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생(轉生)
이 문을 지나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단테 <신곡>, 지옥편에서
● ● ●
사신(死神) 벨테루크는 심심했다. 할 일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일이야 넘치고 넘쳤다. 지금도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그저 잠깐의 여유를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신들의 주업무는 수명이 다한 사람들의 영혼을 수거하는 일이었다. 죽은 자 혹은 죽을 자, 그것도 아니면 죽어야만 하는 자를 찾아 영혼의 끈을 끊는 일. 그것이었다.
딱히 그 일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이 지루할 따름이었다. 신이라고 해서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건 없다. 신들도 인간이 느끼는 감정 대부분을 느낀다. 다만, 각자의 업무에 따라 특정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좀 더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이 다를 뿐이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유일창조신이나 완벽한 신? 그런 건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벨테루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과 신―벨테루크가 아는 한에서의―의 차이는 고작 수명과 업무의 차이? 굳이 덧붙이자면, 강함의 차이 정도를 더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도 절대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때로는 인간들 중에서도 수련을 통해 신의 영역까지 넘보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 수명이 엄청나기도 하고 강함도 신에 필적한다. 그런 자들의 영혼은 사신들이 쉽게 회수하지 못할 정도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신들은 골머리를 앓고는 한다. 심한 경우 명계 전체에 비상이 걸릴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벨테루크는 예외였다. 그는 이 만년설과 같은 지루함을 없앨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런 사건이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수만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오늘도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겠지.’
벨테루크는 늘 그랬듯이 사신명부를 꺼내 들었다. 사신명부를 보자마자 하품이 나왔다. 정말 지겹기는 지겨운 모양이다. 그래도 사신으로서의 업무를 미룰 수는 없었다. 괜히 업무를 태만히 하다가 소멸을 당하면 그것만큼 어이가 없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하품을 크게 하면서 사신명부를 펼쳤다.
3789028376.
사신명부 맨 상단에 적힌 사신숫자. 오늘의 첫 번째 고객이다.
이전에 110차원계의 영혼을 회수했었으니, 이번에는 무조건 111차원계일 것이다. 그는 차원계 번호는 제쳐놓은 채 다시 한 번 번호를 확인했다.
3789028376.
벨테루크는 사신명부를 신공간(神空間)에 넣고는 사신전용 단말기를 꺼냈다.
삑삐빅-.
그의 가벼운 손놀림과 함께 주변 풍광이 순식간에 변했다. 명계(冥界)에서 111차원계로 순간이동을 한 것이었다. 벨테루크는 다시금 단말기를 조작해 3789028376번 영혼이 있는 곳을 검색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XX동 XX빌라.
그는 단말기가 가리키는 곳으로 날아갔다. 온갖 탐욕스러운 감정이 밀집된 강남구 내부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의 첫 고객이 사는 건물은 외관이 깔끔한 빌라였다.
“으하암-.”
벨테루크는 무료함에 감기려고 하는 눈을 사신낫으로 한 번 쿡 찌르고는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는 외부만큼이나 깨끗했다. 꽤 큰 빌라에 3789028376번 영혼의 주인 혼자 사는지, 다른 영혼의 움직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영혼의 파동이 느껴지는 빌라의 가장 위층인 5층으로 향했다.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니 3789028376번 영혼의 주인이라고 추정되는 자가 이상하게 생긴 의자에 앉아있었다.
또 저건가?
벨테루크는 저 사방이 밀봉된 검은색 의자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가상현실 게임 캡슐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인간들한테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차원계를 만들었다. 물론 진짜 차원계와는 구별되는 하위개념의 차원계였지만,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었다.
가상현실은 영혼이 직접 속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진(眞) 차원계에 속한 영혼들이 저 캡슐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비록 인간들 스스로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이 출입을 하고 있다는 걸 사신들은 잘 알고 있었다.
벨테루크는 캡슐의 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체격조건을 가진 지극히 평범한 남자가 가상현실 서버 접속용 모자를 쓴 채 누워 있었다.
벨테루크는 남자를 한 번 쓱 보고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낫을 높게 들어 3789028376번 영혼 주인의 목을 잘랐다. 피가 나거나 실제 육체의 목이 잘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신의 낫은 물질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끈만을 자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걸로 보이지만, 3789028376번 영혼의 육체는 이미 죽었다.
벨테루크의 눈에는 잘린 영혼의 끈이 가상현실 서버 접속용 모자 밖으로 튀어나와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보통이라면 저 끈에 영혼의 본체가 붙어 나왔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바로 3789028376번의 영혼이 지금 가상현실 속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신들이 접속을 해보지도 않고 영혼들이 가상현실 속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이유였다.
가상현실 게임은 사신들의 업무에 꽤 성가신 존재였다. 죽었으면 재깍재깍 나와서 데려갈 수 있어야 되는데…… 저렇게 연결된 채 죽은 인간들은 서버 내에서 아직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활개치고 다닌다. 사신들은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명계로 데리고 갈 영혼이 로그 오프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벨테루크 같은 괴짜 사신은 이것에 별로 불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남는 것이 시간이었고, 그 시간들은 전부 지루함이란 끔찍함과 연결되었으니까. 벨테루크는 저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조금 성가셨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고마웠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에게 주어진 무료하고 끝도 없이 긴 시간을 죽이게 해주니까 말이다.
벨테루크는 사신낫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훑어본다. 이건 3789028376번 영혼이 밖으로 나오길 기다리면서, 이 영혼이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 행동은 3789028376번 영혼에 어떤 흥미가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천만 년간 버릇처럼 해왔기 때문에 하는 것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방 안은 3789028376번 영혼 주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집기가 별로 없었다. 책상과 그 책상 위에 놓인 책꽂이. 그리고 거기에 꽂힌 책 몇 권과 침대. 또, 그 옆에 놓인 작은 쓰레기통, 마지막으로 3789028376번 영혼의 육체가 누워있는 가상현실 게임 캡슐이 전부였다. 모두 새로 산 것처럼 깨끗했고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결벽증.
3789028376번 영혼은 작은 티끌도 자신의 공간에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인 것 같았다. 벨테루크는 이런 자들을 여럿 봐왔지만, 이렇게 심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강박적 결벽증인가? 그게 아니면…….’
벨테루크의 투시안(透視眼)이 방을 넘어서 거실과 화장실까지 살폈다. 이 방과 마찬가지로 작은 티끌 하나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는 벨테루크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킁킁.
그의 감각을 자극한 건 눈이 아니라 코였다. 어디선가 익숙하고도 특이한 냄새를 맡았다. 아주 매캐하지만, 사신들의 코를 즐겁게 하는 독특한 향기. 바로 피 냄새와 시체가 썩는 냄새였다. 사신인 자신이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미약했다. 신경을 집중한 지금에서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냄새였다. 아마 이래서 빌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으리라.
벨테루크의 코가 벌렁거렸다. 냄새의 진원지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냄새는 아래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의 시선이 5층 바닥, 4층 바닥, 3층 바닥, 2층 바닥, 1층 바닥을 통과할 때까지 냄새의 근원은 발견하지 못했다. 벨테루크의 칠흑 같던 눈이 백안으로 변했다. 투시안을 최대로 끌어올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지하에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음!?’
그곳에도 시체는 없었다. 그의 시야가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런 비밀 공간을 세 개 더 지나고 나서야 냄새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이번 고객은 용의주도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크크.”
벨테루크가 낮게 툴툴거렸다. 이유는 3789028376번 영혼 주인이 사신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직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취미’는 사신들의 일과 아주 연관이 깊어 보였다.
지하 깊숙이 숨겨진 공동에는 수십 명인지 수백 명인지 얼핏 확인하기 어려운 인간들의 시신이 엄청나게 큰 냉동고 안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얼지 않은 싱싱한 시체가 있는 걸로 봐서는 3789028376번 영혼의 주인은 바로 며칠 전, 어쩌면 어제나 오늘도 취미생활을 즐긴 것이 분명했다.
111차원계의 이 지구라는 행성은 원래부터 다른 곳에 비해 좀 더 잔인한 행성이었다. 그나마 근래에 들어 조금은 사신들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본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인간들이 말하는 과학이라는 학문이 이리 발전하기 전에는 저런 장면을 이 행성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전쟁이 나면 저것보다 심한 일도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사신 벨테루크에게 이런 일은 별일이 아니었다. 그가 재미있어 하는 이유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시체에는 죽인 자의 영혼의 색과 살의가 묻어난다. 비록 그 시체가 이미 영혼이 빈 그릇일지라도 말이다.
저 지하 냉동고에 있는 시체들에서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살의 따위는 일체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순수함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순수한 살인광기. 이 정도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요즘처럼 인권이니 문명이니 하는 걸 강조하는, 이 111차원계에서는 더 이상 만나기 어려운 그런 감성을 가진 영혼이 바로 3789028376번 영혼이었다.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희귀했다. 벨테루크도 오랜만에 이런 영혼을 마주쳐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것이었다.
“피에 굶주린 순수 살인마. 이곳 지구 말로 하면 싸이코패스던가.”
그것이 111차원계 3789028376번 영혼에 대한 벨테루크의 평가였다. 저 정도면 제대로 정화되기 전에는 팔지옥에서 다시 나오기 어려울 정도 아닐까. 어쩌면 팔지옥에서 한 천만 년쯤 썩을 수도 있었다. 재수가 없다면 천만 년을 보내기 전에 영혼이 소멸할지도…….
물론 자신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거기까지 확인한 벨테루크는 3789028376번 영혼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3789028376번이 우주역사 최악의 살인마든 아니든 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의 일은 저 자의 영혼을 명계까지 데리고만 가면 끝이었다. 염라대왕이 저놈의 영혼을 걸레로 만들든 소멸을 시키든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벨테루크가 다시 무료함에 낫으로 눈을 긁을 그때였다.
삐비빅하는 사신 단말기의 청음이 울렸다. 경고음이었다. 영혼을 수거할 시간이 다 되었으니, 어서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벨테루크는 어차피 일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는 차원에서 사신명부를 꺼내 펼쳤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그는 하품을 하며 수거대상의 영혼번호를 확인했다.
3789028376.
일치했다.
“별 문제없군.”
하며 안심하던 그때.
“음!?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