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혼 강시는 하나하나 제련하는 과정에 있어서 막대한 비용과 시간, 노력이 수반된다. 그런데 한둘도 아니고 강시 전대가 통째로 사라진 듯 했다. 이정보가 사실이면 밀궁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마 단주에게 보고를 받은 총관 뇌무령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지금은 밀궁과 한배지만, 때가되면 싫든 좋든 갈라서게 되어있다.
갈라설 때 먹느냐 먹히느냐는 지금부터하기 달렸다. 밀궁 모르게 힘을 최대한 비축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에 앞서 어떻게든 밀궁의 마병기인 강시를 최대한 소모해야 하고, 그와 더불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자혼 강시를 천마교에서도 만들겠다는 계획을 구상한 총관.
그는 교주의 집무실 앞에서 아뢰었다.
“교주님, 총관 뇌무령입니다.”
“어서 들라.”
총관은 교주 앞에 고개를 깊게 숙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예를 올린 후 다음 말을 꺼내기에 앞서 헛기침을 하며 무심코 몸에 밴 행동으로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교주의 집무실에는 비밀호위인 암영대(暗影隊)가 포진해 있을 것이다. 이곳에 간자가 잠입하기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노파심에 몸이 습관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교주도 이를 알기에 개의치 않았다.
“교주님, 밀궁과의 회의에 앞서 참고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해보게.”
계속하라는 교주의 명에 생각한 바를 보고했다.
정마단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 총관의 보고에 안 그래도 붉은 눈동자의 교주 곽소량은 욕심에 더욱 진하게 핏빛으로 번들거렸다.
“크흐흐. 좋군.”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밀궁과의 공조에 교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중원의 사파를 규합하여 정파를 치고 내려갈 계획이었다.
시의 적절하게 덫에 걸리고 만 빙궁. 하늘도 돕는 모양새다. 뜻하지 않게 세외 최고 세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북해 빙궁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천마교 대전 회의실.
천마교의 장로들과 밀궁의 장로들 그리고 수뇌부들이 양편으로 나뉘어져 앉은 가운데 중원 침략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강력한 무력 집단과 고수들을 보유한 두 단체의 막강함은 말이 필요 없다. 이들의 힘은 중원 무림에게 있어 재앙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오랜 숙원이었던 일이라서 그런지 과감하면서도 치밀한 계획이 진행되었다.
북해 빙궁이 남하하는 시점에 맞추어 정파 무림맹 소속인 태정문을 시작으로 피의 역사를 시작하기로 말이다.
* * *
작은 호수를 가까이 두고 제법 큰 규모의 무림인들이 야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위 뒤에 은밀히 기척을 죽이고 주시하고 있는 일단의 무리.
특징 없는 야행복을 입고 있어 분별이 어려웠으나, 작게 흘러나오는 말투에서 이들이 누구인지 엿볼 수 있었다.
“거리가 멀어 식별이 쉽지 않습니다. 이 거리에서는 소궁주님을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반 시진(1시간) 후에 최대한 접근하기로 한다.”
“예, 대주님.”
빙궁에서 급히 추적을 위해 나선 화용대 대주와 수하들이었다.
화용대의 추적과 은신술은 빙궁의 최고 수준이었으나, 이들이 쫓는 대상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무림 고수들이었다.
기척을 최대한 죽인 대주 하역도는 안력을 높여 무림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세밀히 살폈지만, 찾고자 하는 소궁주 설소정은 보이지 않았다.
정황상 분명 소궁주를 억류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에 끈기를 가지고 다시 살폈다.
‘어, 저기 저것은···.’
낯선 사내의 손목에 있는 익숙한 팔찌. 백색과 푸른 옥빛이 섞여 있으며 빙백 산에서만 아주 극소량으로 얻을 수 있는 빙궁의 보물인 빙옥으로 만들어진 팔찌다.
소궁주가 태어난 직후 손목에 찬 팔찌는 신체가 성장하면 같이 커져 손목의 일부분과 같기에 다른 누군가가 가로채 찰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사내가 바로 소궁주라는 뜻이다.
“크윽, 소궁주님께서 저리 되실 줄은! 속하들의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추후에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소궁주의 주화입마는 빙궁의 상층부만 아는 비밀이지만 그도 알고는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궁주의 신체가 어떻게 변하리라는 짐작도.
그가 기억하는 소궁주의 아름다운 얼굴은 사라지고, 대신 그의 눈에 비친 소궁주는 미공자인 사내로 바뀌어 있었다.
원통하고 참담한 마음에 정신이 늪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으려던 하 대주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더 큰 문제는 빙백정을 벗어난 소궁주의 목숨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소궁주를 구하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보면 오히려 소궁주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화용대의 대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게 최선이다.
그래도 마음까지는 그러질 못했다.
“빠드득, 이 간악한 중원 놈들. 반드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천년 빙굴에 처박아 버릴 것이다.”
조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입술에 피가 나도록 악다문 하 대주의 두 눈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베어 나왔다.
소궁주의 신변을 확인한 화용대는 자리를 은밀히 이동했고, 그 중에서 경공이 제일 빠른 몇몇이 빙궁으로 몸을 날렸다.
“흠, 방금 이 기운은 뭐지?”
미세한 살기를 감지한 강현은 저 멀리 야트막한 언덕 부근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살기는 없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부님. 왜 그러세요?”
“어, 별거 아니다. 어서 시작해라.”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자 수연도 고개를 돌리고 자세를 잡았다.
“설소정님. 그럼, 시작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스스스스.
수연의 두 손을 통해 공기마저 순식간에 얼리는 극한의 한기가 생겨나더니 설소정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설소정은 등으로부터 시작해서 온몸으로 퍼지는 시원한 기운에 몸을 맡겼다.
단전에서 휘몰아치던 뼈조차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와 속이 타는 갈증이 거짓말처럼 날아간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쯤, 온몸의 피와 살은 물론 영혼까지 다 타버렸으리라.
원수 같은 중원 무림인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을 작정이었으나, 하루에 두 번 수연의 도움을 받아 치욕적이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빙백정의 극음(極陰)의 한기와는 묘하게 다른 그녀의 내력이 그를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늦추는 것에 끝나지 않았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한기가 극양(極陽)의 열기만을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약하나마 혈맥이 단단해지고 내력이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확실했다.
설소정은 점혈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내력을 돌리지 못하기에 수연이 혈도를 따라 내력을 이끌었다.
처음 할 때는 점혈이 되어 있는 곳을 무시하고 강제로 돌리다 설소정은 물론, 본인도 주화입마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질 뻔 했다.
이제는 여러 번의 경험 덕분인지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내력을 이끌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둘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갔다.
단순하게 다른 이의 혈도를 따라 내력을 이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제는 누가 누구의 내력으로 이끄는 인도자고,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점혈이 되어 있는 부분을 피해서 내력을 돌리다 보니 신체부위 중 은밀한 혈을 어쩔 수 없이 지나게 되었다.
움찔.
설소정의 몸이 움찔 거리자 따라서 수연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야릇한 느낌이었다.
설소정의 등에서 손을 뗀 수연의 볼이 발그레 했다. 타인의 몸에 그것도 사내의 맨살에 닿은 손을 몇 번이고 오므렸다 폈다. 열기를 흡수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가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설소정의 모습을 본 그녀의 가슴에 뭔가 생소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수연아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사부님.”
“그래? 내 보기엔 좀, 혈색도 그렇고 어디 불편해 보이는데.”
“아, 아니에요.”
귀밑까지 빨개진 수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황룡세가의 인물이 조금 떨어져 운기조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협의(協義)를 운운하며 대의를 표방하던 자들의 행태가 눈에 거슬린다.
자유를 구속하기만 하고 신체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빙궁의 세력과 무력은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할 정도로 강력한데 어떻게 그들의 분노를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옆으로 다가온 화령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봤다.
설소정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는 황룡세가 무인들에게 강현이 한마디 했다. 들으라는 듯.
“정말이지, 하는 꼴이 정말 정파답지 못한데다 비열하기까지 한 것 같군.”
아무리 빙궁의 보복이 두려워도 그렇지 정도를 넘어서는 행동에 불만이 쌓인 그였다.
“이봐, 지금 뭐라고 했나!”
바람이 일 정도로 홱 돌아서 묻는 중년의 무사 눈빛은 살벌하기까지 했다.
“정파면 정파답게 행동하라는 말을 했소.”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인상이 일그러진 무사 옥고진.
스스슷.
그의 무위를 증명 하듯 십장(30미터)이 넘는 거리가 무색하게 뛰어난 신법을 보여주며 순식간에 좁혀 왔다.
“이봐, 지금 그 알량한 재주를 믿고 그러나! 아니면 뒤에 있는 개방을 믿고서 이리 오만한가!”
말을 마친 옥고진의 입매가 비웃음에 따라 비틀어진다. 초절정고수인 그는 세가의 장로이며 고수들로 이루어진 명월대의 대주다.
다른 세가의 장로들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세가의 무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마지막 관문에 합류한 그로서는 인질의 관리를 직접 하는 것도 모두 세가의 소가주를 위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우습게 보였나보다. 이참에 놈에게 강호의 쓴맛을 확실하게 보여줘 가르침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미친 옥고진은 기세를 뿜으며 발검 자세를 취했다.
보통 이정도의 기세면 일류 고수들도 기가 역류할 만큼 대단한 기세였다.
“우웃, 과연 옥 대협이로세!”
주변의 무사들이 옥고진의 기세에 인상들을 찡그리며 뒤로 주춤 물러서며 감탄들을 했다.
옥고진의 기세등등한 행동은 강현에겐 전혀 위협이 되질 못했다.
스윽.
차분하게 가라앉은 강현의 시선과 감각은 상대의 솜털 하나하나를 넘어서 미세한 맥동까지도 느낀다.
옥고진은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세에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제길, 쉽게 볼 놈이 아니군.’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언 듯 스쳐지나갔지만, 자존심 상 여기서 멈출 순 없었기에 순식간에 내력을 끌어 올려 검을 겨누었다.
“건방진 놈, 이참에 버릇을 고쳐주지!”
강현도 검을 뽑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입으로만 그러지 말고 어디 실력을 보여주시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법.
“뭣이!”
손끝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모양이 평정심을 잃은 것이리라.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옥고진은 살기를 일으키며 말을 씹듯이 내뱉었다.
“으득, 그 입을 더 이상 놀리지 못하게 해주마.”
강현과 옥고진의 신경전이 벌어질 때 쯤, 주변의 무인들은 하나, 둘 눈치를 채고 모여들었다.
둘의 행동을 말렸을 법도 하건만, 세외를 벗어나 중원에 가까워짐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 탓인지 그저 지켜볼 뿐이다.
황룡세가와 종리세가의 인물로 보이는 무사들이 주변의 시선 따윈 상관없다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지껄였다.
“거, 운 좋게 고수전을 통과해 예까지 온 것 같은데 그 운도 이제 다한 것 같소이다.”
“그리 보입니다. 옥고진 대협의 실력이야 두말 할 거 없지. 무림 일절인 황룡제화검식을 견식 할 좋은 기회이오.”
주위의 눈도 있고 해서 무림선배로서 양보를 하려고 했으나, 무시 할 수 없는 실력에 격식 없이 옥고진이 먼저 출수를 했다.
첫 초식부터 아예 작정을 했는지 강하게 밀어붙일 요량으로 본인의 성명 절기를 쏟아냈다.
“황룡등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