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스가 무엇을 하고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로 인해 서지애가 건강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보다 활발해진 그녀는 언제나 뱃속에 아기를 생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서지훈의 머릿속엔 에르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뱃속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가 그녀를 죽이고 있죠. 그 존재를 어찌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아기를 생각하며 웃고있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서지훈은 에르스의 말이 틀렸기를 바라며 자신이 들은 것들을 그녀에게 숨겨야만 했다.
그렇게 꿈만 같은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허황된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머지는 당신과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겠죠’
에르스의 말을 떠올리며 서지훈은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이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어서 와”
“응”
이불은 흘러내린 땀으로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서지훈은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서지훈은 눈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힘껏 눈을 감았다.
“지애야... 말해야 하는 게 있어”
서지훈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숨겨서 미안해…”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볼 수가 없다.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말에 담긴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서지훈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오빠?”
무엇이 이렇게까지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서지애는 가만히 앉아 서지훈이 그것을 말해주기를 기다린다.
“지애야… 네가 아픈 이유가…”
진실을 말하기가 두렵다.
“뱃속에 있는 아이 때문이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 그 아이 포기하자…”
그것이 서지훈의 선택이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서지훈은 조용히 서지애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녀는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까, 차라리 이런 말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라도 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서지애는 말없이 두 팔로 서지훈을 끌어안았다. 품속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또 그렇게 혼자 짊어지고 있었구나…”
서지애는 자신의 품에서 떨고 있는 등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우리 포기하지 말자”
그녀의 따듯한 온기에 녹아 내린 불안이 두 눈에서 흘러 내린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지훈은 그녀의 품속에서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사과를 계속했다.
두 사람은 정해진 선택지를 버리고 자신들만의 선택을 내렸다. 애초에 누구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와 아이, 두 사람을 모두 살리기 위해 서지훈은 새로이 각오를 다진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또다시 과거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그녀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에 대한 것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에르스를 찾아야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에르스를 찾기 위한 단서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알고있는 정보라고 해봐야 고작 에르스라는 이름과 그의 생김새뿐, 애초에 그것 마저도 거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지훈은 에르스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서지훈은 에르스를 찾아내기 위해 미친듯이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에르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상들조차 에르스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에르스의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었지만 서지훈은 포기하지 않는다. 서지훈은 마지막으로 에르스를 만났었던 그곳으로 향했다.
에르스가 자신을 찾아왔던 그곳에서 서지훈은 하염없이 에르스를 기다렸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서지훈이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제 와서 에르스가 자신을 찾아올 리 없다는 것은 서지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
서지훈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능력이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도 서지애의 출산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기다릴 수 있는 시간조차 남아있지 않다.
결국 반복되어질 과거를 막을 수 없는 것일까, 깊은 무력감속에서 서지훈은 이것이 자신의 한계임을 깨닫는다.
“젠장”
이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겨우 버텨온 서지훈은 끝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저기 괜찮으신가요?”
서지훈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지훈은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지닌 것들이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우…”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그런 망설임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서지애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일, 서지훈은 자신이 돌아가야 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기분 나쁠 정도로 그대로구나”
서지훈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결계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문을 떠난 지도 어느새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곳은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당연한 건가…”
그토록 변화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곳이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우뚝 서있는 가문의 모습을 바라보자 마음이 흔들린다.
“제 발로 이곳에 돌아오게 될 줄이야…”
멈춰버린 의지는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두렵다.
그곳에 있을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고 남겨두고 온 과거와 마주할 변해버린 자신이 두렵다.
그러나 이대로 그녀를 잃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
자신이 버린 과거, 하지만 이제는 그 과거에 매달려야만 한다. 서지훈은 굳은 표정으로 결계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