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가 눈을 떴다. 린과 하완이 그녀를 내려보이는 게 보였다.
"뭐야? 여기 어디야?"
그녀가 자다 일어난 듯한 말투로 물었다. 지나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그녀의 얼굴을 흘끗거렸다. 리얼한 시체 분장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괜찮아?"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따뜻한 하완의 말투에 시아는 왠지 불길한 경계심이 들었다.
"뭐, 뭐에요? 왜 난 여기에...아..."
"괘, 괜찮아? 어디 머리? 어디 아파?"
"아, 닝겔...이구나. 바늘이었어."
"팔 말고 머리는? 머리는 안 아파?"
어릴 적 부터 단단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돌 헤드를 가진 그녀였기에 머리가 아프냐고 묻는 물음은 참으로 생경하게 들렸다.
"머리가 왜요? 아, 그러고보니...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린이 나서서 물었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펴더니 그녀의 코 앞에 대고 흔들며 재차 물었다.
"이건 몇 개야? 이건 몇 개고?"
"야, 그렇게 흔들어대면 어떻게 아냐? 좀 가만히 둬봐! 그래봐야 둘일 테지만."
"2로 보여? 아...괜찮나보네."
그러면서 시아가 일어나려했다.
"에이, 진짜 뭐람 이게, 쪽 팔리게..."
"야, 잠깐 있어. CT도 찍고 MRI도 하고 다 해보게."
"네? 뭘 찍어요?"
"머리 사진 다 찍어보자고. 정상인지 아닌지...그래야 내 마음도 편하니까..."
"놰 내 머릿속 사진에 그쪽 마음이 왜 편하..."
그제야 그녀는 아까 일이 떠올랐다. 그가 던진 무언가를 피하려다 벽에 머리를 쿵 찍었던 것이다.
"아...아까! 와, 뭘 던진 거에요? 아니, 뭐 사람 죽일 일 있어요? 이건 완전 살인미수잖아요?"
"야, 그러길래 누가 그런 어마어마한 장난을 치래? 나야말로 심장마비 걸릴 뻔 했다고! 아, 일단 그, 그 얼굴 좀 씻고 와봐.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그러고 다시 얘기 하자고."
"그래, 시아야. 일단 화장실에 좀 다녀오자."
"좋아요. 갔다 와서 봐요. 안그래도 이거 링거 때문인지 나도 화장실이 엄청 가고 싶으니까."
그렇게 린은 시아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 앞에서 시아가 물었다.
"으악, 나 이렇게 분장한 거니? 와...대박인데? 당장 놀이동산에 취직해도 되겠다, 그치?"
"야, 넌 농담이 나오냐? 이 상황에."
"대체 뭘 던진 거야? 어두워서 뭐가 보였어야지."
"보조 의자."
"헐? 야, 어떻게 겁난다고 그걸 던지냐? 진짜 내가 오늘 병원에서 깨어나길 천만다행이구만. 하늘나라가 아니어서."
"내 말이...남자는 남자다잉. 그래도 그걸 던져서 잡겠다고..."
"넌 이와중에도 그 사람이 남자로 보이니? 난 살인범으로 보인다."
"아니...오빠가 그러더라고. 강도였으면 어떡하냐고...그게 다 날 보호하려고 그런 거 아니었겠어?"
"헐...너 두 번 보호하다가 절친 저 세상 보내겠다."
"야, 오빠도 심했지만 너도 과했어. 의사가 괜찮다고 하는데 굳이 정밀 검사 하자고 지금 그러잖아. 죄책감에."
"지 마음 편하려고 그러는 거지."
"뭐, 어쨌든 일은 저질러졌고 최대한 원상태로 돌려놓으려고 하잖아. 노력 좀 봐줘라."
"너 꼭 아말고한테 시집 가라. 나한테 이렇게 그 사람 편들어놓고 다른 놈하고 결혼하면 나 완전 섭섭해 미칠 테니까."
"난 제 3자로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 사건을 해석하는 중이라고."
"얼씨구? 아주 판관 포청천나셨네. 니가 지금 내 보호자로 온 거 맞냐?"
"아, 아무튼...그래서 내가 그런 장난 하지 말라고 했잖아!"
결국 린의 윽박으로 그녀들의 대화는 마무리 됐다. 시아는 맨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하완은 혈색이 돌아온 뽀얀 그녀의 얼굴을 보자 한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이었다.
"너네 부모님한테는...내가 말할게. 전화해서 바꿔줘."
"됐어요. 엄마한테까지 알리고 싶지 않네요. 집에 가야겠어요. 환자도 아닌데 응급실에 있기 굉장히 불편하네요. 게다가 사람들도 자꾸 쳐다보고..."
"검사 다 하고 가. 내가 비용 다 댈 거니까."
"아, 됐다고요. 우리집은 뭐 돈 없어서 못 해요?"
사실 그런 검사비용을 갑자기 낼 돈이 없는 건 맞았다. 하지만 엄마한테 지금 이 사실을 말해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멀쩡하기도 했고.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고...고집 피우지 말고 내 말 들어."
"교통사고도 아니고 무슨 후유증이에요? 나중에 아프면 말할 테니까...됐다고요."
그렇게 돌아서서 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하완이 잡았다.
"무슨 이런 고집을 피우고 그러냐? 니 몸이야. 내 몸 아니라고."
"아,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긴 말 말고 집에나 좀 데려다줘요. 차비도 아까우니까."
"진짜 괜찮은 거지? 너, 딴 말 없기다?"
"그렇다고요! 이것도 녹음하게요?"
그러자 하완은 멈칫했다. 그래볼까 하던 차였는데 들킨 것 같아 놀랐던 것이다.
"차 어딨어요? 그 흰둥이 좀 탑시다. 아, 이제야 그 외제차 좀 쓸모가 있겠네. 아까 파랑오빠 오토바이 타고 왔다갔다할 때는 엉덩이가 영 베겨서..."
그러면서 그녀가 엉덩이에 손을 댔다. 그제야 하완은 낮에 있었던 교통사고가 떠올랐다.
"왔다갔다고? 파랑의 바이크를 타고 학원으로 갔다고? 다시 학원으로 갔단 말이야?"
"그래요, 아까 그쪽이 부순 핸드폰 다시 개통하러 파랑오빠 오토바이 탔었다고요."
"그러니까 다시 그걸 타고 돌아갔다는 거지? 아무 사고 없이?"
시아는 자꾸 같은 질문을 하는 하완에게 짜증이 났다.
"그렇다니까요!"
"그럼 교통사고는 뭐야? 파랑은 어딨어?"
"수업 끝나서 집에 갔겠죠."
그때 하완은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섰다.
"기억이...기억이 안 나..."
"네?"
"그럼 교통사고 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었던 거야?"
"무슨 교통사고요?"
"진짜 내가...알츠하이먼가?"
그러면서 그가 린을 쳐다봤다. 치매라고 놀린 건 린이었지만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도통 이해 못 하는 표정이었다.
"말도 안 돼. 충격이 너무 컸었나봐. 내 기억이 지워졌어. 차를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어."
시아와 린은 뭔 소리냐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런데 그의 질린 얼굴에서 지금은 장난을 칠 때가 아니라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