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성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두 눈은 모두 어둠으로 둘러싸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구우웅하는 소리가 그의 주변에 계속 울리고 있었다.
"우와! 태성 오빠! 옆에 좀 봐요! 우리 지금 구름 위를 날고 있다구요!"
난데없이 들려온 흥분에 찬 목소리를 태성은 애써 무시하였다.
기왕에 누리고 있는 평온을 쓸데없는 이유로 깨뜨리고 싶진 않았고 딱히 흥미가 생기지도 않았다.
"태성 오빠! 아이 참! 계속 잠만 자지 말고 옆에 좀 보라니깐요?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풍경이라구요!"
또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태성은 단숨에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아직 그의 평온을 깨기엔 많이 부족하였고 이내 고개를 돌리려는 태성의 상체를 누군가가 거칠게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으어어어..뭐여 시벌.대공미사일이라도 쳐맞았냐?"
"우씨!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안대나 벗고 나서 그런 얘길하라구요 좀!"
단숨에 이어지는 대답 소리에 태성은 그제서야 시야를 가리고있던 수면 안대를 들어올렸다.
안대를 들어올리기가 무섭게 시야가 확 밝아지며 보라색의 시트의자 뒤편이 눈에 들어왔고 뒤이어 왠지 볼을 부풀리고있는 나현의 얼굴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기왕 놀러나왔는데 그렇게 계속 잠만 잘꺼에요? 옆의 창문 좀 보고 그러라구요.경치가 얼마나 기가 막힌데!"
"끙..있어봤자 구름 밖에 더 있겠냐? 간만에 제대로 숙면 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우으..잠은 나중에라도 잘수있잖아요! 하다못해 저랑 얘기도 좀 나누고 과자도 먹고 그러면 어디가 덧나요?"
"미안하지만 난 나중이 아니라 지금을 소중히 여기는 주의라서 말이지."
심드렁히 대꾸한 태성은 다시금 안대를 눌러쓰고 숙면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학교에서 편히 청하지 못한 숙면을 조금이라도 누릴 절호의 기회였고 곧 태성이 다시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느닷없이 그의 시야가 다시금 확 밝아졌다.
"야, 반장.나현이 말 틀린 것도 아닌데 너무 매정한거 아니냐? 쳐 자지말고 나랑도 좀 놀아주고 그래라."
단숨에 밝아진 시야에 태성은 곧장 인상을 쓰며 다시금 눈을 떴다.
어느새 낚아채간건지 앞좌석에 앉아있던 명희가 태성의 안대를 들고있었고 이에 태성은 지그시 명희의 얼굴을 노려보며 단숨에 입을 열었다.
"하..나현이도 귀찮은데 왜 너까지 난리야? 대체 비행기 처음 탄게 뭐가 대수라고 쌍으로 지랄을…."
"엄청 쩌는 거거든? 너야말로 교실에서 맨날 잠만 퍼자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졸리냐?"
"졸린 게 졸린거지.이유가 필요하냐? 괜히 육갑떨지 말고 안대나 내놔!"
"싫은데~ 안 자고 놀아준다고 해주면 돌려주지.키히힛."
짓궃게 대꾸하는 명희에게 태성은 이를 부득 갈았다가 이내 체념한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나현이 창문을 양손으로 짚은 채 흘러가는 구름떼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현만큼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다른 학생들도 잔뜩 들뜬 표정으로 옆자리나 다른 자리의 아이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고 걔중에는 음험한 표정으로 남학생들과 작당모의(?)를 하고있는 원중도 섞여있었다.
'그렇다 쳐도 갑자기 태평양의 섬으로 수련회라니..그것도 학교 전용기를 타고 말이야.'
짐짓 속으로 중얼거린 태성은 문득 고개를 들어 비행기 천장부를 바라보았다.
보잉 747만한 사이즈에 내부도 무척 넓고 탁 트인데다 푹신한 의자 시트와 최신식 내부설비까지 갖춘 그야말로 초호화 여객기였다.
간간히 제공되는 기내식도 모두 초일류 요리 일색이었고 결정적으로 지금 이 비행기가 향하는 태평양의 섬도 학교 명의로 되어있는 '전용 섬'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수련회는 대체 뭐하러 가는 거더라? 담탱이 말로는 레크리에이션 몇가지랑 특별훈련 할 꺼라고 들었는데…."
"글쎄? 딱히 알 필요없지 않아? 하루종일 훈련만 시킬 것도 아닐텐데.."
"그렇다 쳐도 망할 교장이 기획한 거라서 은근히 걱정된다고.말이 좋아서 수련회지 또 뭔가 요상한데서 통수를 칠 것 같다고."
짐짓 중얼거리던 태성은 이내 짜증이 돋았는지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애초에 수련회를 빙자한 바캉스라도 시기 상으로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았고 뭣보다 1학년만 데려가는 형태였기에 분명 교장이 또 뭔가를 꾸미고 있을 거라며 태성은 속으로 단언했다.
"헤헷.그래도 명희 언니 말도 틀린 건 아니잖아요? 명색이 그래도 해외여행인데 즐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즐겨두자구요!"
"넌 수련회를 즐기려고 가냐? 막말로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서바이벌이라도 펼쳐지면 그땐 어쩔껀데?"
"음..그때는 당연히 태성 오빠한테 바짝 붙어야겠죠? 전 죽기 싫으니까요."
"그래서 날 방패막이로 삼으시겠다? 내가 널 버린다는 선택지는 생각 안하고있지?"
단박에 튀어나온 태성의 대꾸에 나현은 금세 우엥하며 울상을 지었다.
피식 나현을 비웃어준 태성은 이내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들을 바라보았고 곧 얼마 지나지않아 태성의 머리 위로 띵동하는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 1시간 30분 뒤에 키나루 섬 상공에 도착합니다.학생 여러분은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신호음에 이어 흘러나온 안내음성에 태성은 곧 쯧하고 혀를 걷어찼다.
창문 너머로 펼쳐지던 하늘은 어느새 시퍼런 망망대해로 바뀌어 있었고 비행기 맨 앞좌석에 앉아있던 채윤 선생과 각 반의 담임들이 미리 짐을 챙겨두라며 학생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태성 오빠! 저기 좀 봐요! 섬이에요! 엄청 큰 섬이 보여요!"
문득 꺄꺄거리기 시작한 나현의 말에 태성은 다시금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확실히 크루아상처럼 생긴 아열대 섬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온통 열대의 나무로 가득 들어찬 섬은 중심부에 갈적색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었고 섬 주변의 바다가 온통 에메랄드빛을 띄우고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저기가 그 섬이란 말이지? 제발 교장이 귀찮은 것만 안 시키면 좋겠는데….'
나지막히 속으로 중얼댄 태성은 점점 더 형태가 뚜렷해지는 섬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