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바로 저 ‘무림 온라인’이라는 홀로그램 글자였다.
즉, 그는, 동봉수는 ‘반인반캐’였다.
그에게는 스테이터스(Status, 상태) 창, 스킬(Skill, 기술) 창, 인벤토리(Inventory, 창고), 맵(Map, 지도) 등 무림 온라인에서 가능했던 모든 창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단,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창은 오류로 인해 ‘?’로 표시되고 있었고, 100% 제대로 작동하는 창은 인벤토리 창뿐이었다.
그는 아직 인벤토리 창을 제외하고는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건 앞으로 차차 알아갈 예정이었다. 그의 상태창에 Lv.1이라고 적힌 것처럼 그는 아직 레벨1의 노비스(Novice, 초심자)일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동봉수는 가만히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의 상처가 쑤셨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새끼줄을 풀었다. 그리고는 새끼줄에 묻은 미음을 쓸어 그릇에 다시 담았다.
여전히 뜨거워 손과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음 대부분이 다시 그릇 안에 담기자 그는 그릇을 들어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현대 지구의 개가 먹는 밥보다 못한 음식이었지만, 동봉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음식은 그저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맛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에게는 영양소가 균형 잡힌 식단이 가장 좋은 음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 미음은 가장 최악의 음식이었다.
미음에는 칼로리가 거의 없다. 이런 걸 먹고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그는 빠른 회복을 위해 따로 준비한 음식이 있었다.
“인벤토리.”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인벤토리 홀로그램이 떴다. 사실 이 인벤토리도 원래의 무림 온라인에 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본래의 인벤토리 창은 한 칸에 한 아이템이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칸제(制)가 아니라 공간제(空間制)였다. 지금의 인벤토리는 동봉수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안쪽 구석구석까지 살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인벤토리는 무척이나 넓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꽉 채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최소한 백 평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이것이 그가 알아낸 이 ‘게임’의 첫 번째 법칙이었다.
인벤토리 안에는 개미 수백 마리와 파리 유충, 즉 구더기 수십 마리와 이름 모를 벌레 수백 마리가 들어있었다.
그렇다. 그가 빠른 체력 회복을 위해 준비해둔 음식은 곤충이었다. 곤충은 부피를 적게 차지하면서도 단백질이 매우 높다.
이 까닭에 현대지구에서도 미래식량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같은 사료가 있다면 소나 돼지보다 몇 배나 많은 양의 곤충을 키울 수 있고, 그들의 영양소는 같은 부피의 소나 돼지보다 월등히 높다.
당연히 동봉수에게 있어서 곤충은 매우 훌륭한 음식이었다. 저부피 고단백. 곤충에 대한 설명은 그걸로 족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인벤토리 안에 든 곤충을 모두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한 움큼 쥐고 입에 털어 넣었다.
와그작. 기분 나쁜 소리가 마구간 안에 울려 퍼졌지만 그건 일반인의 기준이었지, 동봉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소리였다.
한동안 동봉수는 뇌 활동을 정지시키고 식사에 집중했다. 이 모든 것 또한, 지금 그가 있는 이 세상이 게임이지만, 또한 게임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게임 속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도, 배변 활동을 할 수도 없었고, 성기가 존재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깨어난 지난 이 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음과 곤충을 먹었고, 똥오줌을 쌌다. 아침에는 거르지 않고 발기도 했다.
“신무림 온라인.”
이는 동봉수가 이 ‘게임’에 붙인 이름이었다. 앞서 얘기했듯,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무림 온라인의 운영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무림 온라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빌겠습니다…….
즐기라는데, 그럼 즐겨주지.
그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동봉수는 현실세계에 전혀 미련이 없었다.
편안한 기계화문명, 화려한 물질문명, 회색빌딩숲, 초스피드 광랜 인터넷 세상. 그따위 것들 모두 그에게는 무의미했다.
그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취미생활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세상이 어디이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이 세상이 마음에 들었다.
맑은 공기에 어울리지 않게, 이곳은 무정세상일 것 같았으니까. 마칠과 몇몇 사람들, 그리고 가끔 보이는 무림인들의 움직임.
그 모든 것에서 그는 이 세상의 ‘비정함’과 ‘강자존(强者存)’에의 율법을 엿볼 수 있었다.
이곳이라면 자신의 취미생활을 마음껏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본성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자신과 같은 육식동물들이 저 밖 강호라는 이름이 붙여진 밀림 속을 마음껏 누비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곳을 ‘신무림 온라인’이라고 명명했다.
진정한 포식자들을 위한 게임. 신무림 온라인이라고.
동봉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갈비뼈가 덜커덕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최대한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구간에는 아직 숨은 곤충들이 많이 있을 터. 그 하나하나가 그의 회복을 돕는 데에 쓰일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모든 곤충의 씨가 마를 때까지 동봉수의 곤충 섭식은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
찍찍.
느린 동작으로 곤충을 잡는 그의 눈에 쥐들이 보였다. 쥐를 잡을 수만 있다면 좀 더 빨리 체력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는 날래게 도망가는 쥐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만약 쥐를 잡을 수 있다면 어쩌면 신무림 온라인의 새로운 법칙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실험 결과 곤충들은 아무리 많이 죽여도 경험치가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쥐 정도 크기의 설치류라면 경험치에 영향을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 무리였다. 그는 아직 쥐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인지한 순간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되지 않을 일에 쓸데없이 힘을 쓸 만큼 동봉수는 어리석지 않았다.
이제 그가 이 더러운 마구간 안에서 더 이상 할 일은 없었다. 그는 다시 모든 생각의 끈을 놓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 잘 먹고 잘 자면 몇 주 안에 체력을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으리라. 그때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신무림 온라인 탐문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마구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푸르륵거리는 말소리만이 조용히 깔리게 되었다.
* * *
신무림 온라인 제 1법칙 : 인벤토리는 칸제가 아니라 공간제다.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가 똑같은 백 평의 큐브모양이다.
* * *
몇 주 뒤, 동봉수는 체력을 거의 회복했다. 이제는 활동하는 데에 크게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아직 움직일 때마다 가슴 쪽이 조금 쑤시기는 했지만, 일상생활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칠이 올 시간에는 어김없이 새끼줄을 가슴에 감고 누워 있었다. 이는 아직 그가 바깥으로 나갈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언어, 생활습관, 지리, 문화 등 익힐 것이 너무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몸’이 아직 약하다는 것이었다. 현대지구의 동봉수는 각종 격투기와 각종 지식으로 무장된 그 세계의 강자였다.
하지만 이 몸의 주인이었던 소삼은 이 무림이라는 세계의 최하층민으로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육체 또한 보잘것없었다.
각종 노역으로 단련되었을 법도 하지만, 고생으로 인해 오히려 몸 곳곳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이곳, 단리세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 상태로 저 밖, 강호라는 세상으로 나갔다가는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동봉수는 불확실한 상황에 몸을 맡길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정 없이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세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내쳐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정도까지만 버텨야 한다. 시간을 끌되 쫓겨나지는 말아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아까 언급된 것들뿐만 아니라, 신무림 온라인 시스템에 대해서도 조금씩 파악해 나가야 한다. 아직은 몇 가지 알아낸 게 없었다.
알아낸 것들도 모두 인벤토리에 관계된 것이었다. 다른 창들은 여전히 ‘?’라는 갑옷으로 자신들을 숨기고 있었다. 아마 이것들은 레벨업이 됨에 따라 하나씩 그 옷들을 벗으리라.
하지만 꼭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인벤토리 이외에는 무용지물일 수도 있었다. 이 경우 그는 강해질 다른 방도를 구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