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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작가 : 지평선
작품등록일 : 2017.10.31

30일 뒤에 지구가 운석에 충돌해 멸망한다.
지구의 멸망을 막으려는 영웅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멸망하는 지구를 분석하는 공상과학물도 아니다.

삶이 30일 남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람들의 버킷리스트.

 
D-30, 바보와 멍청이
작성일 : 17-11-07 23:22     조회 : 305     추천 : 0     분량 : 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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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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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신경써서 꾸며본 게 벌써 몇 달만인지 모르겠다.

 후드티, 맨투맨, 청바지, 안경, 선크림. 맨날 기본템들의 연속이었는데.

 오늘은 청치마에 블라우스, 트렌치코트, 렌즈.

 피부 화장에도 엄청 공을 들였고, 눈화장은 뷰러에 속눈섭까지 꼼꼼히 마스카라로 칠했다.

 귀걸이, 목걸이, 묵혀뒀던 장신구들도 꺼내서 맞춰보고 오늘 패션컬러에 맞게 립도 발랐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수줍게 웃어보았다.

 

 '아, 안녕.'

 

 어색했다.

 

 몇 달 동안 제대로 운동도 한 적 없고 매일 먹고 놀며 빈둥댔더니 얼굴에 살이 좀 붙은 것 같았다.

 팔뚝도 그렇고 허벅지도 그렇고.

 이런 모습으로 만나기 싫었는데.

 갑자기 만나겠다고 결심해버리는 바람에 다이어트도 못했다.

 

 아니다.

 

 나는 너랑 잘 해보려고 만나는 게 아니니까.

 정리하려고 만나는 것이었다.

 내 머리 위로 운석 덩어리가 떨어지는 그 순간에 너를 떠올리면서 후회하는 건 정말 끔찍할 것 같으니까.

 

 너는 우리 학교 대운동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네가 왜 그 곳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알고 싶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그냥 네 기숙사에서 가깝기 때문인 건지.

 

 우리는 그 대운동장에서 처음 만났다.

 2년 전 대학교 입학식을 하던 그 날.

 

 

 

 

 

 

 

 "국어국문학과! 국어국문학과는 이 쪽으로!"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이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늘을 바라보면 빗방울이 볼 위로 한 방울 씩 톡톡 떨어지기도 했다.

 날씨가 이렇건 저렇건 간에 입학식은 계속 진행되었다.

 

 대학교 입학식, 그 날 나는 완전히 지각했다.

 

 하필이면 그 전 날 일이 꼬여서 저녁쯤에야 자취방으로 짐을 다 옮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잠도 못자고 새벽까지 이삿짐을 풀다가, 입학식이 시작하는 오후 두 시 직전까지 침대에 뻗어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등골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번뜩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2시 10분이었다.

 어떻게든 준비를 간소화하여 뛰쳐나갔다. 그나마 자취방은 학교 근처라 뛰면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학교생활은 첫인상이 중요한데 완전히 망쳤다며 뛰면서도 연신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학교 정문을 향해 일단 무작정 뛰어 오기는 했는데, 새내기였던 나는 대운동장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디선가 들리든 마이크 소리와 고함소리를 향해서 달려갈 뿐이었다.

 가다가 재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허겁지겁 길을 물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멀리서 사람이 가득찬 운동장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때,

 코트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 진동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저기. 장노을 학우분 핸드폰 맞나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 학우라는 낯선 호칭에 순간 경직되어 가던 길을 멈췄다.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신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5학번 과대표 하태양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오늘 입학식 오시나요?"

 

 "네! 입학식 가는데요!"

 

 "저, 혹시 어디쯤이세요?"

 

 "다 온 것 같아요. 그, 막, 운동장? 운동장 보여요. 네네."

 

 "찾아오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저, 혹시 벌써 시작했나요?"

 

 "아직요. 30분쯤 시작할 건 가봐요. 혹시 길 못 찾으시겠으면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목소리 엄청 좋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목소리만큼이나 얼굴도 훈훈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작 이 전화 한통에 내 대학생활에 청신호가 터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망했다며 머리를 다닥다닥 때리며 미친사람처럼 학교로 뛰어들던 내가.

 

 

 앗-

 

 

 그 때, 갑자기 알 수 없는 깊은 불안감과 함께 또 다시 내 몸이 경직됐다.

 

 어떡해.

 

 나.

 

 화장실이 너무 가고싶어.

 

 늦으면 안 되는데. 화장실을 안 갈 수도 없고.

 

 

 

 

 하, 시원하다.

 

 몇 시지?

 

 2시 30분.

 

 아오, 못 살아.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방금 전 통화했던 목소리 훈남 과대표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절대 과 CC하지 말라고 그랬었는데.

 

 뛰어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코트맵시를 다듬었다.

 가방에서 파우더를 꺼내 대충 톡톡 바르고 틴트로 생기를 돋웠다.

 눈곱도 떼고 콧구멍 안도 확인한다.

 거울을 향해 눈웃음을 지어본다.

 

 이제 빨리 가자. 빨리. 훈남 과대표가 날 기다린다고!

 

 

 "어, 저기요."

 

 신발도 구겨신은채 전속력으로 대운동장을 향해 달려가려는 나를 누군가 뒤에서 불러세웠다.

 

 

 "네?"

 

 "이거 두고 가셨어요."

 

 아직 겨울인데 흰색 미니스커트와 검은색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여자였다.

 밝은 갈색에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

 화려한 눈화장과 뚜렷한 이목구비.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금방이라도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매혹적인 그녀는 또각또각 다가와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주섬주섬 핸드폰을 넣다가 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신입생이세요?"

 

 

 그녀는 자신이 국어국문학과 14학번이라고 소개했다.

 나도 그녀에게 내가 국어국문학과 신입생이라고 소개했다.

 

 잠깐의 정적.

 

 그녀와 나는 어색하게 화장실을 빠져나와 대운동장까지 함께 걸었다.

 헤메지 않아서 좋기는 한데, 어쩐지 이마 위로 식은땀이 조금 흘렀다. 아마 계속 뛰어다녀서 그런 거겠지.

 그녀가 나를 도와주고 싶었건, 아니건, 어쨌든 우리 과가 우글우글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도망치듯 신입생들이 줄 서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등 뒤로 그녀를 부회장이라고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일 늦었기 때문에 나는 맨 뒤에 줄을 섰다.

 내가 작기도 했지만, 내 앞에 있는 아이의 키도 너무 커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입학식은 산만하고 번잡스러워서 제대로 시작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핸드폰도 찾아주시고, 여기까지 데려다 주시기까지 했는데.

 말도 거의 안 하고 웃지도 않고,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

 

 하지만, 말 걸기가 너무 무서웠는 걸.

 

 나는 핸드폰을 슥삭 쓰다듬었다. 앞에 서 있던 키 큰 아이가 그 앞에 아이와 화장실을 가는 지 사라졌다.

 

 앞에 시야가 트였다.

 나는 조금 앞으로 갔다.

 

 앞에 있던 남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싱긋 웃으며 짓는 눈웃음이 참 예뻤다. 뽀얀 얼굴에 까만 머리.

 이 아이가 그 훈남 과대표인가?

 

 "안녕하세요."

 

 멋쩍게 대답했다.

 

 "저는 95년생이에요. 임혜성이라고 합니다."

 

 "아, 저는 96년생이에요. 장노을이에요."

 

 자세히 들어보니 목소리가 과대표와 달랐다. 물론 이름도 달랐다.

 그는 웃으면서 서로 말을 놓자고 했다. 나는 손사레를 쳤다.

 

 "아니에요, 제가 어린데."

 

 "말을 놔야 빨리 친해질 것 같아서 그래. 손은 그만 흔들고."

 

 

 핸드크림 향인가? 약간 떨어져 있는데도 임혜성으로부터 달달한 향이 풍겼다.

 아, 순조롭다. 벌써 말도 놓고 친구를 사귀다니. 대학생활이 순탄할 거라는 신호탄이다.

 

 

 

 

 

 

 

 

 

 오랜만에 방문한 대운동장. 오후 2시의 따가운 가을햇살이 파란 잔디를 비춘다.

 살살 부는 바람이 간지럽다. 텅 빈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래묻은 시멘트 계단을 손으로 탈탈 털고 치마를 조신히 잡은 채 앉았다. 가방도 살포시 내려놓았다.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한 달.

 '멸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게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고 한가로웠다.

 이대로라면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오로지 뉴스에 나오는 위성 사진만이 곧 불어닥칠 멸망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장노을."

 

 내 앞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먼저 눈이 갔다.

 그리고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네가 서 있었다.

 검은색 점퍼에 슬랙스. 방금 말린 듯한 부스스한 머리.

 

 너는 변한 것이 없었다. 좋은 목소리도 여전했다.

 너는 아까 전의 나처럼 계단에 묻은 모래를 대충 털고 내 옆에 앉았다.

 

 까맣지도 하얗지도 않은 너.

 단정하지도 지저분하지도 않은 너.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너.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너.

 옷을 잘 입는 것도, 그렇다고 못 입는 것도 아닌 너.

 자상한 것도 까칠한 것도 아닌 너.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이네."

 

 "응."

 

 "잘 지냈어?"

 

 "응."

 

 

 왠지 나는 너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너에게 단답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좀 놀랐어, 나는."

 

 "응?"

 

 "너한테서 메세지가 왔을 때."

 

 

 니가 무슨 표정을 지으면서 그 말을 하는 지 너무 궁금해져서,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검은색도 갈색도 아닌 그 오묘한 눈동자로 나를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9월의 햇볕보다도 네 시선이 훨씬 더 따가웠다.

 

 "장노을이 나한테 메세지를 보내다니."

 

 장난스런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웃지 못한 채 그냥 시선을 피했다.

 

 

 "왜 만나자고 했어?"

 

 "장노을 니가 갑자기 인워드엔젤 물어봤잖아. 그래서."

 

 "그래서?"

 

 "마지막 주에 인워드엔젤 콘서트 한대."

 

 "마지막 주면…"

 

 

 멸망.

 

 

 "같이 가고 싶어, 너랑."

 

 

 멍하니 그 말을 뱉는 너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몇 초 지나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광광 뛰는게 느껴지고 손바닥이 촉촉하게 땀으로 젖었다.

 

 

 "왜 나랑 가고 싶은데..?"

 

 "너 인워드엔젤 좋아했잖아. 콘서트 간다고 답사도 빠지고."

 

 "나 때문에 그 날 콘서트를 보러 간다고?"

 

 "뭐냐? 그 반응은."

 

 

 너는 입을 조금 삐죽거리며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화가 난 건지 짜증이 난 건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용기내서 말 한거야."

 

 너의 표정이 어두웠다.

 

 

 "가자, 콘서트."

 

 다시 한 번 네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해보고 연락줄게-'라고 말하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엉덩이를 톡톡 털고 계단을 내려왔다.

 

 너는 내 뒤를 빠르게 따라내려와 내 팔을 붙잡았다.

 

 

 "야, 장노을."

 

 "뭐야?"

 

 "넌 나한테 메시지 왜 보냈어?"

 

 

 진지하게 내려다보는 너.

 나는 그런 너를 올려다보며, 왜 내가 너에게 메시지를 보냈는지 생각해보았다.

 

 아,

 

 이게 아닌데.

 

 

 "나한테 왜 메시지 보냈냐고!"

 

 네가 소리쳤다.

 빈 운동장에 너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냥."

 

 "뭐?"

 

 "메시지 그냥 보낸 거야. 그냥 보이는 사람 아무한테나. 너 말고도 몇 명 보냈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넌 좀 솔직해질 수 없어?"

 

 너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언성을 높였다. 언젠가 이 말을 예전에도 했었지.

 

 

 "이제 곧 죽을 거야, 우리. 이제 다시는 못 본다고. 그런데도 여전히 넌 너를 속이고 있잖아."

 

 "이게 솔직한 마음이야."

 

 "야, 장노을."

 

 "넌 항상 네 뜻대로 안 되면 이렇게 화내더라."

 

 "네가 자꾸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면서 자존심 세우니까 그러는 거 아냐."

 

 나는 계속 마음에 없는 소리가 줄줄 나왔고,

 너는 계속 나를 질책하며 분노에 젖은 목소리를 냈다.

 

 "네가 변했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고 멍청이다. 이제 진짜 끝이야."

 

 

 나를 앞질러서 네가 가버렸다.

 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네가 지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모래가 묻은 계단에 털썩 주저 앉아, 알 수 없는 눈물을 터뜨렸다.

 

 

 

 바보는 나야.

 멍청이는 나야.

 
작가의 말
 

 

 날씨 추운데 감기조심하세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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