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장. [열려진 비밀의 문]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설화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거실 소파에 누워있었다. 그녀가 가슴에 꼭 안고 있던 공책은 탁자위로 옮겨져 있었다.
“괜찮아?”
다은을 비롯한 이곳 사람 모두가 설화 주위에 모여 있었다. 설화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말을 하려고 하자, 목이 아파오면서 쇳소리가 났다.
“…응”
“아까 숨을 못 쉬더라고. 왜 그런 거야? 몸은 다 멍투성이고. 무슨 일 있었어?”
다은이의 걱정스런 물음에 설화는 천천히 숨을 모아가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야……. 그보다, 어떻게 문을.. 연거야?”
“다은이가 거실에서 열쇠를 발견했어. 열어 봤더니 문이 열리더라고.”
종혁의 말에 설화는 황급히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을 점검했다. 역시 아까 끌려갈 때 열쇠가 주머니에서 빠진 게 틀림없었다.
“. 유 원장님이. 왜. 여기에. 사람들을 가뒀는지. 알았어요.”
“뭐?”
모두 놀란 표정으로 설화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자, 설화는 마음이 다급해져서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 이걸... 발견했는데.. 여기에 쓰여 있어요. 모든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설화가 가리키는 공책을 지윤이 펼쳐보았다. 눈으로 빠르게 읽던 그녀는 ‘헉’소리를 내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모두의 재촉에 의해 그녀는 유 원장의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사람들의 흠칫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다들 끝까지 조용히 귀 기울여 들었다.
낮은 목소리로 울리던 지윤의 말이 끝나고, 한참동안 고요한 정적이 거실을 감쌌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종혁의 얼굴에는 허탈한 표정이 가득했다.
“마리아님도 우리와 같았던 거였어요.”
눈물이 눈에 가득 고인 경옥이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처럼 힘들었었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주신 거예요. 마리아님은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요.”
어른스러운 그녀의 말에 모두들 마음이 흔들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나가주길 바란다고 써있잖아.”
“확실히 나가라는 건 아니었어. 우리가 있어주길 바라기도 하셨다고.”
다양한 의견들이 대립했지만 어느 누구도 섣불리 결정을 내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설화는 처음 불씨를 던진 자신이 그 불을 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돌아가야 해요. 그래야 원장님과 여러분이 모두 다 살 수 있어요. 여긴 시간이 멈춘 곳이에요. 여기서는 늘 제자리일 수밖에 없어요. 무인도에 가면 더하겠죠. 정말 이대로 가족들을 버리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즐거웠던 것도 그나마 가까이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 아니었나요? 다 버리고 가면 행복할 자신 있어요?”
설화의 질문에 다들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원장님을 위해서라도,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활을 그만두어야 해요.”
“돌아가고 싶어. 난 돌아갈 거야.”
해인이는 결심을 굳힌 듯 울지도 않고 또박또박 분명하게 말했다.
“나도, 돌아가겠어. 적어도 내가 만든 요리를 가족이 한 번은 먹어봐야 한다고 생각해.”
지윤의 진지한 말에 아이들의 표정에 혼란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온 나를, 반겨줄까?”
두려움이 드러나는 종혁의 질문에 설화는 애써 웃어 보이며 답했다.
“물론이죠. 세상은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 설령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이대로 회피하기 보다는 부딪쳐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적어도 여러분은 다른 보통의 사람들이 절대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지녔잖아요. 더 이상은 도망치지 마세요.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세요. 이제는 그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느끼는 게 많은 듯이 그들은 저마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하에 문이 있다고 쓰여 있으니까, 저는 내려가서 문을 찾아볼게요. 준비가 되시면 밑으로 내려와 주세요.”
설화는 일어섰을 때 약간 현기증이 났지만 그래도 꿋꿋이 혼자 지하창고로 내려왔다. 그들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느꼈고, 그 자리에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설화는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새벽이 되었는지 창고는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약간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설화는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두드려보기도 하면서 문을 찾아보았다. 설화는 창문아래의 벽 앞에 멈춰 섰다. 벽을 두드려보니 일반 벽과는 다르게 청명한 소리가 났다. 가려진 벽지를 뜯어내자, 그 곳에는 아이들 키 정도의 작은 철제문이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어보니 지하에서 밖으로 이어져있는 계단이 있었다. 열린 문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는 달이 보였다.
“정말 있었네, 비상문.”
종혁을 필두로 하나 둘 창고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윤서는 공책을 들고 있었는데 설화의 앞으로 다가와 그것을 내밀었다.
“이거, 마리아님, 아니 유 원장님한테 주는 내 마지막 선물이야. 원래 있던 곳에 놓아줘.”
설화가 조심스레 건네받은 공책을 펼쳐보니, 그곳엔 환하게 웃고 있는 유 원장의 그림이 예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설화는 두 번째 서랍장에 그것을 원래대로 넣어놓았다.
“이제, 갈까요.”
해인이를 선두로 하나 둘 씩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서인 설화는 오랜 시간동안 괴로웠던 유 원장의 마음처럼 낡고 부식된 창고 안을 눈 속에 깊이 새겨놓았다.
계단을 올라간 설화는 사람들이 모두 한 곳을 보며 꼼짝 않고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으로 가보니,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유 원장이 서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벽이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화가 사정을 설명하려고 입을 여는 동시에 유 원장이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설화 앞에 선 그녀는 아이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바로 앞에 있는 설화와 눈을 마주쳤다. 체념한 표정의 유 원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들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총 2층이었다. 내부만큼이나 하얀 건물은 깨끗했고 세련돼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어 보이는 저 곳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의심할 수 있었을까. 설화는 건물을 보는 마음이 쓸쓸해졌다. 그들은 모두 뒤를 돌아 유 원장이 건물 1층 중앙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들도 곧 각자의 현실로 돌아갔다.
실종된 사람들이 돌아오자, 그들의 그동안의 행방에 대한 의문들로 나라 안이 들썩였다. 그들 모두는 경찰서에 몇 번 모여 심문을 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 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들의 완강한 태도에 자․실 사건은 단순한 실종사건으로 조용히 종결되었다.
유 원장이 여행을 간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2주 후였다. 어디로, 누구와, 왜 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유 원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종혁은 부모님께서 먼저 의대 자퇴를 권유하셨다고 한다. 자퇴 후 그는 좀 더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고픈 마음에 학점은행제를 통해 모자란 학점을 채우고 실용음악과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처음 배우는 작곡 공부가 아주 흥미롭고 즐겁다며 그는 나중에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려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한편 지윤은 다시 아버지와 살게 되었다. 그녀가 죽은 줄로 안 부모님들은 무책임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셨다고 한다. 다시 그녀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게 되셨을 때 울면서 자신을 껴안는 부모님과 새 어머니를 다독일 정도로 지윤은 많이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렇게 귀여운 남동생과 함께 살게 된 그녀는 재수를 해서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하였다. 세희와 함께 같은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세희의 여동생은 다행히도 의식을 되찾았고 언니가 살아 돌아온 뒤부터 빠르게 호전되고 있다고 한다. 세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스스로 벌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한편, 태훈이는 살이 적당히 빠져서 건강해졌고 학교에도 다시 가게 되었다. 수업일수가 모자라 유급하게 된 그는 한 살 어린 동생들과 지내게 됐는데 그들 사이에서 태훈이는 인기 쟁이라고 했다. 자신감을 되찾고 용기가 충만해진 그의 당당함에 아이들이 많이 따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괴롭게 만든 장본인인 초등학교 때 친구들은 돌아온 태훈이를 찾아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자살소식에 너무 놀랐고 친구를 외면한 죄책감에 괴로웠다고 하면서 말이다. 태훈이는 어른스럽게 그들을 포용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제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예쁜 목소리를 지닌 경옥이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갖고 가수 오디션을 보았다. 그녀는 단 한 번에 합격했고, 3년의 연습생 기간을 통해 노래와 춤 실력을 향상시켰다. 얼마 전 그녀가 드디어 앨범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5인조 여성 그룹으로 데뷔하는데 거기서 경옥이는 리더 겸 리드보컬을 맡았다고 한다. 설화는 누구보다도 기쁘게 그녀를 축하해주었다. 늘 혼자서 축구를 하던 우진이는 다행히도 부모님께서 그의 꿈을 인정해주셨고 뿐만 아니라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신다고 한다. 이제 떳떳하게 좋아하는 축구를 즐기게 된 그는 정말로 행복해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목표로 우진이는 지금도 열심히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해인이도 마찬가지로 부모님께서 아이의 큰 부담과 짐을 덜어주시기로 하셨다고 한다. 이제 그는 여행갈 때에만 비행기를 탄다고 좋아했다. 해인이는 교육부 장관이 되어서 더 이상 자신처럼 공부 때문에 억지로 외국유학을 가는 어린 아이들이 없도록, 국내에서도 충분히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에 제일 격려해준 건 윤서였다. 그녀는 해인이가 꼭 꿈을 이뤄서 우리나라 교육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청산해줄 것을 부탁했다. 윤서는 이제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재수를 해서 미대에 입학한 그녀는 대학교에 와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고 한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면서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밝은 모습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다은이는 대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제과 제빵사 자격증을 취득해 제과점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그녀는 제과제빵으로 유명한 파리에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돈을 모으고 있다고 말이다. 소원대로 날마다 빵 냄새를 맡으며 일을 하는 그녀는 오븐에 화상도 많이 입고 조금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다고 했다. 미래에 열게 될 자신의 제과점을 상상하다 보면 일할 때 신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다은이의 모습은 정말로 멋져보였다.
모두들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게 되었다. 용기를 내서 세상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는 그들의 마음은 매우 강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설화는, 드디어 자신의 꿈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