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장. [대리만족]
다음 날, 유 원장은 아이들을 거실에 모아놓고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의 안부에서부터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없는지 꼼꼼하게 한 명씩 물어봤다. 설화에게도 가식적인 웃음을 보이며 말을 건넸다.
“설화는 뭐 필요한 거 없어? 기타배우고 있다는 얘기 들었는데, 기타 하나 새로 사줄까?”
그녀의 미소에 소름이 돋은 설화는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는 됐어요.”
“그럼 다른 건 갖고 싶은 거 없니? 먹고 싶은 거라든가, 말만 해. 다 사줄 테니까.”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화는 고개를 여러 번 가로저으며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래? 알았다.”
잠깐이었지만 유 원장의 눈빛에 의심이 가득 담기는 걸 설화는 눈치 챘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다시 아이들을 향해 사랑이 가득담긴 시선을 보냈다.
“있잖아, 오늘은 아주 기쁜 소식이 있어.”
“뭔데요, 마리아님?”
태훈이가 예의바르게 물었다.
“응, 그게 말이야.”
궁금증을 더하려는 듯 그녀는 뜸을 들였다. 계획대로 아이들은 더욱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뭐예요? 빨리 알려 주세요.”
“궁금해 죽겠어요, 마리아님.”
그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유 원장은 말을 이었다.
“너희들 여기 실내에만 있으려니까 답답하지? 그래서 이사를 가려고 해. 공기도 쾌적하고 산과 바다가 함께 있는 곳이야. 그리고 사람들도 별로 없어. 아무도 너희를 알아볼 수 없는 데야.”
설화는 그녀의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아무도 알아 볼 수 없는 곳이라면, 한국이 아닌 아주 먼 곳으로 간다는 얘기이기 때문이었다. 유 원장은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집도 아주 커. 창문도 아주 커서 햇살이 얼마나 잘 들어오는지 몰라. 너희들이 정말 좋아할 거야. 어때? 가고 싶지?”
그녀의 말이 당황스러운 것은 설화뿐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동요하고 있었다.
“아주, 멀리 가는 건가요?”
윤서의 질문에 유 원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응, 한국에서 비행기타고도 몇 날 며칠 걸리는 곳이야.”
그 말에 제일 놀란 건 해인이었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며 유 원장을 보았다.
“외국이라고요?”
해인이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그녀는 아이의 손을 따스하게 감싸며 말했다.
“필리핀은 아니야. 두려워할 것 없어. 거기엔 우리들 밖에 살지 않을 거야.”
“무인도라는 말씀이세요?”
웬만한 일에는 크게 반응을 하지 않던 세희도 이번만큼은 충격 받은 모양이었다.
“응. 맞아.”
유 원장은 겁나하는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아. 이제는 나도 병원일 그만두고 너희와 함께 살 거야. 그 곳에서도 너희들이 원하는 것 실컷 하면서 살 수 있어. 약속할게. 나 믿지?”
설화를 제외한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에서 다들 걱정이 묻어났다.
“잘 생각해봐. 한 이주일 정도 시간이 있어. 그 뒤에 떠날 거야.”
유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모두 넋이 나간 듯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주일 뒤라니. 그렇게나 빨리?”
우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무서워. 가고 싶지 않아.”
해인이가 몸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새파랗게 질려있는 아이의 모습에 설화는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우리 모두 가지 말아요.”
그녀의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지윤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가지 말자고요. 다들 가기 싫잖아요. 무인도라는데, 한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곳이라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가고 싶어요?”
버럭 호통을 치는 설화의 모습에 다들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넌 가지 않을 거야?”
놀란 표정의 종혁이 설화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예. 저 뿐만 아니라 모두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리아님이 가자고 하는데 어떻게 거부해? 그 분은 우리 목숨을 살려주신 분이야.”
내용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세희의 말이 불 시위를 당긴 것처럼 설화는 다발총같이 말을 쏟아냈다.
“마리아님이 아니에요. 유 원장님이죠. 그녀는 성모 마리아가 아닙니다. 신이 아니라고요. 살려줬다고 해서 이렇게 여러분을 가두는 건 용납될 수 없어요. 이건 납치에요. 범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여기 이대로 있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두의 꿈도 다른 사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게다가 우진이와 해인이는 아직 어려요. 부모님이 필요하다고요. 다들 알잖습니까.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불안한지!”
설화는 말을 하다 보니 더욱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돌아가요. 돌아가자고요! 유 원장님이 무슨 일을 꾸미는 지도 몰라요. 혹시, 이곳에 지내면서 이상한 점 없었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러고 보니….”
깊은 침묵을 지키던 경옥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매번 6개월마다 여기에 사람들이 찾아왔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지하창고에 갇히게 되었고. 이틀 뒤에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죠.”
“그게 사실이야?”
설화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맞아. 이틀 뒤에 나와 보면 우리가 갖고 있던 물건들은 모두 어디론가 없어졌고, 그 때마다 새로 사주셨었지.”
지윤은 그 당시 일을 떠올리듯 깊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럼 먹을 거는요? 화장실은 어떡하고요?”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에 설화는 이것저것 질문했다.
“먹을 거는 창고에 들어갔을 때 한꺼번에 빵 같은걸 줬었고, 화장실은 지하에도 있었어.”
제일 오래 있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종혁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 때 사람들이 왔었다는 건 어떻게 알죠?”
“그야 물론, 많은 짐들을 여자 혼자 옮겼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가장 최근에 해인이도 있었거든. 해인이가 사람들 발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고. 맞지?”
종혁의 질문에 해인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자기 자식처럼 아끼는 아이들을 왜 지하창고에 가두면서까지 사람들을 부른 것일까. 유 원장이 그토록 무모한 짓을 왜 한 것일까.
“그 창고 무지 더러웠어.”
우진이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어서 표정에 이미 불쾌함의 정도가 드러나 있었다.
“먼지로 가득 쌓여있었고 창문이 유일하게 하나 있었는데 아주 조그맸어. 형광등도 없어서 오직 그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달빛이 들어올 뿐이었다니까.”
그들의 말대로라면 지하창고의 위생 상태는 평소의 깔끔한 유 원장의 성격과 정 반대였다. 설화는 모든 게 의문 투성이었다.
“정말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다들 마음을 단단히 먹어요. 우리는 돌아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예전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할 수도….”
“예전보다 뭐?”
온 몸의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목소리가 설화의 뒤에서 울려 퍼졌다. 모두들 겁에 질려 움츠려있었다.
“너희들, 그만 방에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니? 2주는 길지 않아. 미리미리 짐을 싸놔야지, 안 그래?”
감정이라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녀의 말투에 다들 아연실색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거실에는 다은과 설화 그리고 유 원장만이 남았다.
“다은아. 넌 들어가 보지 않아도 되겠니?”
설화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가 다은에게 웃으며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투는 지나치게 사근사근했기 때문이었다.
“설화랑 같이 들어갈게요. 설화야, 가자.”
설화의 손을 잡아끄는 다은이를 보며 유 원장은 말을 딱딱 끊으며 말했다.
“너만 들어가.”
다은이가 걱정된 설화는 눈짓으로 어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으려하는 다은이를 유 원장은 억지로 방에 밀어 넣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잠깐 설화랑 둘만 있을게. 괜찮지?”
쾅하고 문을 닫은 그녀가 뚜벅 뚜벅 걸어오는 걸 느끼며 설화는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유 원장은 설화의 앞에 앉았다. 그녀의 웃는 얼굴과 마주한 설화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긴장돼서 입이 덜덜 떨렸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니? 나한테도 알려줘.”
말을 하려고 해도 설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얘기하기 싫어? 나한테만 비밀이니?”
유 원장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졌다.
“내가 경고했지. 입단속 잘하라고. 감히 애들한테 날 떠나라고 꼬드긴 거야? 너 나 믿었잖아. 그래놓고서 이제와 이러는 건 우습지 않니? 아님 너 원래 그렇게 변덕이 죽 끓듯 하니? 하긴, 그러니까 부모도 친구도 널 사랑하지 않은 거야. 그래서 혼자 내버려 둔거라고.”
아픈 곳을 건드리는 그녀의 말을 설화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예요?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겠다는 거냐고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넌 두고 가고 싶어. 하지만 어쩌겠니.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니까 내가 데려가는 수밖에.”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유 원장은 자꾸 설화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제발 그만두세요. 이런다고 해서 원장님이 얻는 게 뭐에요. 모든 걸 다 가지신 분이잖아요. 왜 저 사람들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건데요. 혹시, 대리만족 같은 거예요?”
설화의 마지막 말에 유 원장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며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설화의 팔을 잡고 계단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의 팔 힘이 얼마나 센지, 설화는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문을 연 유 원장은 설화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에 등이 쓸리며 피가 나는 것 같았지만 설화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지하창고에 도착한 유 원장은 설화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 질렀다.
“네가 뭘 알아! 뭘 안다고 지껄여?”
설화는 넘어질 때 팔을 다친 듯 통증이 느껴져 왔다.
“대리만족 맞군요. 원장님도 그들처럼 아픈 기억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걸 그들을 통해 느껴보려는 거죠. 제 말이 틀려요?!”
유 원장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불같이 화를 냈다.
“미쳤니? 내가 대리만족 따위를 느끼게?! 겨우 아이들을 상대로 그딴 감정을 느낄 것 같아? 서인종합병원 원장인 이 유 마리아가?!”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어차피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이에요. 당신이 돈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것 말고 우리와 다를 게 뭐가 있는데요?”
설화는 침착하게 유 원장에게 따졌다.
“너 원래 그렇게 건방졌니? 원장님, 원장님 하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알고 보니 너 정말 간사한 아이였구나.”
그녀의 말은 설화를 자꾸만 짓눌렀다.
“내가 적어도 너보다는 많이 배웠어. 공부도 더 많이 했다고. 알아? 겨우 명문대 경영학과 붙었다고 해서 네가 엄청 우쭐 해졌나 본데. 착각 하지 마. 오버하지 말라고!”
“…당신도 다른 어른들과 똑같군요.”
“뭐?”
유 원장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놀라서 숨을 멈춘 채 설화를 바라보았다.
“다른 어른들처럼 공부를 강조하는 게 똑같다고요. 공부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에요. 그런 오만한 잣대로 우리보다 낫다고 판단하지 마시라고요!”
설화는 있는 힘껏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유 원장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서있었다. 설화의 말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 듯 보였다.
“시, 시끄럽게 굴지 말고. 반성이나 하고 있어.”
여전히 얼이 빠진 채로 유 원장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문을 열쇠로 잠근 후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설화는 몸을 일으켜 섰다. 끌려오면서 생긴 상처에 온 몸이 피와 멍투성이로 만신창이가 돼있었다. 지하창고는 우진이 말대로 아주 지저분했다. 이런 저런 잡동사니들이 먼지를 품은 채 가득 쌓여 있었고, 쥐가 지나다니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천장에는 형광등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하나뿐인 작은 창문에서 나오는 달빛만이 창고 안을 비추고 있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기분이 암울해지는 이곳에 여덟 명이나 되는 그들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끔찍해졌다. 유 원장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설화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움직이려고 했지만 질질 끌려온 탓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구석구석 전해오는 통증을 느끼면서 설화는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