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만 오르면 발목이 아프지 않는게 참 신기했다. 물론 춤을 추고 내려오면 두 배는 더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파랑은 좋았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출 때면 스테이지 위에 사람은 없고 춤만 존재했다. 그렇게 영혼이 날아가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몸에 음악이 전류처럼 흐르는 상태를 그는 무척이나 사랑했다. 특히 모자를 쓰면 더 잘 했다. 자신을 가려주는 것 같아 모자의 구속은 그를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 그런 사람이 또 한사람 그곳에 있었다. 영혼은 날아가버리고 술기운만 남은 한 여자가 있었으니...
"아...오빠아! 힝...댄서 오빠들 완전 죽인다아..."
한껏 꼬부라진 혀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대며 말을 거는 여자였다. 마치 아기동자를 접신한 듯 과한 애교가 듣는 이의 미간을 절로 찡그러지게 했다. 파랑이 마지막 곡을 추고 있을 즈음 그녀가 스테이지 가까이로 왔다. 웬만해선 객석에 시선을 두지 않는 그였다.
"와, 거기 춤 잘 추는 오빠, 이거 선물!"
하며 그녀가 무언가를 던졌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무대 중앙까지 그것이 올라와 안착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파랑이 그것을 밟고 넘어졌다.
"으악!"
그 미끄덩한 노란 괴물의 정체는 바로 바나나였다. 다친 발목이 욱신거렸다. 무대에서 통증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춤의 마취가 풀린 것이다. 집중을 놓쳤다.
"우하핫, 넘어졌다!"
그녀는 더 신이 나 웃었다. 화가 난 파랑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 사이 그녀가 또 무언가를 던졌다. 이번엔 그의 이마에 적중했다.
"아!"
그것은 덜 익은 듯 단단한 금귤이었다. 파랑은 골프공이라도 날라온 줄 알았다. 이마를 짚고 있는 그의 귀에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와! 이번에도 적중했네! 어떻게 움직이는데 다 맞출 수가 있지?"
그녀의 말에 그는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의 성전인 무대에서 예배나 다름없는 의식을 치르는 그에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군중 속에서 목소리를 찾기 위해 그는 살기를 품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어떤 놈이야? 이런 짓을 하는 게?"
그런데 티 없이 해맑게 고개가 넘어가도록 웃는 그녀는 다름 아닌 로사였다. 훅 파인 나시 탑 속 터질 듯한 가슴이 그녀의 웃음에 옷 틈으로 들락날락 요동쳤다. 주변 남자들이 흘끗거리다 못해 대놓고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사는 파랑을 알아보지 못했다.
"...로사샘?"
이미 무대는 망쳐버렸다. 디제이는 이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바로 다음 음악을 틀어 그들을 백스테이지로 몰았다. 취객의 난동에 어떤 이들은 그녀를 향해 야유를 부었다. 하지만 이미 취한 그녀는 그런 비난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남자들은 그녀를 흥미롭게 쳐다봤고 여자들은 노려봤다. 어찌됐건 작은 소동으로 그 일은 무마되었다. 그녀가 우락부락한 남자였다면 경호원들이 이미 손을 봤겠지만 그녀는 예쁘고 육감적인 외모로 수질 향상에 기여한 바가 높아 업소측에서도 그냥 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파랑이 홀 쪽으로 나왔다. 로사 주변에는 남자 늑대들이 득시글거렸다. 그틈을 비집고 들어가 로사에게 그가 다가갔다.
"로사샘!"
그녀는 듣지 못했다.
"로사샘!, 로사샘!"
자기 이름을 잊은 듯 했다.
"야, 장로사!"
"에? 누가 내 이름을? 어? 파랑씨!"
"반말하니까 알아듣네. 여기선 샘 아닌 거에요?"
"오, 언제 왔어요? 아까 봤어요? 내가 무대에 춤추던 모자 쓴 남자한테 반했잖아요. 그래서 줄 건 없고 선물을 던졌는데 넘어졌지 뭐에요? 으하핫."
무대 위에 있는 그를 못 알아본 게 분명했다. 그걸 선물이라고 던진 거라니 일단 농락은 아니라 믿기로 했다. 천진난만한 눈으로 말하고 있으니 거짓이어도 속아주는 걸로. 게다가 반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 그 남자 팬하려고요. 그런데 이름도 모르네? 같이 춤 한 번 추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래요?"
"어쩜 그렇게 신들린 사람처럼 춤 출 수가 있지? 미친 사람처럼...푸핫, 그 놈 미친 놈이야."
"..."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오늘 참 여러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드는 여자였다. 뭐, 극찬으로 여기기로 했다. 춤에 미쳤다는 건 칭찬일 것이다. 과일 투척도 일종의 조공일 것이고.
그러고 있는데 섹시 댄스 배틀이 열렸다. 3등까지 상금과 상품이 주어지는 대회였다. 말이 댄스 배틀이지 많이 벗을수록 1등이 수여되는 스트립쇼나 다름이 없었다.
"우와 1등은 노트북이래요? 와, 나 컴퓨터 고장났는데? 어? 게다가 저건 내가 쓰던 거랑 같은 거네?"
파랑은 이 업소의 사회자를 잘 알기 때문에 어떤 스타일이 1등을 타는지 잘 알았다. 첫째도 퇴폐적, 둘째도 퇴폐적, 셋째도 퇴폐적이어야 했다. 더불어 사람들의 환호가 크면 그걸로 끝이었다.
"에이, 좋은 꼴 못 봐요. 그리고 저거 이제 구형인데요, 뭐."
"힝...갖고 싶다."
그녀의 콧소리에 그는 머뭇했다.
"샘, 춤 좀 춰요?"
하지만 그가 줄곧 관찰한 그녀의 춤은 실상 몸부림에 가까웠다. 절대 순위권 안에 들 수 있는 춤사위가 아니었다.
"포기하고 그냥 재밌게 놀다 가세요."
"나, 나갈 거에요!"
"네? 저 대회를요?"
"네, 뭐 안 되면 좀 벗지 뭐!"
"헐...이 샘 큰일 날 사람이네. 그러다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어요. 이런 공공장소에서..."
그런데 왠지 지금 술도 달아올랐고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껄떡대며 술 권하는 남자들이 그녀 주위를 위성처럼 돌고 있지 않은가.
"자, 이제 섹시댄스대회를 시작합니다!"
사회자의 진행에 그녀는 무대로 난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팔다리가 따로 노는 허우적거림을 만인의 안구에 투척했다.
"오 마이 갓..."
도저히 눈 뜨고 쳐다볼 수 없는 춤을 그는 모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품을 향한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그는 괜시리 영웅심리가 솟았다. 파랑이 한 발로 성큼 무대 위로 올라갔다. 사회자가 그를 알아봤다. 그리고 뭐 하냐는 눈빛을 쏘았다. 하지만 그는 사회자의 눈치를 가볍게 무시하고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아슬아슬하게 밀착된 가슴에 사람들은 조마조마해하며 숨죽인 채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가 그녀의 허리라인에서 웨이브를 탔다. 끈적이는 음악에 맞춰 그녀의 라인을 쓰다듬듯 모든 관절에 부드러움을 실었다. 그리고 클라이막스에서 그가 자신의 상의를 탈의했다. 사람들은 그의 꾸물거리는 잔근육에 열광했다. 로사는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그가 나비처럼, 벌처럼 완급조절을 하며 그녀를 관능의 여신으로 만들었다. 바닥을 기기도 했고 그녀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녀 위로 덤블링을 했다. 서커스를 보는 듯 사람들은 탄성을 뱉었다. 그렇게 기승전결이 있는 드라마처럼 섹시댄스 대회를 공연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프로였다.
결과는 물론, 귀가 찢어질 듯한 박수갈채 속에 그들에게로 대상이 돌아갔다. 아직 술이 덜 깬 로사는 자신이 무얼 해서 상을 받았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당연 그럴 것이 그녀가 한 일은 그저 뻣뻣한 몸을 열심히 움직인 것 뿐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일제히 외쳤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파랑이 손사래를 치며 무대를 내려오려 하는 순간, 그때였다. 로사가 가는 그의 뒷덜미를 붙잡더니 그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오늘 그가 출근했을 때만 해도 상상치 못한 일을 벌였다. 그녀가 그의 입술을 덮쳤다. 그제야 그들은 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땀이 식지 않은 로사는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그녀는 파랑을 이끌고 클럽에서 나갔다.
파랑에게 오늘은 평소와 다른 날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