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나은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빛을 받은 그녀의 속눈썹이 파스스 반응하더니 이내 닫혀있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으음-”
옅은 신음소리와 함께 나은은 등을 일으켰다.
이부자리가 좋아서 그런지, 아님 비싼 침대라 그런지 한껏 상쾌하고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덕분을 푹 잔 나은은 기분 좋은 얼굴로 아침을 맞았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온 나은은 조용한 집 분위기에 주혁의 방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기척도 들리지 않고 닫혀있는 걸 보니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보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순간 그녀의 눈에 주방이 들어왔다. 고맙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 표시는 해줄 수 있겠다.
핸들을 잡으며 여유롭게 운전 중인 찬호는 휘파람을 불며 주혁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에게 ‘이찬호식 특별 건강식 서프라이즈 아침 만찬’을 해주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마트에서 장을 본 후였다.
완전까진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놀랄 주혁을 생각하니 살짝 들떠졌다.
그의 집 앞에 도착한 찬호는 차에서 내려 장을 챙기곤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윽고 ‘삐비빅’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후각을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에 찬호는 현관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이 소리는 분명 주방에서 들리는 소리다. 그리고 이 익숙한 냄새는 된장찌개다.
쟤가 지금 요리라는 걸 하는 건가? 하마못해 애도 할 수 있는 계란프라이도 망하게 하는 저 요리 고자가?
순간 찬호는 혼란스러웠다. 완벽한 친구에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요리 실력이 참담하다는 것이다.
헌데 저 냄새는 분명 못하는 솜씨가 아니다. 오히려 전문가의 향기다.
그렇다면 사실 요리에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저를 시켜먹기 위해 고도의 작전을 펼치고 있었던 거? 그 오랜시간 동안 자신을 속여왔던 거야?
찬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강주혁 이 나쁜 놈....!
찬호는 양 손 가득 재료가 잔뜩 담긴 장바구니를 보았다.
안되겠다. 요리로 깜짝 놀래켜주신 못하겠지만 대신 너의 그동안의 속임수를 내 눈으로 목격함으로써 너를 깜짝 놀래켜 줘야겠어. 음음.
“서프라이즈!”
찬호는 “난 너에게 음식을 해주러 왔어!”란 얼굴로 양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머리 위로 번쩍 들며 웃음 만개한 잇몸을 내보이며 주방으로 몸을 비췄다.
“.......”
찬호는 그 상태 그대로 목석이 되었다.
왜 지금 헛것이 보이는 건지. 분명 잠은 다 깼는데 왜 내 눈앞에 있는 친구가 여자로 보이는 걸까.
아무래도 안과에 가봐야겠다. 그럼 둘 중 하나가 나올 거다. 잠을 다 깬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덜 깬 거거나, 진짜 눈에 이상이 생긴 거나.
데구르르. 나은의 손에 들려있던 양파가 바닥을 굴렀다. 저 남자는 누구지?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아함-. 뭐야, 언제 왔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혁이 태평하게 하품을 하다 눈을 비비며 걸어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거기서 뭐해?”
“아.... 그게.... 음식 좀 하고 있었어요.”
나은은 주혁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대화에 찬호는 기겁했다.
아무래도 서프라이즈는 내가 당한 거 같다.
아침만찬이 차려진 주방.
찬호는 손으로는 젓가락을 들고 밥을 깨작깨작 거렸고 눈으로는 슬글슬금 주혁의 눈치를 보았다.
아침을 다 차린 나은은 주혁의 밥 먹고 가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르바이트에 늦어서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하고 말하고는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무슨 사이지? 강주혁 성격으론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던데? 누구지?
찬호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질문을 대신 머릿속에서 무수히 생각했다.
“하고싶은 말 있으면 해. 내 얼굴 뚫어지겠다.”
친구의 눈빛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던 주혁은 반찬을 집으며 말했다.
“아까 그 여자.... 누구야?”
“찌개 맛있다, 그지?”
“응. 되게 잘 끓였네. 아니, 말 돌리지 말고.”
이게 어디서 어물쩍 피하려고 해?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해놓고 정작 대답은 해주지 않으려는 그였다.
“......”
주혁은 밥만 오물거릴 뿐 말을 아꼈다.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내 인연.”
그리고 입에 있던 밥을 꿀꺽 삼킨 그가 내뱉은 단어는 찬호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뭐?”
“찬호야, 너 어제 나한테 점 보러 가자고 했지?”
“응, 그랬지.”
“그럼 주소 좀 가르쳐줘. 시간 내서 가봐야겠어.”
“갑자기? 어제는 안 믿는다며.”
“그랬지. 그런데....”
그 점이라는 거, 한번 믿어보고 싶어서.
유니폼을 입고 고기 시식행사 앞에 선 나은은 꼬르륵 울리는 소리에 급히 배를 부여잡았다.
뭐라도 챙겨 먹을 걸 그랬나.
출근 시간도 다 돼가고, 배도 그리 고픈 게 아니라 참으면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일한 지 시간이 좀 지나 밥을 달라고 애앵 울어대는 배 때문에 민망할 지경이다.
아까는 손님이 계실 때 울어대서 여간 창피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니 좀만 버티자. 나은은 그리 생각하며 정성껏 고기를 구웠다.
“저기요.”
“네, 손님.”
고풍스런 모자를 쓰고 우아한 말투로 저를 부르는 여자에게 나은은 힘차게 대답했다.
“이거 먹어봐도 돼요?”
“당연히 되지요.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나은은 이쑤시개에 고기 한 점을 콕 집은 뒤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나은이 내민 걸 받아들더니 우아한 몸짓으로 씹었다.
“괜찮네요. 고기를 아주 잘 구우시나 봐요?
“아닙니다. 고기 맛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맛있는 고기를 준 답례로 같이 점심이라도 하고 싶은데, 어때요? 시간 괜찮아요?”
“네? 아, 저기.....”
난데없이 점심식사를 제안하는 여자에 나은은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당황도 잠시, 나은은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맨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오랜만이네요, 나은 양.”
그녀를 보며 설핏 미소짓는 여자. 주혁의 엄마인 윤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