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반목(反目) - ③
그때 참다못한 지인이 진절머리를 내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들 해요, 이제. 애초에 그게 누구든 딴 사람을 죽여서 내가 살려고 했던 그 자체가 잘못된 거였어.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는 거야.”
그러자 이번엔 민철이 발끈했다.
“벌이라니, 이게 어째서 벌이야?”
지인은 자기 말을 이해 못하는 민철이 답답했다.
“내 동생은 애인을 죽였고, 난 그걸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어. 그게 도대체 벌이 아니면 뭔데?”
“웃기지마! 지혜 씬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연한 선택을 했을 뿐이야!”
“그렇지 않아! 그건 절대 당연한 게 아니라고!”
지인은 동생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감정이 민철에게 계속 부정 당하자 금방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바람에 뭔가를 더 반박하려던 민철의 기세가 한풀 꺾여버렸다. 본회의장엔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지인이 돌연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더니 민철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당신도 지금 당장 멈추지 않으면, 나랑 내 동생처럼 언젠간 죗값을 치르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 이제 다 그만 두고 우리 같이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네?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순간 민철이 느낀 건 ‘지인의 말에 덜컥 넘어가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었다.
“허, 허튼 수작 하지 마! 다른 길 따윈 없어!”
하지만 지인은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민철을 궁지로 몰아갔다.
“혹시 두려워서 그래요?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이 발견되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책임지라고 할까봐? 괜히 당신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만 죽였다고 할까봐? 그런 거예요?”
민철은 아연실색했다.
“우, 웃기지마. 내가 왜 …….”
그런데 문득 느껴진 주변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았다. 하나같이 안색이 굳어진 게 지인의 말에 적잖이 동요된 눈치였다. 다급해진 민철은 허둥거리며 지인을 협박했다.
“너 죽고 싶어? 우릴 방해하면 그 귀신이 널 가만 둘 것 같아? 아까 전경들 당하는 거 못 봤어?”
하지만 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그 모습은 언뜻 의연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오히려 그런 지인을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어야만 했던 민철 쪽이 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신앙이 너무 깊어서 의연한 건지 아니면 원체 꽉 막힌 성격이어서 그런 건지, 민철은 이러는 지인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슬슬 두려운 마음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선 어떻게든 지인을 꺾어야 했지만, 민철은 마음만 급할 뿐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왜? 내 말이 틀린 것 같아?”
당연히 민철은 그 이상 얘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도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래놓고는 오히려 자기가 더 당황이 된 나머지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지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 즉시 지혜에게 달려들어 뒤에서 그녀의 목을 팔로 확 끌어안았다. 지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부림을 쳤다.
“너 뭐야? 이거 안 놔?”
하지만 민철은 저항하는 지혜에겐 아랑곳 않고 곧바로 지인을 향해 소리쳤다.
“아까 승희 씨한테서 당신이랑 동원 씨가 승호 형을 숨겨뒀다는 걸 들었어! 당장 그곳이 어딘지 말해! 안 그럼 그 애가 나타나 당신을 죽일 거야! 날 막아서고 의원을 감춘 죗값으로 말야! 그러니까 어서 말해!”
그러나 지인은 완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만 하고 어서 지혤 풀어줘!”
하지만 민철은 한술 더 떠서 품에서 단도를 꺼내 보란 듯이 지혜의 목에다 겨누었다. 그것은 아까 자정 녘에 예배당에서 손에 피를 낼 때 썼던 것과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이봐, 당신이 아까 지혜 씨 선택이 당연한 게 아니라 그랬지? 그럼 당신이 직접 한 번 보여줘 봐. 도대체 애인과 혈육 중에 어느 쪽을 택해야 당연한 건지 말이야. 흐, 흐흐 …….”
민철은 그러면서 마치 성격이상자라도 돼버린 것처럼 이상한 표정으로 히죽거렸다. 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라리 날 죽여! 그리고 지혜는 놔줘!”
지혜는 화들짝 놀라 지인에게 소리쳤다.
“언니! 미쳤어? 언니가 왜 죽어?”
이어 민철에게도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차라리 그냥 날 죽여!”
그러나 민철은 들은 척도 안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지인뿐이었다.
“흥, 그럴 순 없지. 이봐, 지인 씨. 지혜 씨도 자기가 죽는 걸로 애인과 언니를 동시에 살릴 수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정말 고뇌에 찬 심정으로 마지막에 언니를 택한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도 그 고통을 지금 느껴봐! 그래서 지혜 씨가, 또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해 보라고!”
그때 보다 못한 승희가 끼어들었다.
“언니, 그냥 이해한다고 해 버려요! 안 그럼 저 사람 진짜 지혜 언니를 죽일 지도 몰라요!”
그러나 지인은 마치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민철은 승희를 비웃었다.
“어쩌나? 지인 씨는 두 사람 목숨보다 자기 자존심이 더 중요한가본데?”
승희는 발끈했다.
“그럴 리가 없어! 언니는 두 사람 모두 포기 안하려고 그러는 것뿐이야!”
그러면서 지인에게 물었다.
“언니, 그렇지?”
그러나 지인은 이번에도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승희는 속이 탔다.
“언니!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민철은 지인과 승희가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맘에 들었다.
“이거 어쩌나? 지인 씨는 그런 게 아닌 가 본데? 어때, 이제 당신도 불안하지? 지인 씨도 지혜 씨처럼 애인을 버리고 덜컥 혈육을 선택해 버릴까봐 말이야.”
“그렇지 않아! 난 지인 언니를 믿어! 언닌 애인이 죽는 걸 보고만 있을 그런 사람이 아냐!”
그러자 민철은 마침 잘 걸렸다는 듯이 승희를 몰아세웠다.
“그래? 승희 씬 참 이상하네? 아까 지혜 씨보곤 왜 언니 대신 애인을 죽였냐고 뭐라 하더니, 이젠 지인 씨보고 애인 대신 막 동생을 죽이라 그러네? 그게 당신이 학현 씨를 비난할 때 말했던 그 잘난 ‘양심’의 실첸가보지? 응?”
“그, 그건 …….”
승희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편 애인까지 버려가며 지인을 선택했던 지혜는 승호 때문에 자신을 선택하는 걸 망설이고 있는 지인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언니! 말해 버려! 왜 못해? 나보다 승호 오빠가 더 소중해? 그런 거야?”
그러나 지인은 되레 지혜의 눈을 피해버렸다.
“언니……?”
지혜는 지인에게 외면당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더니 돌연 승희를 향해 분통을 터트렸다.
“야! 유승희! 니네 오빠 어딨어? 빨리 말 안 해?”
하지만 승희가 그걸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역시 지인처럼 지혜의 눈을 피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민철이 지인을 다그쳤다.
“이봐, 김지인 씨! 얼른 선택 해! 나도 이제 더 이상 못 기다려! 아, 혹시 계속 버티다 보면 하나님이라도 나타나서 구해줄까 봐 그러는 거야? 정신 차려! 지금 이 곳에서 우리 생사를 틀어쥐고 있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고! 귀신들이란 말이야!”
그러나 지인은 얼굴에는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입은 여전히 꾹 다물고 있었다. 민철은 슬슬 조바심이 났다.
“이봐. 당신이 계속 아무 말 않고 버티면, 지혜 씨도 내 손에 죽고 당신도 귀신한테 죽어. 그리고 결국에는 승호 형도 귀신한테 죽던 사람들한테 죽던 죽을 거라고. 하지만 당신이 승호 형이 있는 곳만 말하면, 최소한 당신하고 지혜 씬 살 수 있어. 어차피 애인이란 건 헤어지기도 하고 또 생기기도 하고 그러는 거잖아? 안 그래?”
민철의 말은 누가 들어도 솔깃할 만했다. 승희조차 지인이 민철의 말에 넘어가 버릴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지인은 별 반응이 없었다. 초조해진 쪽은 오히려 민철이었다.
“에이씨, 당신 왜 이렇게 지독해? 끝까지 버틴다 이거지? 좋아, 그럼 나도 이제 못 기다려!”
그러면서 단도를 쥔 손을 높이 쳐들었다.
“김지혜! 죽어!”
지인과 동원은 깜짝 놀라 동시에 다급히 소리쳤고, 승희는 차마 그 광경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지혜는 속으로 언니를 원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그만 둬!”
“꺄악!”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