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r o lo gue.
00-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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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요. "
" 네? "
" 저를 사랑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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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따르릉
오래되었지만, 익숙하게 항상 자리를 지키며 침대 옆 선반에 놓여진 알람시계가 매일 6시 30분에 바람을 깨워준다.
별 다를것 없이, 어제와 똑같이. 바람은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거실에 나와본다. 텅 빈 집안이란걸 알지만 왠지 그녀가 앉아있을 것만 같아, 여느때와 다름없이 저를 보며 해맑게 웃어줄것 같아서, 바람은 항상 미련을 놓지 못하며 다시 방안 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였다. 오늘도 그냥 그저 그렇게. 제발 어느 특별한 일 하나 없기를. 모든게 무사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며 눈을 잠깐 감았지만, 역시. 하늘도 자신편은 아니였다는걸 알아차렸다. 눈을 감자마자 거센 빗소리와 시끄러운 번개소리가 바람의 귀를 자극했다. 바람은 한숨을 푹 쉬곤, 다시 눈을 뜨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게 딱 지금 자신의 모습같아
바람은 픽, 웃어보였다.
"등신. 혼자 뭐하냐."
바람은 옷장에서 매일 입던 검은색 정장대신 편한 후드티를 꺼내 입었다. 바지는 덤으로 찢청을 꺼내입었고.
딱 보면 20대 초반같아 보이는 옷차림에 그는 거울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지만, 갈아입을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비를 맞고 싶어, 현관문 옆에 널부러져있던 분위기에는 어울리지않는 샛노랑 색깔의 우산을 챙기려다 말았다.
후드티에 달려있던 모자를 쓰고, 천천히 걷다보니 시덥잖게 드는 생각들이 많아졌다. 아직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이 없었지만, 다들 하나같이 바쁘다는 티를 내며 자신을 지나갔다. 기분도 꿀꿀하게 비는 오고, 사람들은 그에 쫓기며 살아가고. 더 이상의 여유따윈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보며, 바람은 슬그머니 후드티에 달려있던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이어폰을 찾아 두 귀를 막았다. 그래도, 좀 분위기 있게. 무드있는 척을 하고 싶어져, Rain 노래파일을 찾아 눌렀다. 그러고 나선, 이 날씨에 어울리는 선곡을 하곤 만족해하며, 앞에 보이는 버스정류장 쪽으로 뛰어갔다. 의자에 앉아서 몇분을 멍때릴 때 쯤, 제 옆으로 샛노란 우산을 쓴, 교복을 빼입은 여학생이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왔다. 여학생의 노란색 우산을 보니, 바람은 제 집에 방치되어있던 노란색 우산을 떠올렸다. 푸흐, 내가 저거 썼으면 큰일날뻔했네. 바람이 우산을 보며 입꼬리를 옅게 올리며 웃고있었을 때,
때마침 우산을 접던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정적. 그 여학생은 바람의 눈을 피하지 않았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바람 또한 그랬다. 그렇게 몇초가 흘렀을 즈음, 바람은 여학생의 눈에서, 교복 마이. 정확히 말하자면, 명찰쪽으로 눈을 가져갔다.
박재인.
남자같은 이름이네.
" 저기요 아저씨."
난데없는 여학생의 부름에 바람은 두 귀를 막고 있던 이어폰을 빼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저요?"
" 네. 그쪽이요."
" 무슨일이시죠? "
" 방금 제 명찰보고 남자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죠?"
"...예?"
바람은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말투에 당황하며 벙찌고 있자, 여학생은 우산을 탈탈 털며 바람의 옆으로 와 앉았다.
" 다 아는데. 발뺌 안해도 되요."
여학생이 해맑게 웃으며 바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바람은 생각했다. 웃을때 접히는 눈이 예쁘다고. 너무 뜬금없는 생각이였지만, 바람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 여학생은 너무나도 딱이였던, 바람의 취향인 얼굴이였다.
"아저씨!"
"..아,"
너무 멍때리고 있었던건지 그 여학생이 제 얼굴에 가까이 온줄도 몰랐던 바람은, 제 얼굴을 뒤쪽으로 빼 여학생과의 거리를 뒀다.
"저기요."
"...네?"
"저랑 사귈래요? "
방금까지 저를 아저씨라 부르것도 모자라, 만난지 10분 채 안되었는데 태연하게 저를 보며 말을 하는 여학생을 보자니, 바람은 왠지모르게 화가 났다.
" 그 말, 함부로 내뱉지마요. 쉽게 말할수 있는것도 아니니까. 교복입고 와서 뭐, 원조교제라도 해보겠다 이건가요?"
"푸흐,"
제 딴에는 나름 진지하게 말한건데, 그쪽에서 웃어버리니, 바람은 어찌할바 몰라하며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아저씨가 맘에 들어서요. 그럼 쉽게 하는거 별로면, 뭐 차차 알아가면서 사귈까요 그럼?"
"네?"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전혀 아닌데. 바람이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여학생에게 뭐라 말 하려 했지만, 여학생은 다시 우산을 피며 말했다.
그럼, 내일 또 만나요 아저씨.
여학생이 다시 한번 예쁜 웃음을 지어보곤, 바람에게 자신의 우산을 넘겨줬다.
"..이걸 왜,"
"잘생긴 아저씨! 내일봐요!"
그렇게 제게 우산을 남겨두고 간 여학생을 뒷모습이, 집에 돌아온 후에도, 아른거렸다.
"내일, 만날수 있을까."
바람이 혼잣말을 하며 윗옷을 벗고는 침대에 누웠다. 아직도 그 살에 파묻힌 매력적인 두눈이 바람의 머릿속에서 잊혀지질 않았다. 그렇게 뒹굴뒹굴 거리다, 떠올리다, 쓸데없는 망상을 하다, 집에 달려있는 커튼을 다 친 뒤, 이불 밑에서 잠을 청했다.
분명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였지만, 그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빨리 자고, 그 다음날, 그 아이를 만나야하니까.
아직 비가 내리는 바깥공기와 어우러져, 현관문 앞에 놓여있던 두 샛노랑 우산 중 하나에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왠지, 느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