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르는 오랜만에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평소 카우치에 그 길쭉한 몸을 우겨넣다시피 누워서 결재를 하거나, 창틀에 걸터앉아 이대로 뛰어내릴까 고민하며 집사 알렉스가 대신 읽어주는 서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행태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를 곁에서 오래 보좌한 이들이라면 그의 이러한 행동에 감격에 겨운 눈물을 찍어내며 드디어 우리 공작님께서 제대로 일을 시작하시려나보다……! 하고 외쳤을 테지만 아쉽게도 집무실에는 공작 밖에 없었다.
그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손끝에서 빙빙 돌리던 펜을 고쳐 쥐며 책상에 놓인 서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으음, 짧게 침음을 삼킨 뒤 천천히 펜을 내려 서류 위에 동그라미를 친다.
그가 동그라미를 친 곳에는,
‘로지 카펜샤와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 하는 법.’
이라는 글자가 정자체로 큼직하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누가 정리했는지 몰라도 로지가 주로 출몰하는 (일 년의 반을 마물을 잡는데 할애하는 공작가답게 실제로 서류에 ‘출몰’이라고 적혀있다.) 장소와 시간대. 그녀가 잘 먹는 음식 같은 것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어떠한 집념까지 느껴지는 깨알같이 작고 빽빽한 글씨들로 한가득한 문서는 공작의 심복 보좌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이든 바밀러가 정리한 것이었다.
제이든은 국경의 분쟁 지역에서 공작이 구해 주고 거둬준 뒤로 그에게 엄청난 충성심을 보이는 자였다. 그래서 어느 날 공작이 흘러가는 말로 어떻게 해야 로지와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해 볼 수 있을지 얘기하자마자 며칠 뒤 저 종이뭉치를 만들어 온 것이었다.
물론 공작의 입꼬리가 아닌 척 올라간 것도 사실이었다.
요 근래 로지를 볼 때마다 자꾸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녀에게 부드럽게 얘기한다는 것이 결국 다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물론 일을 저질러 놓고 당황하면서 발뺌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더욱 놀리는 것도 있었다. 남아있는 기의 흐름이 이상하게 꺾인 것이 마법사 특유의 자국인데도 한사코 우연히 벌어졌다고 말하다 슬금슬금 이실직고를 하는 로지의 모습은 멍청해 보이는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계속 이런 식이다간 미움 받을지도 모르지.’
나름 속으로 걱정을 하던 그가 이번에 만날 때는 꼭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리하여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서류를 보겠다는 일념 하에, 그가 몇 년 만에 집무실 책상에 한 시간이 넘도록 앉아있게 된 것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종이뭉치를 들추며 중요 포인트에 밑줄을 그으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 하나에도 절도가 묻어나는 이는 바로 공작가의 총괄 집사인 알렉스였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 책상에 앉아있는 공작을 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봤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집사 인생 40년이 넘도록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그조차도 순간 당황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장면이었다.
그가 말 안 듣던 손자가 처음으로 자발적인 공부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 할아버지의 심정이 되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려는 찰나 그 묘한 분위기를 기민하게 눈치 챈 공작이 한 발 앞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 로지 카펜샤님이 공작님을 뵙고자 합니다. 어느 시간이 편하신지요.”
“내가 만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
공작의 되물음에 알렉스가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만나실 거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나야 뭐 언제든지 상관이 없으니 지금 당장 오라고 해도……. 아.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전해.”
그에 알렉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나가고 공작이 다시 한 번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어느새 ‘저녁 식사’라는 글자 위로 동그라미가 무수히 많이 그려져 있었다.
“뭐? 식사?”
에밀이 나갔다오는 동안 저번에 생각해낸, 소드마스터도 눈치 채지 못할 마법, 을 만드느라 방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로지가 새된 목소리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공작님께서 그때가 아니면 오늘은 많이 바쁘셔서 안 되신다고 하네요.”
실상은 하루 종일 시간이 되는 공작의 위엄을 조금이라도 더 살려주기 위해 알렉스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핑계였지만 그 둘이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식사라니, 면접관이랑 재 면접을 신청한 상태에서 둘이서 먹는 밥이라니. 나보고 먹다 체해서 죽으라는 건가.’
공작의 속을 알 길이 없는 로지의 생각이 자꾸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고민해도 지금은 을의 입장이니 갑의 명령에 따르는 수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기왕 다시 잡은 기회이니 제대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로지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에밀의 눈동자도 같이 반짝인 건 덤이었다.
“공작님과 둘이서만 식사…….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얼른 옷을 벗으세요!”
“뭐? 앗, 으악! 왜 이래 갑자기!”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에밀은 평소의 꽃 같던 모습을 집어치운, 한 마리 괴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로지는 두 손으로 원피스 자락을 부여잡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일평생 햇빛도 제대로 쬐지 않은 몸으론 건강한 십대 소녀를 이길 수 없었다.
“자. 이제 빨리 욕조로 들어가요.”
억지로 로지를 욕조로 밀어 넣은 뒤, 에밀이 밖으로 나가 하녀 두 명을 데려왔다.
“수잔, 한나. 지금 한가하면 나 좀 도와줘. 일단 넌 손톱을 맡고, 넌 등을, 난 지금 머리카락을,”
“잠깐만! 저기. 난 그냥 밥을 빙자한 면접을 보려는 것뿐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응? 너무 과하지 않아? 그리고 나 오늘 아침에 머리 감았어.”
에밀이 필사적으로 말을 걸었지만 이미 불타오른 세 명에게 그녀의 말이란 하나의 아름다운 멍멍일 뿐이었다. 그녀들은 단지 누군가를 꾸미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에밀의 머릿속을 스쳤을 때는 이미 목욕도 다 끝내고 등에 향유로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천재마법사지만 그 많은 후원비를 성실하게 연구에 전부 써버려 살롱 한 번 가본 적 없던 소시민 중의 소시민 에밀은 다 벗은 채로 그녀의 온몸을 주무르는 숙련된 손길에 그만 넋이 나가 얌전히 몸을 내맡겼다.
부끄러움은 한 순간이었다.
“후와……. 이게 정말 나야?”
이런 삼류 연애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직접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로지가 저절로 튀어나오는 감탄사에 속으로 중얼거리며 거울을 통해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귀족영애들이 어째서 미인이 많은지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역시, 돈과 권력이 최고구나.’
정말 장인의 손길로 물광을 낸 피부엔 눈 밑에 있던 만성 다크서클의 디귿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붙인 건지 원래보다 두 배는 길어지고 두꺼워진 속눈썹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말려있었고 그 위로 빛을 받아 오묘한 색을 내는 갈색의 아이섀도와 글리터가 꼼꼼하게 발려 존재감을 내뿜었다. 거기에 깔끔하게 다듬은 눈썹과 거의 새로 빚은 입술까지.
화장의 신을 만난 것 같은 변신을 시켜준 한나라는 하녀는 브러시를 손에 든 채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지는 한나의 두 손을 잡고 스승님, 이 못난 제자를 거둬주십시오! 라고 말하고픈 심정이 되었다.
발밑으로 내려오는 긴 원피스를 입고 허리 뒤로 커다란 장식이 달린 리본을 덧대고, 굵게 땋은 머리에 화려한 핀을 꽂으니 딴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로지가 거울 속의 그녀에게 누구세요? 라고 할 판이었다. 이 모든 준비를 끝내니 어느새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어 출발할 때였다.
심호흡을 한 번 깊게 들이 쉰 로지가 결연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로지는 공작가에 온 뒤로 혼자 먹기엔 멋쩍어서 한 번도 식당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식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구경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살펴보게 되었다. 양쪽 맞은편에 서로가 앉으면 과장 좀 보태서 얼굴이 면봉으로 보일 것 같이 긴 식탁은 짙은 남색바탕에 다리와 테두리에 금을 두른 모양새였다.
거기에 등받이가 기다란 금색 의자는 푸른색 쿠션이 두껍게 깔려 엉덩이가 배길 걱정을 덜어주고, 고개를 번쩍 들어야 끝이 보일 정도로 높은 창문과 금술이 달린 붉은 커튼. 그 위로 천장까지. 모든 게 전부 길고 높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기다란 공간에 길쭉한 공작이 가운데 홀로 앉아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을 찌르는 황금색의 향연에 눈알을 도륵, 굴리던 로지가 공작을 알아채곤 치맛자락을 잡아들며 인사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라.”
식사 자리이니 만큼, 그간 후원 귀족들을 상대하며 익힌 예법으로 인사하자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공작의 허락이 떨어졌다.
아니. 왜 이렇게 늦게 들라고 한 거야. 목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속으로 한껏 투덜거리며 시종이 빼주는 의자에 앉아 공작을 향해 고개를 돌린 로지가 깜짝 놀랐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게다가 얼굴도 이상하게 붉은 것이, 설마.
“공작님.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무리해서 저녁 식사를 하시려는 게 아닌지…….
로지가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공작이 몸이 좋지 않아서 짜증 지수라도 올라가 있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녀가 조심스럽게 하는 제안을 듣는 족족 퇴짜를 놓다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휑하니 식사를 마쳐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그렇게 되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할지 몰라!’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상상에 소름이 돋은 로지가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다시 공작을 바라보니 정말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붉은 것 같기도 해 그녀가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 흠, 흠. 나는, 저는 괜찮습니다.”
“아, 네에…….”
존댓말이 나오는 걸 보니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요. 완전 큰일 난 것 같은데요.
그녀의 떨떠름한 표정을 눈치 챘는지 공작이 서둘러 음식을 식탁에 놓게 했다. 그리고 나오는 음식들에 로지의 시선이 고정됐다. 평소에도 공작성에서 먹은 음식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기쁘게 했지만, 오늘은 공작님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라 그런지 그 모양새나 식재료의 질이 훨씬 좋았다. 체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인상 찌푸리던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는데 그건 이미 잊었는지 로지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행복해졌다.
식사를 시작하면서 둘 사이엔 급격히 말이 없어졌다. 로지는 공작성에 온 뒤로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행복에 눈을 떠 음식을 집느라 정신이 없었고, 카지르 공작은…….
그는 로지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가지를 입에 한껏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제 그녀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 같은, 옛날에 있었던 만남을 제외하면 그녀를 이리 가까이서, 그것도 오래,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공작성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화장을 한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숨 쉬는 것 외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녀의 앞에 선 자신은 어린 날의 그로 돌아가 버리는 것만 같다.
가지 다음에 호박을 먹는 로지의 모습을 보며 야채도 잘 먹는 구나, 라고 공작이 멍하니 생각할 때였다.
“공작님.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느새 로지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공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올곧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공작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표정을 갈무리했다. 긴장하여 그러한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한 로지가 심호흡을 했다.
“저를 기사단에 입단시키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려해 주세요.”
“기각.”
“윽……! 후우, 저는 실제로 굉장히 유능한 마법사입니다. 체력이 부족한 부분은 마법으로 충분히 차이를 메울 수도 있어요. 게다가 마법사는 팀원 전체를 살필 수 있는 인력이에요. 특히나 저처럼 마법적 성취가 높은 마법사는 여러모로 유용할 겁니다.”
로지가 잇새를 물었다. 아니, 도대체 나를 뽑지 않으면 어떤 마법사를 뽑겠다는 거야.
그녀의 꽉 쥔 주먹으로 시선이 내려간 공작의 눈동자가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기사가 되려는 이유가 있나? 마법사들의 그 높은 자존심으로 이렇게 재차 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걸로 아는데.”
“그건……. 어릴 적부터 꿈꿔온 일입니다.”
둘 사이에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선대가 식사시간만큼은 조용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에 맞춰 방음설비를 철저히 한 식당엔 바깥의 소리도 일절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로지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긴장감으로 일 분이 한 시간이라도 되는 것 마냥 느껴져 답답했다.
그때, 공작이 여전히 들고 있던 나이프를 접시 위로 놓았다. 챙, 하고 접시와 나이프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대귀족이 낼 법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보였던 공작이 돌연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그 대단한 마법으로 공작성을 반들반들 빛나게 만들도록 하지.”
“네! ……네?”
“자네가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 기사단 합격 여부가 결정될 걸세.”
“아니아니. 저기요. 공작님?”
“성실함과 민첩성, 체력을 종합적으로 볼 것이니 대충할 생각은 하지 말도록. 알렉스가 전담해서 꼼꼼하게 심사할 테니까.”
공작이 활짝 웃었다. 날카롭던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며 초승달을 그리는 모습에 로지가 상황도 잊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축하하네. 오늘부터 자네는 공작성에서 하녀로 일하게 될거야.”
그것이 싫다면 지금 그만두어도 좋아.
들리지 않은 마지막 말이 어쩐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로지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아니.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