기대어 서 무너지는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절규였을까.
‘너에게 이런 저주를 줘서 너무 미안하구나......’
‘누구를 원망할까.’
“......미안하구나, 엄마가 너무나......”
안타깝게도 두터운 방문은 방음이 철저히 대비되어 있었다. 모자는 서로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대화를 하지 못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