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성연은 화장실 안, 변기에 앉아 다리도 들어 올린 채 손을 덜덜 떨었다. 심호흡을 하며 통장을 열어보았다.
‘일,십,백,천,만,십 만, 백 만, 천 만...사천 팔백..’
성연은 누가 볼까 황급히 통장을 닫았다.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꿈은 아니겠지..’
다시 한 번 통장을 열어 금액을 확인 했다. 성연의 눈이 기쁨으로 출렁거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하늘도 무심하진 않구나. 성연은 통장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로또는 추석 당일에도 전 부치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다. 한주를 이겨내는 의식 같은 것이었는데 2등이라니! 성연은 좁은 화장실 안에서 방방 뛰었다. 학교를 갈까, 아니면 이사를 할까. 성연은 몇 년을 모아도 모을 수 없던 돈을 손에 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성연은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골목 끝의 대문이 보이고 집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옆집의 담에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성연아.”
집을 향해 가던 성연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옆집 아주머니였다.
“어쩐다니. 니 엄마 경찰이 잡아갔어.”
“네?”
“아까 경찰들이 와서 뭔 사기죈가 뭐시기로 잡아 갔어. 이게 무슨 난리라니.”
성연은 핸드폰을 툭 떨어트렸다. 또 시작인가 싶었다. 이 삼 년에 한 번 씩 엄마 정성이나 동생 기수가 사고를 쳤다. 두 사람은 성향도 비슷해서 꼭 가을에 싱숭생숭하다 일을 치고야 말았다. 성연은 진저리를 치며 주저앉았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골목마다 줄지어 서 있는 가로등이 하나 둘 씩 켜지기 시작했다. 성연의 머리 위로 가로등이 켜질 무렵 해는 완전히 넘어가 어둠이 내리깔렸다. 해가 지도록 주머니 속의 통장을 꽉 쥐고 있던 성연의 머리 위로 기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하냐?”
성연은 기수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엄마, 잡혀간 거 들었지? 노친네 이번에는 다단계란다.”
성연은 기수를 보다 끙 하며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일어났다.
“노친네가 누나 통장 돈으로 다단계 했다더라.”
“내 통장이라니.”
“뭘 물어 통장이 통장이지. ”
성연이 아는 통장은 한 달에 오 만원씩 가족 몰래 부은 적금통장 뿐이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무슨 통장을...”
“누나, 맨 날 장판 밑에 두잖아. 콧구멍만 한 방에서 그걸 모르겠어?”
“비번은 어찌 알고?”
“누나 아버지 기일이라며, 엄마가 그러던데? 그거로 저번에 고기 먹은 거잖아. 자기도 좋다고 먹어놓고.”
성연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그때 먹은 고기가 내가 일해서 부은 적금으로 먹은 거고 지금 니가 입고 있는 카디건이 그 돈으로 산거라고!”
오렌지 빛 가로등 불빛, 그 아래 성연은 자신이 드라마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럴 때 누군가 날 구해주러 올 텐데.
“난 왜 하필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뭐래, 어차피 엄마 합의금 없잖아. 그러고 있으면 돈이 생겨? 궁상 그만 떨고 춥다 들어가자.”
기수는 망연자실한 성연의 어깨를 툭 치고 가버렸다.
성연은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돈이 왜 생겼나 했네. 하늘이 용하기도 하다. 헛웃음이 터졌다. 이쯤 되니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존재하나보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아이처럼 손등으로 닦으며 주머니 속의 통장을 꼭 쥐었다. 어디선가 된장찌개를 끓이는지 고소한 냄새가 골목에 퍼지기 시작했다. 또 어느 집에서는 게임을 하는지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사람들. 성연은 자신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에 비참함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 더 이상은 못 참아...이건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야...’
성연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핀 조명처럼 성연을 비추는 오렌지 빛 가로등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했다.
“ 그래! 결심했어! 난 모든 걸 버리고 독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