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내 처지가 어쩌다가…….”
거울로 써도 무관할 것처럼 번쩍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철퍽, 대걸레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좌로 우로 움직일 때마다 대걸레도 같이 움직인다. 대걸레를 어찌나 성의 없이 짰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던 바닥에 물이 흥건히 고였다. 닦는 건지 어지르는 건지 헷갈리는 몸짓으로 설렁설렁 청소를 이어가던 여자가 돌연 막대 끝에 얼굴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기 좋은 분홍색 입술이 불만을 가득 담고 오물거렸다.
로지는 새삼 제 처지를 돌아보았다. 아니, 제국 유수의 황립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을 이런 식으로 부려먹어도 된단 말인가!
대걸레를 쥔 손에 힘이 실린다. 로지는 애꿎은 바닥만 퍽퍽 내려쳤다. 혹시 어디 한 군데라도 깨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내리쳤건만 때깔부터 ‘나 비싼 몸이오.’라고 외치는 바닥은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닥을 청소하던 -그것이 청소라고 할 수 있다면- 로지는 복도 창 너머로 보이는 해가 점심때를 알리자 굽혔던 허리를 폈다. 우드득. 젊은 여자의 몸에서 난 거라곤 생각할 수 없을 소리가 적막한 복도에 울렸다.
소리를 낸 당사자는 지루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던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정갈한 구두 소리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시간은 칼 같다니까. 땡땡이 칠 시간을 안 줘요.’
쯧, 하고 짧게 혀를 찬 그녀가 오른손의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히며 강하게 딱- 소리를 낸다.
“아르쿠페놈”
마법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함할 정도로 짧은 주문을 작게 읊조리자 온 바닥에 흥건하던 물이 일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부유한 채로 정지한 물방울에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반사되어 곳곳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그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동화 속에서나 나올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평범한 이가 보았다면 그 황홀한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몇날 며칠은 꿈에 나타날 현상을 만들어낸 이는 정작 아무 감상 없이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그녀의 손짓에 맞춰 물방울이 움직였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지자 로지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며 한 곳으로 모은 물을 다른 공간으로 날려 보냈다.
그와 동시에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가닥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하게 뒤로 넘긴 머리카락. 각이 잡힌 바짓단. 대리석 바닥처럼 거울로 써도 될 것처럼 반짝거리는 구두까지.
대충 보아도 깔끔. 까탈. 엄격을 온 몸에 두른 노년의 신사는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서 있는 로지에게 시선을 던진 그가 창문으로 다가갔다. 흰 장갑을 낀 채로 창틀을 쓱하고 쓸어본 뒤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일련의 과정을 숨도 안 쉬고 쳐다본 로지가 그의 고갯짓에 그제 서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노년의 신사, 유구한 역사를 가진 대 크라젠 공작가의 집사인 알렉스가 점심을 먹으러 가라는 말을 남겼다.
그와 동시에 뒤도 안 돌아보고 식당으로 달려가는 로지의 가슴 한 켠에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모두가 선망하는 크라젠 공작가에 취직한 지 한 달.
로지는 벌써 퇴직을 꿈꾸고 있었다.
공작가는 그 넓은 땅덩어리만큼 저택도 거대했다. 로지는 밭은 호흡을 내쉬며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건물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녀의 다리로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근무하던 건물에서 식당까지 이십분은 걸렸다. 왜 공작가의 하녀와 하인들은 모두 그렇게 날씬한지. 그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은 요즘이었다.
선선대 황제 시절은 왕성한 정복 전쟁을 통해 제국의 크기를 키우던 시기였다. 넓은 영토에 비해 기름진 땅이 부족했던 제국은 비옥한 토지와 평원을 가지고 있던 주변국들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의 크라젠 백작가를 이끌던 레브라토 크라젠 백작은 그 정복 전쟁을 연달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이었다.
예부터 걸출한 무장을 많이 배출했던 크라젠 백작가는 일련의 정복 전쟁을 통해 공작가로 승작되었다. 크라젠가는 제국으로 편입된 수많은 나라 중 특히 땅이 넓었던 남쪽의 헤샤 왕국을 승작 기념 봉토로 받으며 공작가지만 왕국이 부럽지 않은 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 현대의 크라젠 공작으로 이어지기까지, 공작가는 계속 능력 있는 기사를 배출했다. 선선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중앙정치에도 진출하며 정치, 경제, 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크라젠 공작가는 현 공작인 카지르 드 크라젠에 와서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레브라토 크라젠 공작을 뛰어넘는 불세출의 천재로 제도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아직도 간간히 일어나는 국경 지대의 분쟁을 효율적으로 종식시키는 그의 위용은 국경과 멀리 떨어진 제도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최연소 소드마스터. 그가 십 대일 때, 스승이었던 현자 오스카가 그에게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했다.
지덕체를 모두 갖췄는데 거기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까지 겸비했다면 모든 미혼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할 것이다.
특히나 현 황족에 황자가 없는 지금이라면 더욱 더.
아카데미를 다닐 때도 카지르 드 크라젠에 대한 소식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가 입었다는 옷. 그가 마셨다는 차. 그가 착용했다는 갑옷의 브랜드…….
크고 작은 국경의 분쟁이 주간 신문 1면에 실렸다면 그런 내용은 월간 가십지에 ‘크라젠 공작 특집! 그의 모든 매력을 낱낱이 알 수 있는 기회!’ 같은 문구와 함께 실렸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이름이 문제였을까.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도 없는 공작의 위용만 듣고 존경심을 가진 것부터가 문제였을 지도 몰랐다.
로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암울한 기운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접시에 가득 담아온 고기를 노려보며 그녀가 포크로 고기를 내리찍었다. 한 번에 대여섯 개를 꼬챙이 꿰듯 포크에 꿰어 입에 우겨넣으며 로지가 자신이 어째서 청소 하녀가 되어버린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가 학생 시절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공작 하나만 보고, 다른 조건 좋은 이름 난 곳들의 제안을 거부하며 이 변방으로 내려온 것이 어언 두 달이 다 되어갔다.
로지 카펜샤는 평민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제도와도, 크라젠 영지와도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아가는 소시민 중의 소시민이었다. 마을을 관리하는 영주는 큰 욕심 없이 영지를 운영했기에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불편한 점은 없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시골의 농가가 으레 그렇듯이 그녀 또한 마을 바깥세상이 어떤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저 새벽이면 농사일을 하고 이른 저녁에 잠드는 나날이었지만 그것이 지루하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살다가 나중에 또래의 마을 남자애와 결혼하지 않을까. 옆집 존은 열 살이나 먹고 아직도 콧물을 흘리고 다니던데 어른스러운 내가 좀 이해해 줘야지.’ 와 같은 상상을 하며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던 어린애였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평범한 꿈은 어떤 상단을 호위하던 마법사에 의해 깨졌다. 아니, 그 마법사는 작은 시골마을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그녀에게 새로운 시야를 선물해준 이였다. 로지는 그 날을 올챙이에게 개구리 뒷다리가 생긴 날이라고 평가했다. 곧 죽어도 용이나, 하다못해 미꾸라지로도 평가하지 못하는 소시민 근성은 여기서도 발휘되었다.
그 날은 한여름의 햇살이 후덥지근하게 살갗에 달라붙는 날이었다.
마법사는 그녀가 사는 마을 근처에 여관 사업을 하기 위해 사전답사를 나온 상단 소속이었다. 상단 호위를 목적으로 같이 내려왔지만 그는 도로 포장도 채 되지 않은 마을 사정에 꽤 짜증이 난 상태였다. 마을 주민들은 생전 처음 본 마법사의 존재가 신기해 하루가 멀다고 그를 찾아왔다. 졸지에 박람회에 박제된 신기한 동물 수준이 되어버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마법사가 자리를 박차고 마을 중앙으로 나왔을 때.
맞아버린 것이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물 폭탄을.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그 날은 너무나 무더운 날이었고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은 물놀이라도 하지 않으면 더위에 쪄죽을 지도 몰랐다. 당시엔 마력으로 돌아가는 선풍기가 보급되던 시기였지만 그건 마력석이 뭔지도 모르는 작은 시골 마을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때 고작 열 살이었던 로지 또한 마을 아이들과 저수지에서 퍼온 물을 가죽 주머니에 가득 담아 던지며 놀고 있었다. 피하는 것도 스릴 넘치고, 못 피해도 시원하게 옷을 적시는 물폭탄은 여름날 가지고 놀기에 제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날의 마법사는 생각이 달랐던 듯 싶다.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제도 출신 마법사들은 모두 지독한 깍쟁이 들이지.’
햇볕 아래서 뛰놀며 살을 태우는 것을 가장 최악으로 여기는 샌님들. 거기에 속했던 마법사는 불같이 화내며 자기 옷을 적신 물을 다시 털어 모아 날아온 방향으로 던졌고 그 끝에는 로지가 있었다.
아직 어렸던 그녀는 마법의 힘으로 날아오는 물 폭탄을 피할 재간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주변에서 작게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으며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맞는다! 라고 생각하며 이를 악 다물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웅성거림은 전보다 더 커졌다. 감탄과도 같은 비명소리에 로지가 의아해하며 눈을 뜨자 보인 건
얇지만 넓게 펼쳐진 물의 장막이었다.
벌써 십 년 전의 일이지만 로지는 아직도 그 날이 생생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던 바람결과 그 속에 섞인 물기 어린 푸릇한 풀의 냄새까지 모든 것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진 물의 커튼이 가장 선명했다. 습기를 머금은 더운 바람이 불 때마다 장막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에 따라 햇빛이 반사되는 각도가 달라지며 무지개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생생한 이질적인 감각에 로지가 더럭 겁이 날 무렵, 당황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어떻게……!”
마법사가 저러다 눈알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핏대까지 선 목울대를 타고 새된 비명이 나왔다.
그 길로 그녀는 마법사의 손을 잡고 부모님 앞으로 갔다. 로지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이 하나도 없고 속도 울렁거렸다. 마법사와 그녀의 부모님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뒷마당에 쪼그려 앉아 속을 게워냈다. 부모님과 마법사의 대화는 밤이 늦도록 계속 되었고 무슨 소식을 들은 건지 그 사이에 마을 어른들이 그녀의 집 문턱을 드나들었다.
어른인 체 했지만 고작 열 살이었던 로지는 계속 되는 두통과 메스꺼움에 저가 죽을병에 걸린 줄 알고 울어재꼈고 다다음날 마법사의 손을 잡고 제도에 올라올 때까지도 제가 병에 걸려 치료를 받으러 가는 줄 알았다.
그 뒤로 마법사의 밑에서 조수 생활을 하다가 어느 귀족의 후원을 받아 중등학교에 입학하고 아카데미에 진학하면서 그 두통과 메스꺼움은 갑자기 열린 기감과 마력 사용에 대한 후유증이었단 걸 알게 되었지만.
로지는 물 속성 마법에 관해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비록 그 외의 마법에 대해서는 평균을 간신히 유지하고 교양 과목은 평균조차 안 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물 마법에 대한 그녀의 재능은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할 정도로 대단했다.
난다긴다하는 이들이 모두 모인다는 제도, 그것도 황립 아카데미에서조차 두각을 드러냈다. 팔방미인은 아니지만 잘 하는 한 가지에 대해선 그녀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이다 보니 그녀를 찬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의 콧대는 나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카데미 졸업과 동시에 다른 조건 좋은 상단과 귀족 가문의 제안을 모두 뿌리치고 몸 하나에 추천장 한 장만 달랑 가지고 크라젠 공작가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