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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이 잠이 든 처소는 딱 잠만 잘 수 있는 침대만 놓인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나마 머리 쪽 벽의 반이나 되는 창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 창마저 없었다면 낙천은 아예 수인장 장원 내의 적당한 나무 하나를 골라 그 위에서 노숙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낙천은 이 처소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 잠만 기분 좋게 잘 수 있는 곳이라면 낙천은 어떤 환경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으으으으……!”
그런 낙천이 신음을 흘렸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낙천의 전신은 열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열 때문에 자면서도 모로 누웠다가 좌로 누웠다가 하면서 몸부림을 치던 낙천은 아랫배를 움켜쥐며 끙끙 앓기까지 했다.
밤새도록 낙천은 지병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리 시달렸다.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난 낙천은 제 단전이 있는 아랫배 부근을 쏘아봤다.
“징글징글하다, 정말!”
한마디 내뱉는가 싶더니 낙천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했다.
낙천의 전신에서는 또 한 차례의 식은땀이 적지 않게 흘러나왔다. 마치 내상을 당한 것을 치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낙천의 운기조식은 다른 무인들이 하는 운기조식과 그 궤가 달랐다.
그것은 낙천의 단전 안에 있는 하나의 씨앗 때문이었다.
다른 무인의 운기조식은 운공을 통해 내공을 증진시키고 몸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와 달리 낙천의 운공은 단전 안에 있는 씨앗이 날뛰지 못하도록 몸 안에 흩어져있는 내기란 내기를 모두 끌어모아 씨앗주위를 내기로 공처럼 단단하게 묶어두는 것이었다.
씨앗은 양의 기운이 가득한 영약이자 낙천을 당장에라도 죽일 수 있는 시퍼런 칼과 같았다.
처음의 씨앗은 단전 안에서 녹아 이미 진득한 액체로 변해있었다.
액체가 된 씨앗은 단전 안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녹으며 낙천의 내공을 빠르게 증진시켰다. 하지만 둥그렇게 감싸는 내기의 양이 조금만 적어지거나 강도가 약간만 약해져도 씨앗의 액체는 단전 안에서 움직이려고 거세게 진동했다.
그 진동은 단전뿐 아니라 전신에 불같은 열을 오르게 했다.
어젯밤에도 낙천은 그 증상에 시달린 것이다.
운기조식으로 흩어진 내기를 다시 단단히 액체가 된 씨앗주위로 뭉쳐놓은 낙천은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한동안 낙천은 잊고 있었다.
보름에 한 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이런 증상을 경험한다는 것을.
또 무영신투 금노균과 함께 했던 1년 동안은 이런 증상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낙천의 단전에 있는 액체 씨앗을 감싼 내기가 흩어질 때마다 금노균이 본인의 내공으로 흩어지는 내기를 단단히 뭉쳐놓곤 했던 것이다. 그것도 낙천의 지랄 맞은 성격 탓이겠지만 그가 모르게 자는 동안만 행했다.
타인의 몸에 자신의 내기를 불어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조금만 기의 흐름을 잘못 흐트러트려도 타인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물론 시전자 본인도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단전에 있는 액체 씨앗을 감싼 낙천의 내기를 자신의 내기로 다시 단단하게 뭉쳐놓는 일은 더욱 섬세하면서도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금노균은 내가요상술(內家療傷術)과 비슷한 그 어려운 일을 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으리라.
금노균의 잘린 손목까지 생각난 낙천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오지랖도 지랄 맞게 넓어요.”
낙천은 총관 앞으로 불려갔다.
어제 일향루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총관이 있는 재정각(財政閣) 건물로 가면서 낙천은 신입들이 연무장에서 각자의 상관들에게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실전 같은 대련인 것을 보아 상관들이 녀석들에게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어이, 계낙천! 몸은 괜찮은가?”
녀석들을 후려치다 말고 한 사내가 낙천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어? 계낙천이라고? 어 정말이네.”
“낙천, 언제 한 번 한잔하자. 내가 기분 좋게 사마.”
갑자기 살갑게 아는 척을 해대는 수인장 무인들을 보면서도 낙천은 귀찮다는 듯이 손만 흔들어댔다.
낙천을 비롯한 만임조원 네 명은 총관과 얼굴 정중앙에 칼자국이 난 정룡당주 앞에 서 있었다.
총관은 말없이 책상 앞에 놓인 서류들을 확인하는데 청룡당주가 그 대신 입을 열었다.
“이 새끼들! 분란을 막으라고 그 자리에 보냈더니 기루에 가서 되려 싸움질을 해?”
낙천을 뺀 나머지 만임조원은 움찔하며 잔뜩 기가 죽어 바닥만 바라봤다.
낙천만 시큰둥한 얼굴로 화가 난 듯한 청룡당주를 바라봤다. 하지만 낙천의 시선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듯 어딘가 초점이 없었다.
“계낙천! 네가 끝장을 봤다며?”
“……”
낙천은 금노균이 자신이 모르는 동안 한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청룡당주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새끼! 과묵하기까지 하네.”
청룡당주가 흡족하다는 듯이 말하자 만임조원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낙천을 힐끔 바라봤다.
“몰랐는데 이번에 알아보니 처소가 엉망이더군.”
서류만 보던 총관이 입을 열더니 낙천과 만임조원을 바라봤다.
“내 지시를 해놨으니 이번엔 괜찮은 처소가 배정될 거다.”
총관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서류를 바라봤다.
“그만 가봐! 앞으로는 행동들 조심하고.”
청룡당주의 말에 만임조원들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낙천과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청룡당주가 총관을 돌아봤다.
“행동거지가 계낙천을 빼고는 영 가볍긴 하네.”
“한 번 보고 사람을 가볍다 무겁다 판단할 순 없네.”
“체! 첫인상이라는 게 있지 않나? 어쨌든 금전장에선 연락 없고?”
“따져 봐야 자신들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지. 그걸 모를 금전장주도 아니고.”
“큭큭큭큭! 그래서 내가 계낙천이 마음에 든다는 거야. 얼마나 통쾌한가?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확 내려가는 기분이라고.”
슬쩍 고개를 들어 청룡당주를 바라본 총관은 서류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낙천은 말린 과일을 씹으며 제가 맡은 산화로의 동쪽을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다.
“낙천이 왔나? 이거 하나 먹어 볼 텐가?”
상인 한 명이 가판대에 쭉 꽂아놓은 빙당호로(冰糖葫蘆) 중 하나를 꺼내 낙천에게 내밀었다.
“맛 좀 봐달라고. 이번엔 자네 말대로 산사자 말고도 감과 사과도 같이 꽂아 만들어 봤다고.”
낙천은 뚱한 얼굴로 빙당호로를 손에 쥐어 한입 베어 물었다. 아무 말 없이 걸어가는 낙천을 보며 상인이 물었다.
“어떤가? 말은 해주고 가야지?”
낙천은 엄지손가락만 위로 치켜세워 보였다.
또 다른 상인이 뒤에서 활짝 웃으며 낙천에게 말을 걸었다.
“낙천이네. 오늘은 좀 늦은 거 같은데?”
“늦잠!”
“저놈의 버르장머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낙천아! 오늘은 말린 과일 안 사냐?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내 가게만큼 좋은 물건은 어디에도 없다?”
“나중에.”
선화루 동쪽에 자리한 상인들은 전날과 다를 바 없이 지나가는 낙천에게 말을 건넸다.
힘든 생활고에 유흥과는 거리가 먼 이들은 어제 일향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말린 과일을 먹으며 걸어가는 낙천 앞으로 어깨에 힘을 준 채 껄렁거리며 걸어오는 젊은 사내들이 보였다.
사내들은 낙천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다른 길이 없는지 사방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낙천과 눈이 딱 마주쳤다.
사내들은 얼른 공손해진 자세로 낙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스쳐 지나갔다.
어제 일향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놈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