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합을 맞춘 듯 사람들의 얼굴이 놀랠 노자가 되었다. 오로지 주혁만이 아무렇지 않게 서있을 뿐.
“아, 아니, 그러니까 그쪽, 그러니까 강주혁 씨가 나은이 남자친구 되시는 분이세요?”
먼저 정신을 차린 은아가 고개를 가로젓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사실 친구들 가운데서도 제일 충격을 받은 그녀라 은아는 자신이 제발 잘못 들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
“네, 제가 바로 나은 씨 남자친구 강주혁입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은 그녀의 남자친구라고 밝히는 그의 모습에 은아는 2차로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쟤한테 남자친구라니?
나은을 약올리기 위해 일부러 욕먹을 각오하고 왔는데,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예상 밖 범위였다. 게다가 얼굴이며 몸매며 옷이며 뭐하나 빠지는 게 없어 자신이 오히려 약이 올랐다.
은아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주혁을 보는 정우를 보았다. 순간 그가 오징어로 보였다.
“아니야. 분명 어딘가 빠지는 데가 있을 거야.”
은아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가다간 잠을 자긴 그를것이다.
은아는 헛기침을 하곤 일부러 머리카락을 손으로 튕겼다. 그리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구나. 나은이 남자친구 되시구나. 실례지만 혹시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세요?”
은아는 주혁이 말하길 기다리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이거라도 한 건 잡아야했다.
“그냥 평범한 직장 다닙니다. 말그대로 직장인이죠.”
평범한까진 아니지만, 어쨌든 호텔도 직장이긴 직장이기에 주혁은 거짓말 같지 않은 사실을 말했다.
‘역시, 얼굴만 잘생겼지 하는 일은 영.’
그의 말에 다시 의기충전이 된 은아는 콧대를 빳빳이 뻗었다. 그리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누르며 팔짱을 꼈다.
“어머, 그러시구나. 제 남자친구는 대기업 사원인데. 오호호.”
은아는 정우에게 팔짱을 끼며 일부러 들으라는 듯 더 크게 웃었다. 그녀의 기운을 이어받았는지 정우의 얼굴도 기세등등해졌다.
주혁은 눈썹을 씰룩였다. 저것들한테 어떻게 뒤통수를 치면 좋을까.
“정말 부럽네요. 저도 꼭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은데.”
“에이, 별것도 아닌데요, 뭘. 강주혁 씨도 나중에 대기업에 취직하실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저희 회사에 오시면 제가 잘 봐드릴게요.”
완전히 기가 산 정우는 거들먹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 이건 제 명함입니다.”
주혁은 지갑에서 명한 한 장을 꺼내 정우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명함을 본 순간 두 사람은 누가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 마냥 눈을 번쩍 떴다.
⌜호텔 블루 온 사장 강주혁.⌟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는데, 그가 건넨 명함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지상 파라다이스라고 해도 인정할 만한 호텔 블루 온. 그곳에서 한 번 투숙한 사람은 평생 거기서 살 고 싶을 만큼 천국이라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호텔의 사장이 자신들 눈앞에 있다니! 말을 하고 싶어도 그 전에 웃음이 먼저 나왔다.
“정.....”
겨우 말을 연 은아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얼마나 충격적이면 안면근육이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정말 펑범하신 분이네요. 저희는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 그럼 안녕히계세요.”
주혁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곤 친구들에겐 인사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은 도망치듯 식당을 나갔다.
식당에서 먼발치 떨어진 곳까지 달린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었다.
“뭐야 저 남자? 진짜 그 호텔 사장이야?”
은아는 이 상황이 짜증난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서나은 엿 먹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뭐야아.”
오히려 자신이 더 된통 당해버렸다. 은아는 울상을 지으며 우는 소리를 냈다.
“은아야, 일단 진정하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저 남자가 블루 온 호텔 사장이래, 사장!”
어떻게 진정할 수 있을까. 그 사장이 나은의 애인인데. 은아는 주혁이 준 명함을 벅벅 찢었다. 종이 쪼가리된 명함은 그녀의 발 밑으로 떨어졌다.
“오늘 잠 다 잤어. 나 집에 갈 거야!”
“은아야, 은아야!”
정우는 은아를 쫓아갔다. 오늘 참 재수없는 날이다.
한편 고깃집 안.
두 사람의 멘붕소리가 여기까지 들린 것 같아 주혁은 문을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보았다.
“이제 갈 사람들은 다 간 것 같은데. 맞나요?
“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해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지, 두나는 주혁을 보며 박수쳤다. 그리고 이윽고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그를 향해 박수쳤다.
“감사합니다.”
“이러지 말고 어서 앉으세요. 나은아, 너도.”
“어? 어.”
아람의 말에 고개는 끄덕였지만 나은은 당황했다. 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은 뭐지? 아무도 그가 자신의 남자친구란 걸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친구들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째 외톨이가 된 기분이다. 그녀 말고 전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나은 씨.”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나긋하게 내려앉았다. 나은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예?”
“안 들어가고 뭐해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아, 그렇죠....”
실제로 그녀의 친구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두 사람이 앉길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에 들어가면 얼마나 폭포수같은 질문을 받을까.
“저... 강주혁 씨.”
나은은 주혁을 불렀다. 일단 그가 왜 여기 왔는지 제일 먼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불렀을 때, 주혁의 손이 나은의 손을 붙잡았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요. 지금은 그냥 있읍시다.”
나은의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지 알아 챈 건지 주혁은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행동에 나은은 입 밖으로 꺼내려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은이 말은 없는 걸 허락한 걸로 알고, 주혁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주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저희들은 어디에 앉으면 되죠?”
*
지글지글, 불만위에서 익어가는 고기보다 세 여자는 그런 고기를 구워주는 주혁에게 더 시선이 갔다.
자리에 앉곤 자신이 고기를 굽겠다고 하더니 어느새 그의 손엔 고기를 굽는 사람만 잡을 수 있는 집게가 쥐어져 있었다.
섬세한 손길로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노릇노릇하게 고기를 구워주는 주혁의 모습은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느새 반즈르르하게 익은 고기를 가위로 자르고, 주혁은 세 여자에게 말했다.
“다 됐습니다. 이제 드셔도 되요.”
그의 말에 세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 마음 한 뜻으로 생각했다.
‘들었어? 먹으래!’
마치 그가 연예인이라도 된 듯 냥 세 여자는 주혁의 모션하나하나에 열광했다. 너무 멋있어!
“저흰 괜찮으니까 주혁 씨 먼저 드세요.”
“그래요. 원래 첫 고기는 고기 구운 사람한테 주는 거래요.”
“나은아, 뭐하고 있어? 주혁 씨한테 쌈 싸서 먹여주지 않고.”
소라, 두나, 윤지 순으로 세 여자는 주혁이 먼저 먹길 권했다. 그리고 윤지의 말에 나은은 자신을 가르키며 내가?하고 말했다.
나은은 당황했지만, 어서 그에게 쌈을 먹여주라는 친구들의 눈빛에 어... 알았어하고 말하고는 쌈을 쌌다.
“주혁 씨, 아 하세요.”
나은이 주혁에게 싼 쌈을 내밀고, 주혁은 그 쌈을 받아먹었다. 두 사람 주위에 하트가 뿅뿅 튀어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그 두 사람도 아닌데, 왜 자신들이 더 간질거리는지 모르겠다. 마치 로맨스 드라마를 보는 듯 입꼬리가 절로 엄마미소를 띠었다.
“ㄷ, 됐지...?”
주혁에게 쌈을 먹여주고 나서 나은은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새색시마냥 붉어진 볼에 세 여자는 저절로 “오구오구 잘했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너는 이렇게 잘생긴 애인이 있으면 우리한테 귀뜸이라도 해줬어야지. 난 완전 깜짝 놀랐잖아.
윤지는 갑작스레 등장해 자신이 나은의 애인이라고 하는 주혁을 보며 눈이 튀어나정도로 놀랐다.
“미안해. 상황이 상황이어서 너희들한테 말할 겨를이 없었어.”
“어디서 처음 만난 거야?”
“백화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소라의 물음에 주혁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백화점이라면... 그때 네가 나한테 파일 가지러 왔을 때?”
“응. 맞아.”
“백화점이라니?”
윤지와 나은의 대화에 두나와 소라는 눈을 말똥이며 윤지를 향해 물었다.
“우리 놀던 날, 내가 손에 파일 들고 있었잖아. 내 가방이 작아서 나은이 가방에 넣어뒀는데 내가 깜빡하고 안 가져가서 나은이한테 백화점으로 파일 갔다 달라 했거든.”
윤지의 말에 두 사람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은 씨하고 같은 가방을 잡다 우연히 손끝이 닿았거든요.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주혁의 말에 소라는 너무 로맨틱하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면서 손으로 붉혀진 두 볼을 감쌌다.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낭만적인 얘기다.
“그럼, 둘이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한거에요?”
“아니요. 제가 먼저 반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주혁은 목소리엔 망설임이 없었다.
“나은 씨 보고 첫눈에 반해서 전화번호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단계라 나은 씨가 친구들에게 바로 말하기 그랬나 봅니다.”
그의 말에 네 여자는 입이 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그럴것이 그의 목소리엔 나은과 처음 만난 떨림이, 그리고 지금 친구들에게 고백하는 당당함이 서려있기 때문이었다.
나은은 잠시동안 주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년 전, 나은은 정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은아, 나는 너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어. 처음부터 네가 좋았어. 비록 우리가 친구사이지만, 나, 너한테 한발짝 더 다가가도 될까?’
나은은 정우가 자신에게 고백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정우의 고백에 나은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처음부터....”
“네, 처음부터 좋아했습니다.”
윤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 지 아는 지 주혁은 곧바로 말했다.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나은은 순간 주혁의 말이 진심으로 와닿았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나은은 주혁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내렸다. 아무래도 옛생각에 심장이 반응했나 보다.
* * *
“오늘 재밌었어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같이 타시죠.”
“어유, 아니에요. 저희들은 걸어서 가면 돼요.”
“강주혁 씨, 나중에 남자들끼리 한 잔 합시다.”
“나은아, 우린 갈게. 나은 씨 애인 분도 안녕히 계세요.”
나은은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친구들을 보냈다. 그리고 친구들이 어느정도 멀어져 갔을때 쯤 주혁을 보았다.
“고마워요, 강주혁 씨.”
“내가 말했잖아. 네가 언젠가 날 필요로 하게 될 거라고.”
자신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을 하는 은아에 나은의 기분은 바닥까지 추락했다. 거기다 저를 앞에 두고 정우와 다정한 모습을 보이니, 나은은 기분처럼 표정또한 좋지 못했다.
마음속에 우중충한 비가 내리고 있을 그때, 주혁이 나타났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나은은 당황했지만, 은아와 정우가 그를 보고 도망가다 싶히 나갔을 땐 어리둥절 하면서도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도대체 그의 명함엔 어떤 내용이 들었기에 두 사람이 순간 식겁했는지, 나은은 내심 궁금했지만 어차피 부자이겠거니 생각하며 호기심을 접었다.
“가자, 차로 데려다줄게. 오늘 하루 네 애인이니까 그 정도는 되지?”
“네, 그럼 감사히 타겠습니다.”
주혁의 말에 푸스스 웃음을 터트린 나은이 말했다 . 시리던 봄바람이 두 사람의 미소처럼 잠시 포근하게 불어왔다.
나은이 차에서 내리고, 뒷자석에서 무언가를 꺼낸 주혁이 뒤이어 따라 내렸다.
“이거, 가져가.”
주혁은 나은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나은이 거절했던 가방이 들어있었다.
“이건 왜....
“내가 말했잖아, 난 한번 쓴 건 안 가진다고. 그리고 나보다는 너한테 더 어울려서 그래.”
하지만 나은은 쉽사리 주혁이 내민 쇼핑백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보였다.
“나 팔 떨어져. 네가 이걸 받아야 내가 갈 수 있어. 나 지금 피곤한데, 계속 이렇게 있게 내버려둘거야?”
어찌보면 협박 같지만 이렇게 해야 나은이 받을 것 같기에 주혁은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잠시 주저하던 나은이 쇼핑백을 받았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띠어졌다.
“잘했어. 난 이만 가볼게. 아, 가방 꼭 열어봐.”
주혁은 나은에게 신신당부를 하고선 차에 올랐다.
“조심히 가세요!”
나은은 멀어져가는 차를 향해 소리쳤다.
집으로 들어온 나은은 쇼핑백에서 가방을 꺼내곤 지퍼를 열었다.
“응? 이게 뭐지?”
흰 봉투를 꺼내곤 요리조리 보더니 봉투 안을 살폈다. 봉투에는 만원짜리 지폐 2장과 함께 쪽지가 들어있었다.
나은은 반으로 접혀진 종이를 폈다. 정갈한 글씨가 그가 쓴 것 같았다.
⌜전에 못줬던 택시비 값이야. 계속 거절하는 것도 몸에 안 좋아. ⌟
이래서 그가 가방을 꼭 열어보라고 했나보다. 돈이 생겨서 기쁘지만, 실제 택시비 값보다 더 많이 받아서 미안하다.
나은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고작 삼일만에 한 남자와 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가까워 진적이 있던가.
답을 말하자면 NO다. 본디 낯을 가리는 성격에 더구나 남자라면 더더욱 가까워지기가 힘들었다.
이것은 고등학생때도 그랬고, 정우와도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인연을 만나겠어요.’
나은은 점술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인연을 만난 걸까. 그리고 인연의 상대가 바로 그인걸까.
나은은 싱크대 위 물로 헹궈놓은 빈 숙취음료 병을 보았다.
백화점에서 만난 걸로 알고 있지만 어쩌면 그 전 클럽에서 주혁과 만난게 하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저 병을 문 앞에 놔둔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주혁이 저에게 얘기해줬을 텐데, 주혁은 그녀에게 클럽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은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새 폰으로 바꿔서 주혁에게 전화번호를 다시 받았다.
아직 그를 저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번호만 떠있었다. 나은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자판을 꾹꾹 눌렀다.
‘강주혁 씨.’
‘가방 주인’에서 ‘강주혁 씨’로, 나은은 모르겠지만 서서히 그와 가까워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