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이 주가 지났다. 그간 로지가 보인 눈물겨운 노력은 일일이 열거하자면 하루 밤을 꼬박 지새워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공작의 얄미운, 전적으로 그녀의 눈에만, 행동에 대한 욕과 자신의 불행한, 이것도 물론 그녀의 눈에만, 신세에 대한 한탄이 반을 이룰 예정이었지만.
결과야 어찌됐든 그녀가 했던 시도들 중에 한 가지를 뽑아보자면 이랬다.
하루는 로지가 분주하게 내성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연병장을 발견한 뒤로 그녀는 틈만 나면 그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자존심은 또 강해서 혹시나 누군가에게 들킬 새라 인지방해마법을 발동시키고 그날도 아무도 모르게 기사들의 훈련 장면을 보러가는 길이었다.
복도 끝에 보인 공작의 모습만 아니었다면.
금실로 끝단이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 카펫이 끝도 없이 길게 깔려있는 복도 끄트머리에 서 있는 공작은 멀리서 봐도 특유의 분위기가 전해져왔다.
검술의 천재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듯이 평소에도 날이 선 명검처럼 기운을 갈무리한 그 모습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큰 키와 넓은 어깨가 아니더라도 공작을 매우 거대하고, 위압감 있게 보이도록 했다.
날 때부터 다이아에 금덩이를 입혀 입에 물고 태어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절로 다른 이들을 무릎 꿇리는 기백.
흥. 그런다고 내가 어디 무서워할 줄 알고?
로지가 애써 딱딱, 부딪히는 이를 앙 다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차피 남들 눈에 보이지도 않을 텐데 부러 턱을 높이 치켜들고 복도를 걷는다. 그러다 그녀의 머릿속을 아이디어 한 개가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엇. 아 그래. 어차피 공작님은 지금 나를 인지하지 못 할 테니까 이대로 공격인 듯 아닌 듯 공격같은 공격을 해서 공작님께서 당황하실 때 내가 짠! 하고 마법 풀고 나타나서 도와주면…….’
누군가가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만 있었다면 헛웃음을 한가득 담고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말렸을 게 분명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천재 마법사인 로지도 못하는 독심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적어도 공작가 내에는 없었다. 또한 로지는 철이 들 무렵부터 머리가 꽃밭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틈에 파묻혀, 그녀 스스로도 마법을 제외한 다른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꽃밭마냥 천진한 한 마리의 훌륭한 마법사로 자라났기 때문에 이 황당무계한 계획의 오류를 잡아내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멋지게 공작을 구해낸 그녀의 천재적인 모습과 그에 눈을 빛내며 그녀를 찬양하는 공작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길게 설명되었지만 사실 이 모든 건 찰나에 생긴 상상이었다.
물론, 실현되지 않을 헛된 망상이었지만.
로지가 손가락을 살짝 까닥였다. 그러자 화창하니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날씨만큼이나 고요한 복도의 공기가 일순 보랏빛을 띠며 술렁였다. 그와 동시에, 한 쪽에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창문이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잘게 떨리는 유리창을 따라 해가 뜨면서 성내 사용인들이 일일이 묶어놓은 두꺼운 커텐 자락이 나부꼈다. 유리창을 지지하던 나무격자가 떨림이 진해질수록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음?”
여느 때처럼 바지에 손을 꽂고 언뜻 보기엔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한량없이 걷고 있던 카지르는 오감을 민감하게 건드리는 이질적인 기운에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피부를 예민하게 찌르는 기운은 분명히…….
생각이 이어지려는 찰나, 점점 떨림을 키워가던 창문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챙! 팽팽하게 한계까지 당겨진 낚싯줄이 다발로 끊어지는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창의 바짝 날 선 부분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주위를 눈부시게 찔러댔다. 유리조각들이 위협적인 자태를 드러내며 사방에 있는 물체로 빠르게 쇄도했다.
로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공격하기 위해 짧은 시간 얼마나 고심했던가. 창문으로 향한 공작의 모래색 눈동자로 조각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녀가 나타날 타이밍은 이 순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챙-, 채챙!
분명 공작은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였건만 그에게로 날아들던 조각들이 그의 지척에 멈춰 서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타날 타이밍을 놓친 로지가 입만 헤 벌리고 서서 공작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유리조각들이 정지한 부분에서 파르스름한 빛을 내는 막이 펼쳐져 있었다.
뭐지, 나도 모르게 마법을 쓴 건가. 내가 어느새 무의식발현의 경지에 오른 것이었나!
로지의 동공만이 세차게 지진을 내며 당황스러움을 내비치던 그 때였다.
의문 섞인 목소리가 조용해진 공간을 가르고 그녀의 귀로 파고들었다.
“흐음, 이상하군. 이렇게 날씨가 맑은데 갑자기 창문이 깨지다니……. 예삿일은 아니야.”
공작이 나른하게 말꼬리를 늘이며 팔을 들었다. 그의 손목에 걸린 금색의 팔찌가 푸르게 빛났다. 팔찌가 우웅-하고 낮게 진동하자 푸른빛이 강해지며 허공에 떠있던 유리조각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펫 위로 수북하게 쌓인 조각을 그가 구두로 꾹꾹 즈려밟았다.
“그렇다면 이건 나를 향한 공격인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로지 카펜샤?”
‘흐, 흐억!’
갑작스러운 부름에 로지가 놀라 뒤로 펄쩍 뛰었다. 그녀가 지금껏 연병장을 보러 가기 위해 인지불가마법을 쓸 때마다 그녀를 알아보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연병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조차도.
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기에 그녀는 지금 공작의 부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애써 그냥 자신의 이름이 나온 거라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그러기엔 공작이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가 너무나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로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걸렸는데 계속 마법을 쓰고 있으면 오히려 더욱 의심을 받겠지……. 크흡. 공작님께서 피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왜 못했지? 바보스러운 일을 했어.’
마법을 푼 그녀는 최대한 죄인의 자세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물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지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입이 있다면 말을 해볼까? 왜, 거기서 투명마법 같은 걸 쓰고 있었는지. 그리고 창문을 깬 이유도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조각들을 가리켰다. 그 모습이 마치 ‘대답여하에 따라 너도 저 조각 꼴로 만들어주겠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아 로지가 흡, 하고 짧은 신음을 삼켰다.하지만 그녀도 정말 공작을 해치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저, 그녀의 머릿속이 그 순간 마법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꽃밭 같은 상태가 되었을 뿐이다.
“아니, 사실은 그게 공작님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
“나를 해친다는 생각을 했다고?”
“아,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간단한 마법 실험을 하려던 것 뿐인데 너무 힘을 준 나머지 그만 창문을 깨버려서……. 하지만 바로 공작님께 가는 유리조각들을 막으려고 했어요. 근데 제가 막기도 전에 이미 막아버리셔서 마법을 쓸 때를 놓친 겁니다.”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뱉은 로지가 호흡곤란으로 빨개진 얼굴을 하고선 밭은 숨을 골랐다. 여기서 잘못 말하면 이대로 우리 가족까지 저승길 직행할지도 몰라. 이제야 상황 파악을 조금 한 그녀가 안절부절 못하며 낑낑거렸다.
그 모습에 공작이 웃음을 참으며 차고 있던 팔찌를 내밀었다.
“그렇군. 난 또 기사로 뽑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나를 죽이려는 건가 했지. 죽이기엔 너무 환한 시간이다만.”
“…아, 아무렴요.”
“그건 그렇고 위험한데도 나를 구해주려 했다니 감동인데 앞으론 그럴 필요 없네. 공작쯤 되는 위치에 있으면서 아티펙트 하나 없겠나.”
“윽……. 아무렴 그렇죠.”
“어쨌든 의심 살 수 있으니 투명마법? 그런 비슷한 거는 하고 다니지 말게. 어차피 마법으로 모습을 숨긴대도 기를 읽을 수 있는 자라면 알아보기 마련이거든.”
그럼, 이 유리조각은 모두 자네가 치우기로 하고, 수고해.
공작이 여전히 망부석처럼 정지해있는 로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스쳐지나가며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는 공작이 어느새 점이 되어 사라질 즈음 결국 자신이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로지가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소드마스터는 마법사의 기를 읽을 수 있다는 거야? 아니, 주변에 소드마스터가 있어봤어야 알지!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고도 손가락이 남는 수인데 내가, 그들이, 내 마법을 간파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냔 말이야. ……두고 봐. 내가 반드시 그들도 읽어낼 수 없는 마법을 발명해내고야 말겠어. 이건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그렇게 그녀는 세상에 발표 된다면 또 한 번 학계를 뒤집을 지도 모를 마법을 발명하기로 다짐했다. 뭐, 그 마법이 언제 완성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이처럼 실행하기 전에는 성공률 백퍼센트 보장될 것 같지만 실행하고 나면 결국 꽝인 시도들을 거쳐 벌써 그녀가 공작성에 머무른 지도 이 주가 넘은 것이었다.
아무리 공작성이 크고, 그만큼 방도 많고, 그녀 한 사람 쯤 평생 묵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구조라지만 면접에서 장렬하게 떨어진 입장에서 그녀는 이렇게 성과 없이 놀고먹는 것이 매우 불편했다.
“하.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순 없어. 이제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야 동기들과 교수님께도 합격했다는 편지를 보내지.”
합격하는 대로 편지를 부치기로 한 만큼 아마 자신의 소식을 모두 궁금해 하고 있을 터였다. 편지와 그녀, 둘 중 하나도 제도로 가지 않는다면 교내에 이상한 소문이 퍼질 지도 몰랐다.
그녀가 불합격했다는 소문이 말이다. 물론 이상한 소문이 아니고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이겠지만.
로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붙였던 등을 떼고 에밀을 불렀다. 얼굴에 붙인 팩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에밀을 기다리자 곧이어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네에-.”
“부르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에밀은 그날의 피곤함은 전부 가신 듯 말끔한 얼굴이었다.
“혹시 공작님께선 지금 집무실에 계셔?”
“네. 공작님 뵈러 가시려구요?”
에밀의 물음에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로지가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에밀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끈을 등 뒤로 가지런하게 묶어주었다.
“응. 뵙고 싶다고 전해줘.”
틈새공략이 안 되면 정공법이다. 이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봐야지. 어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