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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난세, 그리고 약속
작가 : 어둠속의빛
작품등록일 : 2017.10.30

"그때의 약속, 그런 말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지금 나와 당신은 적, 나의 주인을 위해 나는 당신을 칠 것입니다."
어지러운 천하, 혼돈 속에서 맺어진 약속. 서초 제일의 명장과 한나라의 대장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난세, 그리고 약속 》2회. 때를 기다리는 범, 그리고 연인
작성일 : 17-10-31 20:19     조회 : 303     추천 : 0     분량 : 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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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우는 서초패왕에 등극하자 여러 공신들을 제후에 임명하여 각자 임지로 보냈다. 영포 또한 이때 항우에게 구강왕으로 임명되어 구강땅으로 떠났는데 한신과 함께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맡아 그녀와 함께 구강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는 한신과 모처럼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시녀들을 불러 그녀의 수발을 들게 하여 그녀가 머무르면서 불편함이 없도록 잘 돌보게 하였다.

 

  그 무렵, 한왕으로 임명받은 유방은 삼진땅을 지나 잔도를 건너고 있었다. 본래라면 그들은 관중왕이 되어 함양궁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몸, 그러나 항우의 압박으로 인해 별 수 없이 파촉이라는 벽지로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나 이거야 원! 우리가 먼저 관중에 입성했으니 당연히 패공께서 관중왕이 되셔야 하는 것 아니오?! 그런데 고작 파촉 벽지의 한왕이라니!!"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외침과 함께 커다란 대도를 어깨에 둘러멘 한 장사가 외쳤다.

  그의 이름은 번쾌, 개를 잡는 백정으로 천출이었으나 그 용력은 가히 으뜸이었고 유방군에서 제일가는 용장이었다. 일찍이 그는 유방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었고 거기에 유방의 부인인 여치의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여 매제지간까지 되었다. 따라서 그는 유방과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 그렇기에 그는 유방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제일 먼저 달려나가 싸우는 그런 장수가 되었다.

 

  그 일화가 바로 홍문의 연회이다. 당시 유방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항장과 항백이 검무를 추고 있었고 항장은 검무를 추다 유방을 기습하여 목을 베라는 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이를 눈치챈 항백이 칼을 쥐고 뛰쳐나와 항장을 가로막으며 함께 검무를 추었으나 그는 무용으로는 항장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때문에 유방은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연회장의 유방 측근으로는 장량만이 있었고 그 휘하의 장수들은 모두 병영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기에 유방을 지켜줄 장수는 항장을 가로막고 있는 항백을 제외하고는 단 한명도 없었다.

 

  바로 그때, 유방이 위험하단 소식을 들은 번쾌가 방패 하나만 움켜쥐고 연회장으로 돌진하였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를 가로막았으나 번쾌는 한마리의 멧돼지처럼 그들을 모두 쳐내고 안에 난입하였다. 놀란 항우가 그가 누군지 묻자 장량은 유방의 장수인 번쾌라 답하였고 항우는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술과 고기를 내렸다.

  번쾌는 그자리에서 술과 고기를 몽땅 먹어치우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패공께서는 함양을 함락하고 노공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는 진실입니다. 헌데 노공께선 소인배들의 말만 믿고 패공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고 계시니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져 민심이 노공을 떠나게 될까 두렵습니다."

 

  당시 항우는 노공이라는 작위를 받았기에 노공은 곧 항우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 말에 항우는 유방을 살려주고 한왕에 봉하여 파촉의 한중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때 죽기를 각오하고 일전을 벌였어야 했습니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어디있습니까?!"

 

  이번엔 그 옆에서 기다란 장창을 비껴든 날렵하게 생긴 무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관영, 일찍이 비단파는 상인이었으나 항량이 장한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탕현으로 유방이 철수하자 그때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무용과 기마술이 뛰어나 그 역시 많은 전투에서 활약을 하였다.

 

  "이미 지난 일이오. 한탄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이까? 그리고 항우와 싸웠다면 우린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지금 우리의 힘으로 항우와 싸운다면 승산이 있겠소이까?"

 

  이렇게 말하는 이의 이름은 조참, 유방과 같은 패군 출신으로 그의 거병 초기때부터 함께 활약한 장수이다. 생각이 깊은데다 무용도 갖춘 문무겸장이었다.

 

  "그게 무슨말씀이오! 본래 관중은 우리의 땅이오! 조장군은 회왕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조를 그새 잊으셨소?"

  "내 어찌 그것을 잊었겠소이까? 하지만 번장군, 항우가 순순히 우리에게 관중을 내 줄리도 만무하거니와 우리가 약조만 믿고 나섰다간 항우의 공격을 받을 판이었소."

  "그렇다면 싸웠어야지요! 앉아서 모든것을 잃느니 차라리 싸우는것이 낫지 않소!"

  "싸우면 우리가 과연 항우를 이길 수 있었겠소? 항우의 힘은 우리 모두 알지 않소이까? 만일 싸웠다면 우린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오!"

  "그래도....!!"

 

  어찌 장수들이라고 그것을 알지 못할까? 그래도 그들이 그런 말을 입에 담은 것은 관중왕의 자리에서 쫒겨난것이나 다름 없는 그들의 처지를 한탄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들을 이끄는 유방도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유방, 이름은 유계로 방은 그의 자(字)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유협의 무리들과 어울리며 지내다 장년의 나이에 이르러 사수의 정장자리를 얻게 되었다. 별로 성실하게 일에 임하지는 않았으나 이때 소하와 조참이라는 두 걸출한 인물을 유방이 알게 되었고 이들은 나중에 유방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게 되었다.

 

  아무튼 당시 유방의 허풍은 대단하여 명사로 이름난 여공이라는 사람이 패현에 들어왔었는데 그를 환대하는 연회를 소하가 관리하게 되었다. 워낙 유병한 명사였기에 그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끝이 없었고 결국 소하는 축의금이 1천전 이하인 사람들은 마당에 앉게 하였다. 그때 유방은 '축의1만전야'를 외쳤고 그 소리에 여공은 문밖까지 뛰쳐나가 유방을 환대하며 그를 끌어다 상석에 앉혔다. 소하는 당연히 그것이 허풍인 줄 알았기에 여공에게 알렸으나 그는 유방의 관상을 보고 자신의 딸까지 시집을 보내주었다. 그 딸이 바로 여치였다.

 

  그 후, 유방은 진시황릉 공사에 투입될 인부들을 이끌라는 명을 받아 떠났지만 도중에 대다수가 달아났다. 이에 걱정된 나머지 인부들이 그에게 어찌할찌를 물었으나 그는 듣는둥 마는둥 하며 술을 마시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답답한 그들이 유방을 닥달했으나 그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테니 차라리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아보자며 그냥 드러누웠다. 그 결과, 인부들은 모두 달아나버렸고 그는 세상 모르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인부들이 다시 돌아왔다. 앞에 커다란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앉아 길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방은 느릿느릿 일어나 칼을 쥐고 인부들이 이끄는 대로 가 보니 과연 집채만한 구렁이가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슬쩍 보던 그는 천천히 걸어가 칼을 뽑아들고 단숨에 구렁이의 목을 쳐버렸다. 그 모습에 그곳에 모인 인부들은 감명을 받아 그자리에서 엎드리며 유방의 수하로 들어갔고 그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인근 산자락에 숨었다.

  이 후, 유방은 무리를 이끌고 패현을 얻어 패공이라 불리었으며 수많은 장졸들을 휘하로 얻었다. 그리고 항량의 초군에 들어가 숱한 전투를 치르며 결국 진나라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다. 당연히 관중왕이 되었어야 했지만 항우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파촉이라는 벽지로 내쫒기는 신세가 되긴 하였지만 말이다.

 

  "그렇습니다. 당시 우리는 항우의 적수가 되기엔 한참 모자랐지요. 하지만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항우의 의심을 받을 필요 없이 힘을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방의 옆에서 접이식 부채를 쥐고 머리에 윤건을 쓴 책사가 입을 열었다.

  이 책사의 이름이 바로 장량, 장자방이다. 일찍이 황석공이라는 인물을 만나 태공병법을 익혔고 그 후, 유방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전투에서 책략을 내어 유방이 진나라를 무너뜨리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이가 바로 이 장량이다. 한 예로 요관의 전투에서 철옹성과 같은 요관을 장량은 진군의 긴장감을 잠시 누그러뜨리게 만들어 그 틈에 공격을 가해 무너뜨리자는 전략을 내놓았다. 그러자 그의 말대로 유방은 요관을 지키는 장수에게 뇌물을 주어 그를 방심케 한 후, 샛길을 이용하여 요관을 포위, 사방에서 공격을 가해 철옹성같은 요관을 떨어뜨렸다. 그 뒤로 유방은 파죽지세로 함양을 향해 진격, 마침내 진나라의 왕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의심을 받지 않고 힘을 기른다?"

 

  그 말에 유방이 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파촉지역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항우는 우리에 대한 경계를 풀 터, 이제 우리는 안심하고 힘을 기르면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 파촉에 들어옴으로써 수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촉에 들어왔다고 항우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또 무엇인가?"

  "항우는 시험을 해 본 것입니다. 우리가 순순히 관중을 내주고 파촉 벽지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일전을 벌일 것인지를 말입니다. 만일 후자를 택했다면 항우는 무슨수를 써서든 우리를 죽이고자 했겠지만 전자를 택했으니 파촉 벽지에 몰아넣고 삼진왕들로 하여금, 우리를 감시케 함으로써 끝을 맺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가 얻은 이점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항우는 유방을 파촉에 몰아넣고 자신은 그다지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장량의 말대로 그들은 훗날을 기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파촉은 지형적으로 굉장히 험준한 곳입니다. 이 잔도만 보아도 사람이 쉽게 다닐 수 없는 곳이지요. 따라서 백만대군이 몰려온다고 해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통행이 불편하다보니 많은 간자들이 오갈 수 없으며 설령 온다고 해도 관중으로 통하는 길은 몇군데 뿐이니 그곳만 틀어막는다면 간자들의 통행 또한 어려워 질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우리의 상황을 모를 수밖에 없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이점입니다."

 

  역시 관중에서 파촉으로 들어오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관중과 파촉 사이에는 진령이라는 높고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이 산이 워낙 높고 험한지라 통과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공격을 하는 입장은 엄청난 힘을 들여야 하지만 방어를 하는 입장은 적은 힘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유방은 항우나 삼진의 왕들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힘을 무한정으로 기를 수 있다는 뜻이다.

 

  "셋째, 우리의 병사들은 대부분 관중에서 들어온 병사들이니 장차 우리가 공격을 나서면 그들로써는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격이 됩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굉장히 높아지겠지요. 넷째, 파촉은 겉으로 봐서는 벽지지만 안에는 기름진 평야와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이 많습니다. 농업을 장려하면 풍작을 거둘 수 있는 곳이 바로 파촉이라는 뜻입니다. 이로써 군량의 걱정 또한 덜 수 있지요. 다섯째, 진격로가 관중뿐만이 아닙니다. 수군을 이용하면 장강을 타고 내려가 형초땅 또한 노려볼 만 하지요. 다행히 파촉은 산이 많으니 목재료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배를 만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요. 여섯 째, 항우는 조만간 팽성으로 천도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식이 그에게 당도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리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의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습니다. 일곱 째, 이 모든 것을 항우는 모릅니다."

 

  모든것이 장량의 말 대로다. 아쉽게 관중을 항우에게 내주었지만 어쩌면 오히려 관중에 있을 때 보다 더 큰 이점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렇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자 그때까지만 해도 관중을 빼앗겼다며 투덜거리던 무장들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방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로써는 항우를 당해낼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파촉으로 밀려났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힘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로써 지난날의 굴욕을 씻고 항우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힘을 기를 귀중한 시간과 물자를 얻게 된 것이다. 이점이 자그마치 7개나 되는데 아쉬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쯤되면 오히려 파촉으로 떠나라고 한 항우가 고마울 지경이다.

 

  "장량 군사의 말이 맞다. 이제 우리는 군사의 말대로 그 모든 이점들을 살려 반격의 기회를 얻어야 할 것이다. 알겠는가?"

  "예 전하!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좋다. 어서 남정으로 가자."

 

  그들은 말을 재촉하며 남정으로의 행로를 서둘렀다.

 

  그 무렵, 항우는 범증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당대의 현사로 유방에게 장량이 있다면 항우에게는 범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지략이 뛰어나 항우에게 연전연승, 무적의 패왕이라는 칭호를 얻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현인이었다. 비록 나이는 70이 넘는 노인이었으나 어떻게 건강관리를 하였는지 건장하였고 항우의 존경을 받아 아버지 대신이라는 아부(亞父)라 불리우고 있었으며 구강왕 영포와 함께 항우의 또다른 한 팔이었다.

  그런 그는 항우의 천도를 극구 말리고 있었다.

 

  "패왕, 다시 말하지만 천도는 안됩니다. 패왕이 관중에 남아 계셔야 한왕의 마수로부터 관중을 지킬 수 있습니다. 다른 장수들로는 불가합니다!"

  "아부, 아부께서는 나만이 유방을 막을 수 있다고 하시지만 나는 아니라고 보오. 유방은 일개 졸장부에 불과합니다. 또한 과인이 삼진왕으로 봉한 장한, 사마흔, 동예는 일찍이 진나라에서 이름을 떨치던 명장들이오. 그들로도 유방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작 졸장부에 불과한 유방을 이 내가 두려워해야 한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패왕, 그것이 언제까지고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유방의 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습니다. 장한등도 언제까지나 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방이 힘을 기르는 동안 그들도 힘을 기를 것이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부. 유방은 결코 파촉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속히 천도를 하는 것이 급합니다. 함양은 삼진의 영토이니 당연히 삼진의 왕들을 위해 비워주어야지요, 나는 서초에 속한 팽성을 도읍으로 삼아 그곳에서 천하를 다스릴 것입니다."

 

  이미 항우의 마음은 굳어졌다. 유방은 삼진의 왕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고향인 팽성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그의 뜻, 하기사 말이야 틀린 것도 아니다. 함양은 삼진에 속한 곳이니 삼진왕들의 영토, 그곳을 비워주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결국 범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패왕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이 따라야지요. 하지만 한가지는 약조해 주십시오. 어떤일이 있어도 유방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셔서는 아니되십니다."

  "이를말이겠습니까? 아부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만일 유방이 움직인다면 그때는 이몸이 나서 그를 두동강 내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항우의 다짐을 받은 후, 그는 팽성에 있는 의제를 만나러 떠났다. 그가 떠나자 항우는 내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녀가 다소곳하게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우희, 천하의 절색으로 세상에 다시 없을 미녀였다. 한신도 한신이지만 우희의 미모는 가히 보는 이의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답고 빛이났다. 영웅은 호색이라, 천하의 영웅 항우와 천하의 절색 우희는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우희, 과인이 왔소."

  "......"

 

  항우가 도착하자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그는 신발을 벗고 자리에 들어가 앉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장을 한듯 안한듯 한 뺨과 붉은 빛깔이 은은하게 드는 입술,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가만히 고개를 아래로 숙여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우희를 보고 있는 항우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그녀의 옆에 있다는 것만 하여도 그는 가슴이 설레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우희, 곧 팽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소."

  "......"

  "팽성으로 돌아갈 때는 과인과 함께 나란히 수레에 앉아 함께 돌아갑시다. 그리해 주시겠소?"

 

  그녀는 대답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보일듯 말듯 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그 모습에 항우의 심장은 멎어 버릴 듯 하였으나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왼손을 내밀었다.

 

  "우희, 손을 주시겠소?"

 

  그러자 그녀는 가녀린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오른손을 그녀의 손등에 덮었다.

 

  "범 아부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팽성으로 떠날 것이오. 마침 장인께서도 팽성으로 옮겨 가셨다고 하니 돌아가면 댁에 들립시다. 과인도 오랫만에 장인을 만나고 싶구려. 그대도 친정에 들리는 것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패왕....."

 

  우희의 고맙다는 그 한마디, 그 한마디가 다시 항우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로써는 실로 오랫만에 들리는 것이다. 항량과 함께 강동에서 세력을 키우던 시절, 항우는 그곳에서 오추마와 함께 우희를 만났다. 둘은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고 연정을 키우다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항우는 곧 반진의 깃발을 올리며 군사를 일으켰고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항우는 승리하였고 진나라는 무너졌으며 둘은 곧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진격을 하는 내내 마음 한켠에는 우희를 생각하고 있었던 항우다. 이토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미인을 자신에게 준 장인인데 어찌 효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기회에 그 효를 다하기 위해 그는 장인의 집에 들리기로 한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끌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넓은 가슴은 그녀가 안기기에 충분하였고 그는 나즈막히 속삭였다.

 

  "내 약속하리다. 결코 그대를 슬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가, 이 서초패왕 항우가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대를 지킬 것이고 영원히 그대 하나만 사랑 할 것입니다. 이 약속을 깨게 되면 내 목숨으로 그대에게 사죄를 하리다. 사랑하오 우희."

  "저도 사랑합니다. 나의 낭군, 나의 사랑, 나의 주인, 항우님....."

 

  둘은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되서야 비로소 함께 침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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