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못했던 것.
내지 못했던 용기.
그건 바로,
‘놈들에게 저항하려 했던 의지.’
밟히고 싶어서 밟힌 게 아니었다.
죽고 싶어서 죽은 게 아니었다.
약해서, 그것도 그게 처절히 느껴질 정도로 매우 약해서.
나서봐야 죽을 거란 걸 알기에 무기력했었다.
지금도 그 무게감이 두 어깨를 눌러오고 있었다.
[ 주변을 잘 뒤져보라고 당신에게 충고함. ]
하지만 이곳은 시련.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죽고 싶더라도 결국 시련을 이겨낼 방법이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다.
물론, 룰 브레이커도 도움이 됐다.
‘찾았다.’
도시를 둘러싼 몬스터들의 시선을 피해 겨우 도착했다.
정말 과거와 모든 게 완벽히 일치했다면 목숨이 백 개였더라도 부족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시련이기 때문인지, 몬스터들이 조금 약화되어 등장했다.
아슬아슬했던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가까스로 오는 데에 성공했다.
[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함. ]
최하급 도시, ‘나르옷’의 유일한 대저택.
기득권층에게 돈을 주고 영주의 직위에 오른 마약상 아리엘(Ariel)의 집.
지금의 몸으로는 아무리 약화 된 몬스터들이라도 한, 둘밖에 상대하지 못한다.
주변을 잘 뒤져보라는 말.
필시 이런 곳을 잘 찾아보라는 조언이리라.
반격의 열쇠는 여기부터다.
‘비교적 시체가 덜 썩었다.’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인간과 몬스터들의 사체.
사람들이 대저택으로 몰렸던 것인지, 사체들의 상태가 다른 것들에 비하면 조금이나마 양호했다.
생존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유용한 물건을 찾을 수 있을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겨우 나르옷의 전력으로 몬스터들을 죽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침착하게, 조심히 주변을 살피며 저택으로 들어간다.
[ 몬스터가 보임, 오른 쪽으로 도는 걸 추천함. ]
네비게이터보다도 좋은 룰 브레이커의 조언을 따라서.
때로는 기습해서 몬스터를 물리치며, 때로는 피해가며 점점 내부로 진입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이는 사체들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죽은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많아 봐야 며칠, 짧으면 이틀 정도.
이대로 가다가는 생존자가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 또한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훨씬 나았으므로.
물론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긴 하다만.
[ 맨 끝의 문 안에 누군가 있는 것으로 보임. ]
계속해서 들어와 결국에는 3층, 아리엘의 집무실 근처까지 왔다.
이제 주변에는 정말로 최근에 죽는 사체들밖에 없어,
피가 굳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사체들도 존재할 정도였다.
‘대체 누구한테 죽은 거지?’
몬스터들의 사체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그 양이 너무 적었다.
그에 비해 인간의 사체는 너무나도 많았다.
긴장하며 집무실의 문을 여는 순간.
“생존자..인가? 용케도 살았군. 대단해, 하하. 내 박수쳐 줌세.”
저택의 주인, 아리엘이 있었다.
한쪽 눈은 감고 있었고, 다른 쪽 눈은 뜨고는 있으나 폐인처럼 멍하게만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하반신은 거의 전체가 뜯겨나가 있었다.
나르옷의 최강자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침착하게 말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마약을 투여한 건가?’
그가 주사기를 자기 몸에 꽂아넣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마약 판매상의 집에 정상적인 진통제가 주사기에 담겨 있을 리는 없다.
마약을 판매하지만, 정작 자신은 마약을 거부하던 사내가 결국은 고통에 굴복했다.
그래서인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을 죽인 게 누굽니까?”
“괴물.”
“괴물이라면?”
푸하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아리엘은 혼자서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숨을 한번 고르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10초 후면 알 수 있을 걸세.”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놈은 인간을 아껴서, 주기적으로 사냥한다네. 몬스터가 얼마 없었지? 다 녀석의 영역이라서 그런 걸세.”
무슨.
던전 속의 몬스터들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침공’을 하는 몬스터들은 영역 따위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영역을 굳이 따진다?
“왔군.”
생각을 길게 하지 못한다.
황급히 오면서 주운 바스타드 소드로 뒤를 돌며 날아오는 공격을 막았다.
뒤로 조금 밀려난다.
‘미친, 힘이 이렇게나 강하다고?’
나르옷은 결국 도시들 중 최고로 약한 곳.
그 얘기는 이곳을 공격하는 몬스터들도 그 정도 수준이란 말이다.
거기에 약화까지 되었으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 일격을 받기 전까지는.
[ 크릉. ]
“블랙우드 타이거일세. 이 정도면 괴물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되지 않겠는가?”
코앞에 몬스터가 다가왔음에도 남의 일인 듯 태연히 설명하는 아리엘.
그러나 이 몬스터의 정체는 알 수 있었다.
블랙우드 타이거.
‘세피로트 최전방에서나 나온다던 몬스터 아니야?’
이런 몬스터라면 굳이 나르옷까지 올 일이 없다.
최전방의 도시에 있어도 부족함이 없는 몬스터.
투쟁을 즐기는 성향의 몬스터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블랙우드 타이거는 달랐다.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걸 즐기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약점 같은 건 없습니까?”
“모르네, 그런 건. 낄낄.”
아리엘에게 힌트라도 얻으려고 했지만, 애초에 약쟁이를 믿은 게 잘못.
차분하게 블랙타이거를 바라본다.
이유가 없는 원인은 없다.
분명 다른 블랙타이거와 다른 이유가 있을 터.
‘세 번 정도가 한계, 그 이후에는 무조건 도망친다’
한 번 막았을 뿐인데도 손이 저릿저릿하다.
흘리거나, 최선을 다해서 막는다고 해도 세 번이 한계.
그 안에 무언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은 한 번.
쾅, 역시나 손이 아파온다.
하지만 블랙우드 타이거는 그저 유흥을 즐기는듯한 모습이다.
“무언가 쓸만한 아이템이라도?”
“이미 다 써버렸지. 그런 걸 다 처맞아도 죽지를 않더군.”
역시나 쓸모없다.
슬슬 자리를 떠야하나,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한다.
“다리가 없으니 울적하구먼.”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계십시오.”
“아아, 서재까지만 도망갔어도 성수로 회복했을 텐데.”
성수로 다리를 회복시킨다?
“성수가 있습니까?”
“그러네, 사지가 잘려도 재생할 수 있게 엘릭서에 필적한다는 최고급으로 사 왔었는데…”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내 마음이지.”
그 와중에도 느긋하게 공격해오는 블랙우드 타이거.
막으면서 대화하느라 미칠 것처럼 힘들었다.
“서재에 가면 아무나 열 수 있습니까?”
“아닐세, 당연히 나만 꺼낼 수 있게 만들어 두지 않았겠는가. 후후.”
아리엘이 말을 끝내자마자, 검을 블랙우드 타이거에게 던졌다.
당연하게도 잠시나마 틈이 생긴다.
그 틈에 아리엘을 업고선 밖으로 뛰쳐나왔다.
순간 버리고 도망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시간을 끌기를 잘했다.
“서재라면 1층 맨 오른쪽의?”
“잘 알고 있군.”
속도라면 블랙우드 타이거가 위지만, 지능으로는 이쪽이 우위다.
돌진을 유인해서 벽에 처박거나, 복잡하게 움직이거나 좁은 길로 들어가 우회하게 만든다.
온갖 갖은 수를 다 동원하며 도망쳐도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나자, 어떻게든 서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디 있습니까?”
황급히 서재로 들어오며 문을 막아두었지만 그 뿐.
블랙우드 타이거의 파괴력이라면 충분히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올 수 있었다.
“저기 책상에, 세 번째 서랍.”
아리엘이 말한 위치를 뒤져보자 작은 상자가 하나 나왔다.
열려고 해도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있었는지 열리지 않았다.
아리엘에게 맡겨 상자를 열게 시키자, 떨리는 손으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었다.
“자, 이제 넘겨 주세요.”
“하지만 내 다리를 고치려고 산 건데.”
“다리 있는 개죽음보단 다리 없는 생존이 낫습니다.”
“그건 그렇지.”
평상시의 냉철한 아리엘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마약 때문에 사고를 오래 잇지 못하는지, 순순히 나에게 성수를 넘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문은 굉음을 내며 박살 나려 하고 있었다.
“와라!”
성수의 마개를 뽑고선 대기한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제는 운명에 맡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