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장. [정상인 병동]
고요한 방 안에 컴퓨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설화는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빠르게 타자를 쳐내려갔다. 이윽고 ‘탁’하는 마지막 타자소리가 들리고 설화는 지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낫다.
“드디어 완성이다, 우리들의 이야기.”
졸업한 뒤 아버지의 회사에서 경영을 배우던 설화는 틈틈이 글을 썼다. 몇 번의 수정을 거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 그녀의 책은 2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출판되고 몇 개월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판매수도 저조했고, 평론가들에게서도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책의 주문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퍼진 거였다.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그녀의 책은 많은 공감을 얻었다. 예상치 못한 인기에 설화는 얼떨떨했다. 유 원장과 그들 모두는 좋아하며 설화의 글 솜씨를 칭찬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그 책의 내용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설화도 그들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이해는 했지만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허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왠지 씁쓸했다. 설화는 자신이 주인공들 중 한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이 이야기가 단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작은 깨달음을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들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설화는 특별한 제의를 받았다. 유 원장의 애인이기도 한 연극 연출자가 소설을 영화화시켜보지 않겠냐고 했던 것이다. 설화는 많이 고민하고 망설였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다 보면 많은 제약이 있을 것이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내용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었다. 설화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데에 두 가지 전제조건을 걸었다. 하나는 각색을 설화가 맡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들이 주연을 맡는 것이었다. 각색은 학원에서 배우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문제는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처음 설화가 말을 꺼냈을 때, 황당해하며 거부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학생 역을 맡기도 어색할뿐더러 연기를 잘 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비밀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 설화는 내용을 조금 수정하여 그들이 실제 주인공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겠다며 그들에게 부탁했다. 다른 사람이 그들의 이야기를 연기한다는 것은 설화에게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결심을 풀지 않았다. 유 원장의 설득은 연출가가 맡았다. 그는 자신이 감독을 맡고 설화가 직접 각본을 맡을 거라며 유 원장을 설득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그녀는 어렵게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유 원장이 허락했다는 소식에 그들의 완강한 거부감도 상당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스스로 보여주자는 유 원장의 말에 결국 그들은 모두 출연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막상 하게 된 그들은 내용을 하나도 바꾸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사실대로 알리고 싶어 한 것이었다. 설화는 최대한 내용을 살리면서 소설을 극화시켰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그들은 긴장을 심하게 했다. 유 원장은 카메라나 조명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라고 조언했지만, 아이들은 실수도 많이 하고 상당히 어색해했다. 대본만 잡고 달달 외우려는 그들에게 설화는 대본을 보지 말라고 했다. 그건 그냥 명실상부일 뿐이라고, 모든 건 다 우리들 기억 속에 있지 않냐고 말하는 설화에게 그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기억 속에 있어도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너무 불편하고 이상해.”
“역시 그냥 하지 말 걸 그랬나봐. 우리 때문에 시간만 지체되잖아.”
설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들 앞에 서서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예전 그곳의 그들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함께 있어서 즐겁고 좋았던 그 때의 일들이 떠오르자, 기분이 좋아졌다. 웃으면서 눈을 뜬 설화는 기운 없이 축 쳐져 있는 그들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김설화입니다. 다은이 친구예요.”
갑작스런 설화의 말에 다들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꿈이 없는 바보 같은 삶을 살았어요. 제 인생에서 중요한 건 내가 아니었어요. 부모님의 기대였고, 남들의 시선만을 신경 쓰며 사느라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처럼 내일이 오는 것을 기대하며 즐겁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이렇게 변한 건 모두 여러분 덕분이에요. 아픈 상처를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항상 따뜻하게 절 대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설화는 예전처럼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 까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놀라하던 그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넌 꼭 꿈을 찾게 될 거야.”
종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 잘해낼 테니까, 걱정하지 않을게.”
지윤은 손에서 떼어놓지 않던 대본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누나, 힘내. 응원할게.”
두 주먹을 쥐고 힘차게 팔을 아래로 내려 보이며 태훈이 외쳤다.
“우리야 말로 고마워. 네가 여기 온 이후로 우리도 많이 달라졌어.”
세희의 말에서 그녀의 어른스러움이 묻어났다.
“언니도 제 노래를 들으며 칭찬해 주셨죠. 그 때 참 많이 힘이 됐어요. 감사해요.”
밤샌 스케줄로 인해 약간 피곤해 보이는 경옥은 설화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넌 참 좋은 애야. 그건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쑥스러워 했지만 윤서는 진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설화를 보았다.
“누나의 눈에서 빛이 보여. 내가 축구를 할 때와 아주 비슷한 빛이야.”
우진이는 평소의 장난기어린 모습이 사라진 채,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꿈을 찾을 거니까, 우리 누가 먼저 찾나 내기하자.”
밝은 목소리로 해인이는 설화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
“우린, 널 믿어.”
애정 어린 다은이의 말을 듣자마자 설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에 멀리서 그들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유 원장이 보였다. 유 원장,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설화는 기쁨으로 크게 웃어 보이며 힘차게 외쳤다.
“자! 우리의 영화, 이제 시작이다! 아자!”
그녀의 말에 모두들 손을 하늘로 뻗으며 소리쳤다.
“아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