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리에 시작했던 발리 볼 경기는 기어이 태성의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친 태성은 녹초가 되버린 다른 이들을 놔둔 채 홀로 야자수 그늘로 걸어가 그대로 뻗어버렸고 문득 그런 태성의 옆으로 슬며시 다가온 유리가 나지막히 태성에게 입을 열었다.
"이봐요.그냥 누워버리면 어떡해요? 저한테 수영하는 걸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음? 아, 맞아.그랬었지 참.하도 지쳐서 깜빡 잊고 있었어."
태연하게 대꾸하는 태성에게 유리는 자신의 한쪽 팔을 붙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태평한 건지 아니면 뻔뻔한건지 모르겠네요.얼른 일어나요.다른 사람들도 지친 이때가 뭘 가르쳐주기엔 가장 딱이라고요."
"흠..근데 그렇게 따지면 너도 엄청 지칠텐데? 일단 숨 좀 돌리고 나서 하면 안되냐?"
짐짓 고개를 돌려 되묻는 태성에게 유리는 단번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당연히..안되죠.어차피 발리 볼을 한 것도 잠깐 몸 풀려고 한것 아니었나요? 자외선이 좀 따갑긴 하지만서도…."
"쳇.누가 부반장 아니랄까봐 되게 철저하네.뭐 좋아.그럼 일단 실력이 어느정도인지부터 좀 확인해볼까?"
마지못해 자리를 딛고 일어선 태성은 이내 그늘을 벗어나 바다로 첨벙첨벙 걸어들어갔다.
"자, 이젠 니 차례야.겁먹지말고 조금씩 들어와봐."
"아..알았어요.이까짓 파도쯤이야 아무렇지도..꺗!"
순간 조심스레 바닷물을 헤치고 나아가던 유리가 뒤로 홱 자빠졌다.
아무래도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모양이었고 곧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태성의 얼굴에까지 시원하게 물이 튀어올랐다.
"으이구..내가 못 살아.얼른 일어나.어떻게 하면 물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뒤로 자빠지냐?"
"켁켁..시..시끄러워요! 발이 좀 미끄러진 것 뿐이라구요!"
"아, 뭐 그러시겠지.아무튼 신고식은 제대로 치뤘으니 진짜로 시작해보자고."
심드렁히 대꾸하는 태성에게 유리는 힘껏 원망의 눈빛을 쏘아보냈다.
태성은 유리의 날카로운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채 곧장 기초적인 동작부터 보여주기 시작했고 곧 자신이 보여준대로 똑같이 따라해보라며 유리에게 지시했다.
"굳이 완벽하진 않아도 되니까 우선 물 속에서 최대한 중심을 잡는 것부터 해봐."
"훗.그쯤이야 간단하죠.암만 제가 맥주병이라도 그런 기초적인 것부터 실수할리가 없잖아요?"
"말은 잘하네..얼른 안하면 강제로 물 속에 쑤셔넣어버린다?"
슬쩍 위협하는 태성의 말에 유리는 곧바로 쥐고있던 태성의 손을 놓았다.
- 첨벙첨벙첨벙! 뿌그르륵..
예상은 했지만 결과는 꽤나 처참했다.
태성의 손을 놓은 지 불과 5초도 채 되지않아 유리는 물장구치는 채로 물속에 가라앉아버렸고 이에 한숨을 푹 내쉰 태성이 즉시 유리를 붙잡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푸하! 어..어떤가요?! 나름 중심은 확실히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잡기는 개뿔이..니가 무슨 잠수함이냐? 중심잡고 수직으로 가라앉아버리게."
"쳇..그야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잖아요! 어디 두고 보라구요!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성공해보일테니까!"
호언장담한 유리는 나름 오기가 생겼는지 또다시 태성의 손을 뿌리치고 중심잡기를 실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마의 5초(?)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또다시 잠수함이 되버렸고 연이은 수차례의 시도에도 전혀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어째서에요! 하라는대로 동작은 정확히 했는데 대체 왜?!"
"하아..이거 참 골때리네.동작만 똑바로 해서 물에 다 뜨면 왜 맥주병이란 말이 있겠냐?"
"그..그럼 저더러 뭘 어쩌란 말이에요?! 당신이 알려준 동작이 잘못된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대로 따라한 제가 이렇게 가라앉을리는..!"
앙칼지게 반박하는 유리를 태성은 한심하단 눈으로 지그시 노려보았다.
"내 참..아무래도 안되겠다.넌 일단 손 붙잡고 연습해야겠어.뭐만 하면 가라앉아버리니 이게 인간인지 핵잠수함인지…."
"그..그런 모욕적인 발언 집어치워요! 그리고 소..손을 붙잡고 한다니! 괜히 엉큼한 짓이라도 할 작정이에요?!"
"내가 미쳤냐? 너한테 응큼한 짓을 하느니 차라리 나현이한테 아이스께끼를 하지."
"..설마 진짜로 나현 양 치마를 들춘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아, 시끄럽고 얼른 붙잡기나 하라고.또 가라앉으면 그냥 냅둬버릴꺼야!"
짜증섞인 어조로 일갈한 태성은 이내 유리의 두 손을 덥썩 붙잡았다.
잠시 얼굴이 확 붉어진 유리는 별수없이 태성의 손을 붙잡고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고 그나마 다행히도 조금씩 그녀의 몸이 물에 뜨고 중심도 조금씩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래그래.그런 식으로 계속 저항을 줘가면서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하는거야.간간히 숨쉬는 것도 잊지말고."
"그..그런 것쯤이야 안다고요! 집중안되니까 일일이 훈계하지 좀 마요!"
"참나..가르쳐줘도 뭐라그러네.확 손 놔버린다?"
"무..무책임한 소리하지 말아요! 또 잠수함처럼 되긴 싫다구요!"
"오.본인이 잠수함이란걸 그래도 인지는 하고 있었네?"
"시끄러워요!"
약간의 사소한 언쟁이 오고갔지만 나름대로 둘의 분위기는 조금씩 무르익고 있었다.
처음엔 영 불편하고 짜증만 났던 유리도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문득 한참을 그렇게 교습을 이어가던 두 사람을 나현이 손을 흔들며 부르기 시작했다.
"태성 오빠! 유리 언니! 명희 언니가 수박 쪼갰다고 먹으러 오래요!"
"음? 수박? 대체 그런 건 또 어디서 구해온거야?"
"글쎄요? 담임선생님께서 준비해오신 거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곳에서 수박같은걸 먹을리가…."
잠시 고개를 갸웃대던 태성은 이내 마찬가지로 의아해하던 유리를 힐끔 돌아보았다.
이젠 제법 물에 적응했는지 유리는 태성의 손을 놓고도 둥실둥실 잘 뜨고 있었다.
"잠깐 쉴겸 수박 먹으러 갈까? 계속 물속에 있으면 나중에 감기 걸리기도 쉽고."
"음..아뇨.드실꺼라면 혼자서 드시고 오세요.이제야 감이 잡히는데 확실하게 수영할수 있을 정도로 계속하겠어요."
어딘지 의지로 가득찬 유리의 대꾸에 태성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현 상태로 봐선 자신이 굳이 붙잡아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해내갈 정도였고 장소가 연안인지라 큰 파도가 치지 않는 한 멀리 쓸려갈 위험도 없었다.
"뭐, 그럼 알아서 잘해보라고.난 잠깐 먹고 올테니까 그쪽도 적당히 연습하고 남은 시간은 좀 쉬라고."
"흥.굳이 걱정해주지 않아도 이젠 충분해요.이제 곧 제가 우아하게 물살을 가르는걸 느긋히 구경하게 될꺼에요."
"참나..괜히 또 잠수나 하지마라."
핀잔을 내뱉은 태성은 이내 첨벙거리며 물을 가르고 해변가로 걸어나갔다.
태성이 멀어지자 유리는 짐짓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연습에 전념했고 태성의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제법 그럴싸한 접영이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늘어나갔다.
'후훗.역시 나 정도 되는 사람은 학습속도가 다르다니까? 똑똑히 지켜보라고요 임태성! 당신의 도움없이도 얼마든지 전 잘 해낼수 있으니까!'
짐짓 속으로 중얼대던 유리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후훗거리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한참 수영에 몰두했던 탓인지 그녀는 어느새 해변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와있었고 이에 짐짓 불안해진 유리는 잠시 숨을 돌릴 겸 해변가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 지릿.
찰나의 순간 막 해변가로 나아가려던 유리의 오른다리가 저릿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통증에 유리는 곧바로 오른다리를 움켜쥐었고 이내 저럿거리는 통증은 오른다리 전체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어..어째서 이럴 때 쥐가..?!'
난데없는 돌발 상황에 유리는 곧바로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황인데다 하필이면 제법 먼 바다에 나와있던 터라 지면에 발이 닿지도 않았다.
만약 닿는다고 한들 파도가 꽤 거세진 탓에 아직 미숙한 그녀의 수영 실력으로는 전혀 나아가지 못할 처지였다.
"어푸어푸! 아..안돼! 몸이 말을 안 들어!"
순식간에 허우적대기 시작한 유리는 빠른 속도로 물 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뒤로 쓸려온 큰 파도가 그녀를 위에서부터 덮쳤고 그 탓에 유리는 완전히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이건 말도 안돼! 어째서..어째서 이제 막 좋아지기 시작했는데..태성 씨한테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수 있었는데..!'
뒤늦게 속으로 후회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최후의 발악으로 열심히 손과 발을 움직여보았지만 전혀 올라간다는 느낌이 없었고 도리어 더욱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절망적인 느낌만이 온몸에 가득 전해져왔다.
'수..숨이..안돼..이런데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참다못해 숨을 내뱉은 유리의 입속으로 금세 물거품과 함께 대량의 바닷물이 들어갔다.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서서히 해수면과 멀어졌고 이내 그녀의 두 눈이 서서히 가려지기 시작했다.
- 첨벙!
막 의식을 잃기 일보직전 뭔가가 물을 가르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몽롱한 상태이던 유리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점 하나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걸 보았고 곧 그녀가 완전히 눈을 감기 직전에 굵직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받쳐들었다.
'하여튼 이 핵잠수함만도 못한 게….'
퉁명스럽게 속으로 중얼거린 이는 다름아닌 두 눈을 부릅 뜬 임태성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