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조언의 흑막]
쉬고 있는 우리에게 아저씨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질문을 하였다.
“둘 다 베류나 씨의 공연은 볼 거지?”
“네, 이제 보러 가려고요.”
“끌려가야죠.....”
“그럼 오늘 내가 좋은 자리를 추천해주지.”
자신만만하게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표정을 짓는 아저씨.
하긴 어차피 지금 가도 우주의 점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희를 무대의 바로 앞에서 관람할 수 있게 해주마.”
“정말요, 아저씨!?”
“그래, 야외공연이라 방송장치가 무대 측면에 있거든.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을 거다.”
“우와아!!”
대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 거냐.....
뭐, 좋은 장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건 나도 꽤 괜찮은 조건 같고....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쪽은 이 아가씨한테 고맙다고 해. 이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서 해주는 거니까.”
“네, 네. 아샤, 잠시만 여기 있어.”
“어디가, 뮤트라?”
“잠시 화장실.”
나는 휴게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저기에 계속 있다간 ‘이 아가씨가 맘에 들어서, 이 아가씨가 착해서, 이 아가씨가 일 잘해서.’를 외치는 아저씨 때문에 못 견디겠다.
“음......뭐하다 돌아가지?”
“어, 다시 뵙네요.”
“우앗, 베, 베류나 씨?”
인기척을 느낄 시간도 없이 어느새 내 옆에는 베류나가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아, 잠시 생각 좀 하느라.....”
“음.....괜찮으시면 같이 얘기라도 하실래요?”
“네? 뭐....상관은 없지만요.”
“그럼 가요!”
느닷없이 얘기를 하자는 그녀.
그녀는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3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스테이지의 옥상이었고 나는 그곳을 보고 감탄사를 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때요? 꽤나 절경이죠?”
“그러네요. 꽤 아름다워요.”
아직은 해가 뜨고 있지만 서서히 저무는 시간이다.
그런 태양의 빛이 반사되어 바다에 아름다운 자태를 그렸고 그런 바다가 한 눈에 다 보일 정도로 높은 이곳은 그야말로 숨은 명소에 가까웠다.
“저도 여기 우연히 발견한 거 있죠?”
“이런 위험한 곳을 우연히요?”
야외 스테이지의 옥상이라 철근 몇 개에 몸을 지탱하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딘다면 그대로 지옥행이 될 정도로 높은 위치.
뭔가 스릴 속의 낭만과도 같았다.
“뭐, 어쩌다 보니까요.”
“아.....어쩌다....”
구라 같다.
심히 구라 같다. 여기가 어쩌다보니 알 수 있는 장소인가.....
베류나는 철근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런 그녀를 따라 철근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플라잉 마법이 있으니......
“이름이.....”
“아, 뮤트라입니다. 시베르토 케인 뮤트라.”
“시베르토님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으세요?”
“걱정이라뇨?”
“음....뭔가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지금 표정이 되게 근심 가득하신 것 같아요.”
“하하.....그런가요?”
아까 아저씨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걸 얘기하는 줄 알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우리가 보기엔 저 바다가 끝인 것 같지만 계속해서 나아가면 또 다른 도시가 있을 거고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겠죠?”
“네, 그러겠죠.”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만의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시베르토 씨의 고민과 그 사람들의 고민이 크고 작다, 뭐,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에요. 단지 고민을 ‘나 때문에‘라는 생각은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 때문에’요?”
“나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지고, 나만 없으면 된다. 그런 식의 생각은 자신을 더 괴롭고 아프게 만들 뿐이에요.”
“.........”
이 여자, 베류나라는 여자는 내 고민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고민, 내가 말하는 것조차 내 탓으로 돌려버리는 그런 고민들.....
“마치 경험담 같으시네요.”
“사실은 제가 그랬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제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마치 나만 이렇게 괴롭다고.....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맑게 웃으며 기뻐 보이는데.....이 세상의 불행이 모두 저한테만 닥친 기분이었죠.”
“어떻게......그걸 극복하셨어요.”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가는 건 모두 달라도 자기만의 아픔을 안고 가더라고요. 모두 안 그런 척 하면서 그 아픔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고 싶어 해요. 그리고 그걸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거고요.”
......어려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매우 성숙한 여성이었다.
친절하고 웃음이 베여있는 그 속에 이런 감성이 들어 있으리라곤 그 누가 생각을 해 보았겠는가.
“나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나도 그들과 같았을 뿐이라고.....그래서 전 힘내서 살기로 했어요. 평생 벗어나지 못할 아픔이 계속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발버둥이라도 치자라고 생각하면서요.”
“만약.....만약 발버둥을 칠 수 없게 되면......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 고통이 너무 아파오면.....”
“아까 옆에 계셨던 여성분이 계시잖아요. 혼자서 열심히 이겨내다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치면.....위로해달라고 하고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고 같이 해결해달라고 해요. 나 열심히 했으니 보듬어 달라고 해요.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요.”
“........감사....합니다.”
울 것만 같다.
아니, 울기 직전이다.
나이만 먹을 만큼 먹고 고작 이런 어린 애한테 내 마음을 들켜버렸다.
나로 인해 아샤의 미래가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뀐다거나 벨리이르와 신에 관련된 일. 그리고 지키지 못하고 내 손으로 처벌해버린 내 아내.....
“울어도 되요. 지금 이곳에는 시베르토 씨와 저, 그리고 넓게 퍼져있는 바다밖에 없으니까요.”
“.....네.”
나는 서서히 눈을 감기 시작하였고 눈물을 흘리었다.
소리 없이.....그저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내 아내, 사리엘 제나 베리네.
미안했어, 당신을 지키지 못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곧 6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공연이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추한 꼴만 보여드린 것 같네요.”
“아니에요, 저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다행이죠.”
베류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무엇도 간절히 바라면 이뤄지지 않는 게 없죠.”
순간 베류나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본래 이곳에 존재하면 안 되는 기운을 내뿜었다.
너무나도 불길하며 익숙했던 그 기운을.........
“......당신, 뭐야.”
“그러게요, 이제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오늘 스테이지, 기대해주세요.”
내가 붙잡을 시간도 없이 베류나는 계단을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베류나가 지었던 미소와 함께 느껴졌던 이상한 기운.
2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때를 다시 느끼게 만들었던 그 기운이었다.
“왜......왜 여기서 저런 기운을.....”
나는 철근의 위에서 무릎을 꿇고 양 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떨고 있었다.
“왜 하필 저 기운이야......왜 하필 다시 마주친 거냐고!!”
한참동안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아까까지 느껴졌던 베류나의 따뜻한 말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고 그녀의 모든 걸 부정하고 싶었다.
내 아내를 해친 것을 위로해준 그녀가 내 아내와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