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동네에 역시나 허름한 독서실. 이솔은 겨우 5층짜리 건물의 4,5층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독서실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 유람 독서실 -
'여길 다시 오네.'
감회에 젖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이솔은 5층 버튼을 꾹 눌렀다. 중력을 거스르는 힘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낑낑대며 무거운 몸을 들어올렸다.
5층에 도착하자마자 이솔은 자신의 자리가 있던 방으로 향했다. 개인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너무도 그리웠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A4용지, 구석에 놓인 책받침 대, 조명옆 콘센트에 꽂혀있는 휴대폰 충전기,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샤프까지.
'하나도 안변했네. 아니, 변할 리가 없지.'
20년 전만해도 이곳은 그를 숨 막히게 하는 감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다. 저기 보이는 의자에 앉아 브이튜브나 보며 시간을 때우고 싶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평범한 일상.
'언제쯤 가능하려나.'
이솔은 씁쓸하게 웃으며 전공 서적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책을 폄과 동시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지렁이들의 댄스타임!
살짝 어지러움을 느낀 이솔은 그대로 책을 덮어버렸다. 너무 오래 쉬었다. 공부는 나중에!
어쨌든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다.
'화장실이 어디더라?'
이솔은 방에서 나와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변기, 좌변기가 달랑 하나 뿐인 작은 화장실. 독서실 화장실에는 왜 왔냐고?
'그야 이 녀석 때문이지.'
좌변기 옆에 놓인 휴지통을 들어 올리자 보이는 둥그런 원판.
『띠링- 네임드 아이템 어릿광대의 조디악(Zodiac)발견!』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눈앞에 아이템의 정보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어릿광대의 조디악(Zodiac of Clown)(0%)]
등급 : 네임드
구분 : 액세서리
사용조건 : 12개의 공백이 있는 타투를 새긴 자.
물리방어력 : 2000
마법방어력 : 1000
모든 능력치 +100
모든 저항력 +50
물리데미지 +388(힘x2 민첩x1)
마법데미지 +248(정신력x2 민첩x1)
특수스킬 : 모든 아이템 온전히 구현화 가능.
추가옵션 : 쌍자궁에 도플갱어의 손거울 저장.
히든옵션(타투의 모양에 따라) : 신도 감탄한 폭풍간지(정신계 능력 사용시 2배 효과)
[사용조건 충족. 아이템 착용이 가능합니다.]
20년을 동고동락했던 내 파트너님!
[조디악을 착용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조디악을 착용합니다.]
[조디악이 서이솔님에게 귀속됩니다.]
반짝반짝 빛나던 조디악이 이솔의 어깨에 새겨진 타투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둥근 원판에 그려진 황도 12궁의 별자리가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파고들어 똬리를 틀었다.
백양궁, 금우궁, 쌍자궁, 사자궁, 거해궁, 처녀궁, 천평궁, 전갈궁, 인마궁, 마갈궁, 보병궁, 쌍어궁.
이게 무엇인고 하니,
'쌍자궁에 박혀있는 도플갱어의 거울을 이용하면, 어떤 아이템이라도 카피해서 별자리 위치에 그대로 집어넣을 수 있다는 말씀!'
그야말로 사기적인 아이템.
잘만 쓰면 30개도 되지 않는 네임드 아이템을 11개나 가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이솔은 네임드 아이템을 11개 꽉꽉 채워 다녔다.
동료들이 카피하게 해준 것이 7개, 자신이 직접 카피에 성공한 것이 4개.
그뿐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치가 어마어마하다. 데미지면 데미지 방어력이면 방어력.
진정한 템빨의 고수.
'이번에는 히든옵션도 붙었네? 신도 감탄한 폭풍간지? 이름이 뭔 이따구야? 웬만한 중2 저리가라네.'
하지만 이름과 다르게 능력은 가히 압도적이다. 정신계 능력 사용시 2배 효과!
마인드 컨트롤을 즐겨 사용하는 이솔의 입장에서는 아주 유용한 옵션이었다.
12개의 별자리가 제자리를 잡자, 쌍자궁이 위치한 곳에서 은은한 은빛이 흘러나왔다. 이솔은 도플갱어의 거울을 소환해 보았다.
[도플갱어의 손거울(0%)]
등급 : SS
구분 : 액세서리
물리 방어력 : 500
마법 방어력 : 700
마법데미지 +115(정신력x1)
특수 스킬 : 모든 아이템 카피
추가 옵션 : 자신의 모습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준다.(일명 거울효과 없애기)(피로도 회복율 대폭 상승)
그의 손에 구현된 도플갱어의 손거울. 똑같이 생긴 사람의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무늬가 새겨진 것 외에는, 일반적인 손거울과 모양이 비슷하다.
'이 녀석으로 내 얼굴을 보는 날이면 하루 종일 우울하곤 했지.'
피식 웃은 이솔은 소환을 취소하고는, 옷의 어깨부분을 내려 나머지 부분을 확인했다. 아직 아이템이 저장되어있지 않은 별자리들은, 무색으로 잠들어 있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일은 해결했고.'
이솔은 만족스럽게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독서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 * *
"왕! 웡웡!"
"똘똘아!"
집에 도착하니 새하얀 털에 듬직한 몸을 가진 똘똘이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이솔을 맞이했다.
잠시 격한 몸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게 얼마만이냐."
"헥헥."
똘똘이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장난감이 된 삼디다스 슬리퍼를 입에 물고서 놀아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솔은 그런 똘똘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몸의 이곳저곳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는 슬리퍼를 빼앗아 마당 끝으로 던져버렸다.
"웡!"
똘똘이는 발정기에 암컷에게 달려드는 수컷의 스피드를 능가할 정도로 빠르게 슬리퍼를 물고 돌아왔다.
"오랜만에 산책이나 할까?"
"웡웡웡!"
이솔은 똘똘이의 목줄을 채워 집 근처의 공원으로 향했다.
"어머? 와, 예쁘다."
"이름이 뭐에요?"
"크다. 강아지 종이 뭐에요?"
"상근이다. 상근이!"
역시나 인기폭발 똘똘이!(은근히 사람들의 시선을 즐김.) 남녀노소 불문하고 난리다 난리. 사진 찍어도 되냐는 사람들, 어떻게든 한 번 쓰다듬어 보려는 사람들, 비싼 개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 이동이 힘들 지경이다.
겨우겨우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도착하니 시계가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배가 고파진 이솔은 주방으로 향했다. 가스레인지에 위에 놓인 냄비에는 김치찌개가 한가득 담겨있었고, 냉장고에는 각종 반찬들이 쟁여져있었다.
김치찌개를 데우고, 반찬을 식탁에 정갈하게 펼쳐놓은 이솔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10년 만에 어머니가 만드신 집밥을 먹었다.
"크아아! 이 맛이지."
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해치운 이솔이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솔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수많은 역사가 이루어 졌던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침대보다 더 큰 책상이, 먼지를 덮고 따뜻하게 자고 있었다. 벽면에 설치 된 옷걸이에는 츄리닝이 아무렇게나 걸려 눈을 어지럽혔고, 휴지로 가득 찬 휴지통(축농증이 심하다)에서 흘러나오는 퀴퀴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매웠다.
"남자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솔은 침대위로 뛰어들었다. 전기장판을 틀고, 이불을 목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따뜻하다."
이솔은 노곤 노곤한 신체의 아우성을 무시하지 못하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
딩딩 딩디리디리 딩딩딩딩디-
수 없었다.
"아씨. 누구야?"
이솔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모르는 번호다. 잠시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이솔은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따지고 보면 회귀한 후 처음으로 걸려온 전화 아닌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야지.
"여보세요?"
"서이솔씨?"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음성이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던 목소리.
"혹시 초아? 아니면 수아?"
"저와 제 동생을 아시나요?"
전화기를 타고 다소 놀란 듯한 음성이 이솔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솔은 이불을 걷어차 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전화기를 붙잡은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초아구나."
역시나 최후의 10인에 도달했던 류초아. 그리고 필로스 협곡 전투에서 죽어버린 그녀의 쌍둥이 동생 류수아. 둘 모두 이솔에게 있어 너무도 소중한 동료이자 친구였다.
"하하하! 드디어 다시 만났네. 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말해?"
"처음 대화하는 사람에게 반말하는 그쪽이 이상한 것 아닌가요? 저와 제 동생을 알고계시냐고 물었습니다만."
이솔의 심장에 무거운 바위가 '쿵'하고 떨어져 내렸다. 처음 대화하는 사람? 그녀의 말에 이솔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서서히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이 느껴진다.
또다. 장훈 녀석도 자신을 몰라봤다. 그런데 이제는 초아도 자신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장난하지 마. 재미없어. 나 이솔이야. 케페아 늪지대에서 네가 날 구해줬잖아······기억 안나?"
이솔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초아는 카르샤스를 만나기 전 심연의 대공 바알의 함정에 빠진 이솔을 구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때의 악몽이 서서히 이솔의 뇌리에 떠올랐다.
바알의 늪지대에 빠져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웃으며 자신을 위로하던 그녀.
- 울지 마. 금방 다시 볼 거잖아. 솔아.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힘들면 언제든지 회귀버튼을 눌러. 우리는 최선을 다했잖아. 알겠지? 그럼, 잠시만······안녕. -
그녀의 걱정과 애정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음성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제가 그쪽을 구해줬다구요? 케페아 늪지대에서? 이봐요. 상대를 봐가며 사기를 치세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있나본데, 제가 그런 어쭙잖은 사기에 놀아나기에는 지옥을 수도 없이 경험해서요. 친한 척 하면 뭐라도 떨어질 줄 아시나보죠? 한심하네요. 이럴 시간이 아이템이나 구하러 다니세요. 그게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높으니까."
그녀는 다소 과하게 이솔을 쏘아붙였다. 케페아 늪지대에서의 일은 그녀에게도 좋은 기억이 아닐 것이다. 온몸이 녹아내려 죽음을 경험을 한 곳인데, 좋은 기억일리 없지.
하지만 이건 너무했다. 고구마 백 개쯤 목구멍으로 쑤셔 넣은 것 같은 갑갑함이 느껴졌다. 뭔가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둥보다도 크게 들리는 그녀의 한숨 소리가 이솔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하아. 제가 좀 흥분했네요. 죄송해요. 어쨌든, 이렇게 전화를 드린 이유는 회귀자 협회 한국지부가 만들어졌어요. 내일까지 오셔서 등록해주셔야 해요. 회귀자 수칙은 알고 계시죠?"
"······수아. 수아도 나를 모르는 거야?"
"이 사람이 정말 끝까지! 류수아! 이리와 봐!"
초아가 수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수아는 나를 알고 있을 거야. 훈이랑 초아는 회귀중에 무언가 착오가 일어난 게 분명해!'
이솔은 마음으로 빌었다. 이미 두 사람에게 외면당했다. 수아마저 자신을 모른다면, 멘탈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전화 바꿨습니다. 누구세요?"
"수아야! 나야. 이솔. 나 기억하지?"
"이솔? 그게 누구죠?"
수아의 말은 이솔의 가슴에 쐐기를 박았다. 그녀도 자신을 모른다 말하고 있었다. 몸에 힘이 쫙 빠졌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뭐야? 언니. 이 사람 누구야?"
"이리 줘. 서이솔씨? 서이솔씨?"
이솔의 멘탈이 작별을 고했다. 안녕. 즐거웠어 멘탈아. 초아의 부름에도 이솔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이 한 가지 의문으로 가득 채워졌다.
'설마 회귀자 전부가 나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봐요. 대답을 해요!"
"······장크스, 아즈리엘, 로시안, 사비르, 카이틀린, 바인! 모두가, 나를 몰라?"
"하. 정말 답이 없네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내일까지 오셔서 회귀자 등록 하세요. 이만 끊을게요."
"자, 잠시······."
뚜우-
전화가 끊어졌다. 이솔은 멍한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너무 억울했다. 그 고생을 해가며 카르샤스를 잡은 이유가 무엇인데! 다시 돌아오기 싫은 마음을 부여잡고 회귀버튼을 누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데!
"하하······."
이솔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허탈했다. 다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지독한 외로움이 엄습했다.
"아니지. 살아있다는 게 중요해. 그리고, 아직 3명뿐이야. 나머지는 나를 알고 있을 수도 있어."
이솔은 애써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렸다. 이정도로 좌절하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으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신다.
"하핫! 그래 어머니, 아버지가 아시면 서운해 하시겠는 걸!"
이솔의 멘탈은 쉽게 집을 나가버리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잘 돌아온다. 그것이 이솔의 가장 큰 장점이자 자랑! 낙천대마왕의 긍지아니겠는가!(퍽이나)
띵-
이솔이 혼자 으쌰으쌰하고 있을 때, 한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류초아 입니다. 장소를 깜빡하고 알려드리지 않았네요. 의정부에 위치한 현다이 호텔로 오세요. 그리고! 장크스, 아즈리엘, 로시안, 사비르, 카이틀린, 바인. 모두가 서이솔씨를 모른 다네요. 혹시나 허튼 생각 하실까봐서요. 내일 잊지 마세요.]
이번에는 멘탈이 꽤 오랜 시간 집을 나가있을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든 회귀자, 아니 적어도 최후의 10인은 자신을 잊은 모양이다.
"이게 뭔 일이야? 나를 모른다고? 아, 몰라. 일단 자자. 멘탈 수습이 안 된다."
이솔은 다시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 쓰고는, 잠들어버렸다. 너무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