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의 고집으로 결국 범증은 팽성으로 떠나 의제를 만났다.
초 의제, 이름은 미심. 옛 초나라의 왕족으로써 항량이 초나라의 부활을 위해 세운 왕이었다. 그는 반진의 상징인 인물임과 동시에 서초패왕 항우의 주공이다. 하지만 항우에 비하면 그 세력은 너무도 보잘 것 없었으며 항우가 송의를 주살하고 거록에서 승리를 거머쥔 후에는 그에게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또 오셨습니까?"
지금 그 의제에게 범증이 항우의 사자로 가서 어서 침현으로 천도를 하라 압박을 넣고 있었다. 침현은 옛 초나라의 땅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지역, 즉 벽지이다. 다시 말해 항우는 의제란 존재가 눈에 거슬리게 되자 자신의 눈에 뜨이지 말라며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몇차례 물리친 의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증은 끝까지 의제에게 항우의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패왕의 뜻이 너무도 확고하고 명령이 추상 같아서 노신이 어찌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하아......"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의제, 미심. 하지만 왕위에 오르며 그는 여러가지 교육을 받아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식견과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때문에 그는 범증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범증은 항우의 사람이나 정도를 아는 인물, 무자비한 항우의 휘하에 어찌 저런 사람이 있는가 의아함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패왕이 진을 멸할 수 있었던 것은 짐을 내세워 군주로 삼아 그것을 명분으로 제후들의 힘을 끌어모았기 때문이오. 짐이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을 때에는 굽실거리더니 지금은 쓸모 없다고 버리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폐.... 폐하......"
"이보시오, 범선생. 그대가 항우의 아부라면 마땅히 항우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어찌 짐에게 달려와 이토록 짐을 곤혹스럽게 한단 말이오! 짐은 침현으로 갈 생각은 추호도 없소!"
의제는 명색이 천자, 즉 황제이다. 황제가 어찌 일개 제후 왕의 압박에 물러설 수 있겠는가. 지금 의제와 항우는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나 마찬가지다. 만일 의제가 굴복한다면 그 관계는 역전이 된다. 명색이 초나라 왕실의 적통이자 중원의 황제인 미심, 어찌 한낱 제후 왕에 불과한 하웅의 압박에 굴복할 수 있겠는가. 그는 예리한 칼처럼 단호하게 거절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항우를 너무도 잘 아는 범증은 이대로 물러갈 수 없었다. 이대로 의제가 계속 버틴다면 결국 부러질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폐하. 한번만 더 생각해 주소서. 노신은 폐하를 위해서 온 것입니다. 패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폐하를 위해서 말입니다. 어찌 그것을 모르십니까?"
"짐을 위해서라면 가서 항우에게 전하시오. 짐은 침현으로 갈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말이오."
이미 항우는 의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패왕에 등극한 순간부터 이미 의제는 그에게 가장 거슬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패왕인 항우. 그러나 그런 항우도 의제가 있는 한 그의 신하에 불과한 법이다. 천하를 재패한 자신이 누군가의 신하라니,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그것도 새파란 애송이한테 굽실거려야 한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제에게 천도를 강요한 것이다. 만일 의제가 자신의 뜻에 따라 침현으로 간다면 그것은 의제가 항우에게 굴복한 일, 그 순간부터 의제는 항우에게 어떠한 존재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의제를 등에 업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일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의제가 끝까지 버틴다면 그건 진나라보다 더한 위협이 된다. 자신이 세운 천하의 질서에 변수가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죽이는 것도 불사해야 할 터, 그것이 항우다. 굴복한다면 한없이 따뜻하지만 끝까지 맞선다면 부러뜨리는 것. 그것이 항우의 방식이다.
어찌 범증이 그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항우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는 의제를 살리고자 침현으로 천도를 하라 간언에 간언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었다.
"폐하. 제발 노신의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 침현으로 가셔야 하옵니다, 폐하!!"
"듣기 싫소! 썩 물러가시오!!"
"폐하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패왕은 강제로라도 폐하를 침현으로 보낼 것입니다! 어찌 그것을 모르십니까?!!"
안타까움에 답답함이 겹쳐지자 범증은 그런 말까지 내뱉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의제의 심기에 불을 지른 것이 되었다. 의제의 눈에 핏발이 서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범증에게 삿대질까지 하게 되었다.
"항우가 아무리 패왕에 등극하였다 해도 감히 짐을 어찌한단 말인가! 일개 왕에 불과한 자가 어찌 감히 황제인 짐을 함부로 오라가라 한단 말인가!!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의제의 입에서 서릿발처럼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지며 무장한 병사들이 들어왔다. 명이 떨어지면 범증을 강제로 끌고 나갈 병사들. 그러자 결국,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함께 물러나고 말았다. 이제 의제는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 늙은 신하는 궁 밖에서 어린 황제에게 절을 올리며 쓸쓸히 팽성을 떠났다.
범증이 의제에게 쫒겨난 소식은 그대로 함양의 항우에게 전달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격노하며 들고있던 죽간을 한손으로 부숴버렸다.
"의제가 팽성을 떠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아부에게 욕을하며 내쫒았다고?!!"
"그.... 그러하옵니다, 패왕."
"한낱 양치기에 불과한 자를 데려다가 왕의 자리에 앉혀주고 지금은 황제로 떠받들어 주고 있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그 더벅머리 애송이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감히 자기 주제를 모르고!!!"
눈에 불길이 뚝뚝 흘러내리고 머리칼은 올올이 곤두섰으며 목과 이마에는 힘줄이 비치는, 분노로 일그러진 항우의 얼굴이 나타났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이제 의제는 그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천하의 패왕에게 대항하는 인물, 더 살려두었다간 장차 그의 천하에 두고두고 큰 해를 끼칠 적 말이다,
살려두어서는 안된다. 아니, 살려둘 수가 없게 되었다. 의제를 죽여 없에야만 천하의 질서가 바로 잡힐 것이고 자신에게 가할 위협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당장 이 서신을 의제에게 전달하라! 아부가 아닌,의제에게 직접 전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패왕!"
그 자리에서 그는 의제에게 직접 서신을 작성하여 사자를 시켜 그것을 전달케 하였다. 그것은 항우의 마지막 경고, 당장 떠나지 않는 다면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하리라는 경고가 담긴 서신이었다.
항우의 성미를 아는 팽성의 사람들은 이 뜻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끝까지 버틴다면 군사를 동원하겠다는 것이겠지. 그렇게 되면 그들은 모두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의제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으려는 그 어린 소년을 말렸다.
"항우의 태도는 이미 신하의 예를 벗어났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폐하께서도 무사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무시한다면 항우는 반드시 군사를 몰고 달려올 것입니다. 폐하, 분하고 억울하지만 일단은 그의 뜻대로 하십시오. 침현이 벽지이긴 하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반드시 후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뜯어말리는 의제의 신하들, 관직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낱 명예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힘은 모두 함양에 있는 항우의 신하들이 다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항우에 맞서고자 해도 그들을 따르는 군사들도 없거니와 설령 있다고 해도 극소수에 불과할 뿐, 항우가 이끄는 정병을 당해내기는 불가능하였다.
더 이상 버텼다간 정말로 목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없으나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충직한 신하들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결국 의제는 눈물을 흘리며 천도를 결정하고 말았다.
"그런가. 그럴 수밖에 없는가......"
"폐하....."
"알겠다...... 침현으로 가자....."
결국 의제는 굴복하였다. 자신을 따르는 몇 안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는 패왕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명이 떨어지자 즉시 천도준비가 이루어지만 여느 나라의 천도 준비와는 너무도 달랐다. 소란스럽고 각종 장비와 물자를 나르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거늘 팽성은 그런 것이 없었다. 간단한 짐 몇 수레와 침현까지 가는 동안 먹을 양식, 그리고 의제가 탈 마차와 그를 따르는 무리 수십명, 그리고 그들을 호위할 병사 수백이 전부였다. 참으로 황제의 천도라 하기엔 여러모로 쓸쓸한 모습이지 아닐 수 없었다. 짐이 얼마 없으니 천도준비는 그날 안으로 끝났고 다음날, 그들은 천도를 시작하였다.
의제가 팽성을 떠나던 날, 백성들은 황궁에서 성문까지 몰려와 눈물로 행렬을 전송하였다. 나이도 어리고 아무런 힘도 없던 황제였으나 그래도 팽성과 그 일대의 민심을 아우르며 나름대로 선정을 배푼 그였다. 그렇기에 백성들은 그를 아비처럼, 혹은 자식처럼 사랑했고 농사를 짓다가도 그의 모습이 보이면 즉시 농기구를 내던지고 그에게 달려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눠주었고 의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들을 어른으로 대접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 그가 팽성을 떠난다니 어찌 슬퍼하는 이가 없을까? 백성들은 그를 눈물로 전송했고 의제 역시 그런 그들을 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부디 행복하십시오. 어디를 가더라도 그대들이 짐에게 보여준 그 따스한 온정,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 안녕히 가소서!! 저희들도 결코 폐하를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의제와 그 일행은 팽성을 떠났다. 그리고 그 소식은 곧바로 항우에게 전달되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서신을 작성하며 사자 한명에게 전해주었다.
"이 서신을 구강왕 영포에게 전하라. 반드시 그대로 이행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패왕의 명령에 사자는 지체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강의 도읍지인 육성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영포를 만났다. 그는 한신과 함께 방안에서 차를 마시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그에 대한 대비책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패왕께서 팽성으로 천도를 결심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함양같이 중요한 땅을 버리고 팽성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는지 솔직히 저는 이해가 안되는군요."
"옛부터 높은 부귀 이루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 입고 밤길 가는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패왕께서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금의환향을 목적으로 그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일개 재상이나 장군이 꾀할 일이지 어찌 대국을 다스리는 왕이 그리한단 말입니까? 이해하기 힘듭니다."
"패왕은 그런 분입니다. 그러니 대왕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지 마시어요. 한왕 유방은 몸안에 능구렁이가 수 백 마리는 들어있는 야심가입니다. 지금은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때가 이르면 마치 멍석을 말아 올리듯 바람처럼 치고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한왕이 움직이면 천하가 다시 요동칠 터, 대왕께서는 그때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어찌 제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이미 전역에 징집령을 내려 정예병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강을 끼고 농지를 개간하라 명을 내렸으니 머잖아 군량도 충분히 마련되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공주님에서 며칠동안 지내느라 나름대로 편해졌는지 이제는 호칭이 아가씨로 바뀌었다. 발전이라면 이 또한 발전이리라.
그동안 한신과 함께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영포,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그나마 장강 연안에 농지를 개간한 것이 어느 정도 진전이 있다는 보고에 그의 얼굴엔 화색이 돌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신 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그때, 항우의 사자가 당도하였다.
"패왕의 사자가 지금 대왕을 뵙고자 합니다."
"패왕의 사자가?"
하필 이럴때 사자가 당도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그로써는 시큰둥하게 사자를 불러들인다.
"들여라!"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사자가 들어왔다.
"대왕을 뵙습니다."
"무슨일로 이 먼 구강까지 왔는가?"
"패왕께서 대왕님께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패왕의 명령서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품속에서 항우가 보낸 죽간을 꺼내어 영포에게 건내주었다. 그러자 영포는 그 죽간을 받아 천천히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 표정이 굳더니 드디어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였다.
"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 대체 패왕께서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 것이냔 말이다!!"
"......"
"대답해라!! 도대체 패왕이 왜 내게 이런 명을 내렸냔 말이다!!"
질그릇이 깨지는 듯한 목소리가 사자를 향해 쏘아졌다. 거기에 경형을 받아 약간 푸른빛을 띄는 그 얼굴이 귀물의 형상처럼 무섭게 일그러지며 당장이라도 그 사자를 찢어죽일 듯, 흉흉한 기운을 내뿜게 되자 그 사자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하며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대왕! 진정하세요. 대체 무슨 명이 내려졌기에 그러시는 것입니까?"
"여기! 이것을 보시오!!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는 한신에게 죽간을 건내주었다. 그러자 그녀 역시 죽간을 읽어내려가다 몸의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만만찮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의제필살(義帝必殺) 이것이 영포에게 내려진 명이다. 구강땅이 침주에 가까운 탓도 있었지만 다른 이로는 당최 믿음이 가지 않기에 그의 오른팔이자 가장 믿음직한 영포에게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명은 영포로써는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의제가 누구인가? 그리고 또 몇살인가? 그런 어린아이를 대려다가 왕에 앉혀 놓고 이용하여 명분을 얻어 대의를 성공시켜놓고 이제는 죽이라니. 대체 이 명을 어찌 이행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런 어린아이를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영포가 어찌 행할 수 있단 말인가?
"패왕께서는 적힌 그대로 구강왕께서 이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자는 떨리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영포에게 말했다.
"말도 안된다!! 어찌 의제를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안된다, 절대 안돼!!"
그때 한신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일단 패왕의 뜻은 알겠습니다. 잠시 물러가 계십시오."
"한신!!"
"그리 하십시오, 대왕. 뭣들 하느냐? 패왕의 사자를 모셔라."
"예."
결국 한신이 시녀들을 불러 사자를 개관으로 안내시켰다. 이대로 두었다간 영포가 완전히 냉정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에 그녀가 나선 것이다.
의제를 죽이라 명을 내린 항우, 그러나 그를 죽일 수 없는 영포, 그런 그를 잠시 진정시킨 한신. 의제의 목숨이 바람앞의 촛불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