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죽이면 그는 살인자다. 수백만 명을 죽이면 그는 정복자이다. 모든 사람을 죽이면 그는 신이다.
- 장 로스탕(Jean Rostand), 자전적 명상록
* * *
자살역병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양에 이런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 무명협객(無名俠客)이 나타나, 흑객들을 처단하고 있다!
흑객은 흑단 소속의 조직원들을 말한다. 일반 백성들은 흔히 그들을 다른 말로 취납(臭垃, 냄새나는 쓰레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자기들끼리 뒷골목의 협객이니 암수인(暗守人)이니 하는 말로 떠받들어봤자, 쓰레기는 쓰레기였다. 흑객들 왈, 불법은 우리 나름의 생존 법칙이다! 오뉴월 더위 먹은 개도 안 짖을 허울 좋은 쌍소리를 지껄이며 봉양의 뒷골목과 저자를 휘어잡고 있는 인간말종들. 그런 이들이 흑객이었다.
저자의 사람들은 생업을 이어가며,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흑단에 보호비라는 명목의 돈을 바치고 장사를 계속했다.
속으로 불만이 넘쳐흘러 금세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가난이 죄다. 약한 것이 죄다. 그럼에도 참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큰 죄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흑객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 한두 명이 죽었을 때는 그저 흑단들끼리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고 여겼었다.
그러던 것이 한 명이 두 명이 되고, 두 명이 네 명이 되고, 네 명이 여덟 명이,......
그러다가 결국.
봉양의 뒷골목을 주름 잡던 삼색흑단(三色黑團) 중 백호단(白虎團)과 적랑문(赤狼門)이 멸문했고, 이제 흑사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협객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협을 행하는 진정한 협객이라고 칭송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파만파(一波萬波)로 퍼져 나가, 자살역병 또한 무명협객이 없앴다는 풍문(風聞)까지 떠돌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느새 봉양성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협행들이 그의 업적이 되어 있었다.
이제 그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미 그는 봉양사람들의 마음속에 완벽한 협웅(俠雄)이 되어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아무도 그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몰랐고 그 그림자조차 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명협객이라 불렀다.
* * *
무명협객은 오늘도 협을 행하기 위해 밤거리를 나섰다.
그는 봉양의 마지막 남은 우범지역인 낙원촌(樂園村)으로 향했다. 낙원촌은 봉양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다 쓰러져가는 폐가들이 개미굴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다.
사실 말이 좋아 마을이지, 온갖 폐악의 온상이었고 실질적으로는 흑사회의 소굴 중 핵심적인 곳이었다.
이곳은 낮에도 흑사회의 흑객들이 아니면 잘 다니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곳인데, 하물며 지금과 같은 밤에야 더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마을 전체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착각일까. 숨이 막힐 듯 빽빽한 기류가 흐르는 것이 왠지 평소보다도 더 삭막해 보였다.
무명협객은 그런 음산한 낙원촌 안으로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읔!”
협행의 시작을 알리는 짧은 비명이 낙원촌 안에 울려 퍼졌다.
“왔다! 쳐! 쳐라! 죽여라!”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낙원촌 곳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일시에 나타나 소란을 피웠다.
바로 흑사회의 흑객들이었다. 그들은 무명협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무명협객이 나타났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무명협객을 죽여야만 했다.
“으아”
“죽여라!”
“이 개새끼! 뒈져!”
흑객들답게 갖은 욕설을 뱉으며 최초의 비명이 들린 곳을 향해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그곳에는 확실히 그들과는 다른 복색을 한 호리호리한 복면인 한 명이 있었다. 아마도 그가 무명협객이리라.
무명협객은 그들의 등장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듯,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흑객들을 향해 마주 뛰어들었다.
슥! 삭! 푹!
베고, 자르고, 찌르고. 간결한 동작 몇 번에 십여 명의 흑사회 흑객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누웠다. 달빛 아래 누운 시체들은 이내 차갑게 식어갔다.
무명협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려나가며 그 경로에 있는 모든 흑객들을 죽였다. 그의 뒤를 따라, 남은 수십의 흑객들이 검과 도, 창을 흔들며 따라붙었다.
“죽어라!”
푹.
제일 앞에서 그를 따라가던 키가 큰 사내가 무명협객의 등을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가볍게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 무명협객의 심장이라도 꿰뚫은 것일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그만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작 죽은 건 창을 찔렀던 자였다. 그의 눈에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끄으윽…….”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끝까지 내뱉어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입안을 깊숙이 박혀 든 검이 목젖을 갈라오고 있었으니까.
그는 저승에 가기 전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떻게 뒤통수에서 검이 튀어…….’
하지만 그는 생각 또한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목에 박혀있던 검이 그의 뇌까지 반으로 갈라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걸로 그는 생을 마감했다.
그의 동료들은 아직 조금 먼 거리에 있었기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그것이 그들의 패착이었다.
아마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상대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기묘한 변칙을 이용해 공격한다는 걸 알았을 텐데 말이다.
털퍼덕.
남은 흑객들은 시체가 되어 바닥으로 쓰러지는 키 큰 사내의 머리를 넘어 무명협객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소리만 크게 지르면 상대가 알아서 당해줄 것이라고 여긴 걸까. 그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면서 무명협객에게 쇄도해 들었다.
슥! 삭! 푹!
아까 무명협객의 검이 낸 소리와 똑같은 간결한 음이 장내에 울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것은 무명협객이 아닌 흑객들의 무기들이 만들어낸 소리라는 사실이었다.
“돼, 됐어! 우리가 무명협객을 잡았어!”
그들은 흥분했다. 손에 분명히 느낌이 있었고, 앞에는 누군가 복면을 쓴 자가 있었다. 그자의 몸에 흑객들이 휘두르고 찌른 무기들이 가득 박혀있었다.
복면인의 몸 밖으로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저 정도 출혈이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었다.
“주, 죽인 건가!?”
그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거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눈이 날카로운 한 명은 뭔가 다른 것을 발견했다.
“아, 아니야! 어, 어깨에 흑사회 표식이 있어!”
그에 나머지 흑객들도 복면남의 어깨를 주목했다.
확실히 복면남의 찢어진 소매 사이로 검은 뱀 문신이 보였다. 그것은 흑사회에 처음 입문할 때 새기는 입결문신(入結文身)이었다. 그렇다는 건!
“씨, 씨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흑객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 모두의 공동유언이 되었다.
사락.
반짝이는 검빛이 그들 모두의 목 사이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툭.
흑객들이 무명협객이라 생각했던 시체의 목 아래 부위에 갑자기 실금이 생기더니, 이내 실금 사이의 공간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결국 복면남의 머리가 목을 떠나 바닥으로 여행을 떠났다.
투두두두두둑,......
그와 동시에 흑객 모두의 머리 또한 똑같은 모습으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땅에 떨어진 그들은 너무 순간적으로 목이 잘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그들의 눈은 아직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또르르르르.
그들이 무명협객이라 생각했던 복면남의 머리가 그들 모두의 머리들이 있는 한 가운데로 굴러들어왔다.
땅에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복면남의 복면은 이미 벗겨져 있었다.
그 머리는 마치 그들 모두를 비웃듯 혀를 입 밖으로 빼꼼히 내민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흑객들은 머리가 잘린 상태에서도 복면남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 얼굴은 그들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낙원촌의 입구를 지키던 그들의 행두(行頭) 강해(江海)였고, 가장 처음에 비명을 지른 자였다.
어떻게…….
그들 모두는 그 의문을 마음속에 묻은 채 그 생을 마감했다.
무명협객은 머리들의 반상회를 주최한 뒤, 조용히 다음 목표를 향해 이동했다.
* * *
조평(曺平)은 흑사회의 선행두(先行頭)다. 그가 그믐달의 으슥한 빛을 받으며 어둠 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멀리서 끝이 없이 비명이 들려왔다. 부하들이 죽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시끌시끌했었는데, 이제는 그 빈도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만큼 부하들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방증이었다.
흑사회에 그와 함께 들어온 동팔이도, 나달도, 강해의 것도 저 안에 섞여 있으리라. 아마도 이제 행두 중에 살아남은 자는 그 혼자일 것이다.
무명협객이 오고 있다. 무명협객이 그들을 모두 죽이면서 이리로 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그는 아직 죽기 싫었다.
그저 남들 조금 삥 뜯고, 인신매매 몇 번 하고, 여자장사 술장사 조금 하고……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 좀 죽인 것이 다인데. 그걸로 목숨을 잃는다니.
불공평하다. 이렇게 불공평한 인과응보가 어디 있는가.
아직 세상에는 자신보다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수십 수백명을 죽인 놈들도 버젓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고작 이 정도 나쁜 짓 좀 했다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니.
세상은 불공평했다.
만만한 게 약자였다. 그런 놈들은 강하니까 무명협객이 가만히 놔두는 것이리라.
조평은 머릿속으로 끝도 없이 궤변을 늘어놓으며 무명협객 욕을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그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대부분의 악인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도망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조평은 곧 고개를 저었다.
도망? 도망가면 그것 또한 목숨을 잃은 것과 진배없었다. 이렇게까지 기반을 쌓아올리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흑객들을 데리고 낙원촌 최후의 거점을 끝까지 사수하리라 재차 다짐했다.
이곳은 앞뒤로 뚫린 길이 하나밖에 없는 곳이었다. 지형적인 특징 때문에 습격을 할 수도 없었고, 몰래 숨어들 수도 없었다. 뒷길은 흑사회의 회주 방포염의 장원인 낙원장(樂園莊)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즉, 이곳으로 오는 길목은 저 앞에 있는 골목 하나가 전부였다. 거기만 제대로 지킬 수 있다면 무명협객을 막을 수도, 더 나아가서는 잡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그때 그동안 울렸던 비명을 모두 합친 것만큼이나 크고 끔찍한 비명이 조평이 숨어있던 장소까지 들려왔다.
그걸 끝으로 단말마의 비명이 마침내 그쳤다.
이제 ‘그’가 올 것이다. 협이라는 이름으로 마음대로 흑객들을 학살하던 그, 무명살마(無名殺魔)가 이리로 올 것이다.
그래! 와라! 이 개자식아!
죽여주마!
어두운 데서 싸우는 건 흑단이 유리하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무명협객은 흑단들을 잡기 위해 어두운 밤을 선택한 것이겠지만, 흑객들은 어두운 데서 태어나서 어두운 곳에서 쭉 살아왔다.
아무리 무림고수라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 남은 이들은 조금 전에 죽은 떨거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수지만 모두 무림문파에서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백호단과 청랑문은 예기치 못한 습격에 무너진 것이다. 흑사회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마.
조평이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그때였다.
사람으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통로를 통해 날아 들어왔다.
그 순간!
쏴솨솨솨솩!
연어가 물살을 가르는 것 같은 파공음과 함께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갔다. 준비된 화살시위였다.
퍼버버버벅!
그림자는 그대로 벌집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본 조평은 그것이 무명협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휙.
그때 다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골목을 통해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며 그림자를 걸레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이번에도 진짜가 아닌, 죽은 시체였다.
‘화살이 떨어지길 바라고 있는 것이냐?’
조평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밤새 쏴도 다 못쓸 만큼 화살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이제 어쩔 거냐? 무명협객.’
그렇게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짓던 바로 그때!
“큭, 크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