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사이에 정막이 돌았다. 주혁은 여전히 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강주혁 씨....?”
그러다 먼저 입술을 연 나은이 주혁을 불렀다. 나은은 어리둥절 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나은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이제야 정신이 든 주혁은 어?하고 첫마디를 열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주혁은 시선을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내렸다. 아까 그 말은 주혁이 상상 속에서 했던 말이었다.
“강주혁 씨가 여긴 웬일이세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온 거야. 근데 너, 다쳤어?”
주혁은 그녀의 이마에 자그맣게 붙여져있는 붕대를 보며 말했다. 피가 붕대로 스며든 것인지 붕대에서 그녀의 피가 보였다.
“아, 이거요? 그냥 넘어지다 다쳤어요.”
나은은 붕대를 어루만지며 민망함에 살짝 웃었다. 술과 함께 달아오른 볼이 사춘기 소녀마냥 붉었다.
“조심 좀 했어야지. 많이 심각해?”
왜 칠칠지 못하게 몸을 다치고 와서는. 주혁은 제가 다친 것 마냥 가슴이 아렸다.
“아니요. 심각한 건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나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게 웃었다. 정말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는 여자다.
“그, 아까 전화 걸어보니까 전화도 꺼져있더만. 뭐, 배터리가 나갔나?”
딱히 너를 걱정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화를 안 받아서 살짝 신경쓰였다는 듯 주혁은 틱틱거리며 말했다.
“그건 아닌데, 아마 고장 났나 봐요. 전원이 안 켜져요.”
나은은 폴더를 연 휴대폰을 그에게 들어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사실 속마음은 새까만 액정마냥 타들어갔지만 말이다.
주혁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웃고있지만 왠지 울고있는것 같았다.
“.....울지마.”
“네? 아니요, 저 안우는데...”
주혁의 말에 깜짝 놀란 나은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심장이 두근 거렸다.
“어라? 나 왜 이러지?”
그를 보고있자니 나은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은은 서둘러 고개를 수그려 눈물을 닦았다.
“강주혁 씨, 미안해요. 갑자기 눈물이 나와서....”
그 앞에서 울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은은 눈물을 벅벅 닦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반항하 듯 눈물은 계속해서 그녀의 눈에서 흘러나왔다.
“흑.....!”
결국 나은은 억눌러왔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꾹꾹 숨겨왔던 거 뿐이지 사실은 무척이나 울고싶었다. 회사도, 집 월세도, 망가진 휴대폰도, 오늘 나은이 겪은 일은 전부 재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주혁은 나은에게로 걸어가 사시나무처럼 떨고있는 그녀의 몸을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울지 마. 난 여자가 울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단 말이야.”
“우는거 아니에요. 그냥, 흡. 먼지가 들어가서 그런 거예요.”
울고 있지만 울고 있다는걸 들키기 싫어서 나은은 애꿎은 먼지 탓을 했다
“알았어. 그럼 먼지 다 빼내면 멈춰.”
주혁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쩌면 나은은 누구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지금껏 참아왔는지도 모른다.
거칠었던 숨이 조금씩 잔잔해 지면서 나은의 울음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주혁은 제 품에 안겨있는 그녀의 머리통이 귀여워 짧은 웃음이 나왔다.
“이제 먼지 다 뗐어?”
주혁은 나은은 살포시 떼어놓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코까지 빨개진게 마치 루돌프 사슴코 같았다.
“네, 그런데... ”
소매로 마지막 눈물을 닦은 나은은 주혁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저 밥 좀 사주시면 안되요?”
* * *
나은은 잘 차려진 상 앞에서 숟가락을 움직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아침에만 먹었지 그다음부턴 누워있으라 제대로 된 밥을 챙겨먹지 못했다. 술과 생선을 먹었다 해도 그건 밥이 아니었고 말이다.
주혁은 쫄쫄 굶기라도 한 건지 맛있게 먹는 나은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 작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 량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사람인줄 알겠네. 그동안 밥도 안챙겨 먹고 있었어?”
흘리듯이 말했지만 주혁은 혹시 그녀가 병실에 누워있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이마에 보이는 붕대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좀 할게 많아서 먹어야 한다는 거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굶으면 건강에 안 좋아.”
주혁의 말에 나은은 네.라고 말하고 헤헤 웃었다.
“그런데... 왜 울었는지, 물어봐도 돼?”
주혁은 혹시 그녀가 상처가 상처받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회사가 망했어요. 그래서 집에 왔는데, 아주머니께서 월세를 올리시겠대요. 그러다 술마셔서 친구 집 앞에서 한판 했다가 경찰서까지 갔어요.”
오늘 나은에겐 상당히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은은 그 일들을 단번에 세 문장으로 압축시켰다 . 물론 거기에는 정확이 왜 이 상처가 생겨났는지에 대한 말이 없지만 말이다.
“내일 동창회에 가야 하는데, 솔직히 이 꼴로 가기가 좀 그래요. 애들보기가 민망해서요.”
분명 애들과 얘기하면서 너 뭐하고 사니, 뭐하며 지내니라는 말이 오갈텐데, 지금 자신의 상태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다. 말해 봤자 동정의 눈길만 받을 것이었다.
“동창회, 어디서 하기로 했는데?”
“시내에 먹자골목 안에있는 큰 돼지그림 간판 걸려져 있는 식당에서요.”
“몇시에.”
“애들도 회사가고 그러니까 한 여서시 반?”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질문에 혹시하는 생각도 들 법도 한데, 아무생각이 없는 나은은 그의 물음에 꼬박꼬박 답해 주었다.
“...그래, 알았어.”
주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거기 오려는 생각은 아니죠?”
이제서야 그가 세밀하게 물어보는 것을 안 나은은 주혁에게 물었다.
“아니야. 그냥 어디서 하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내가 쓸데없는 호기심이 쫌 많거든.”
주혁은 물을 들이켰다. 찔린 기분이었다.
“그냥 장난삼아 물어본 거에요. 너무 깊게 물어봐서.”
나은은 양 손으로 턱을 받치곤 반쯤 눈을 감았다. 미약하게 남아있던 술기운이 몸이 나른해져서 인지 오르기 시작한거다.
“너, 또 나 만난 거 기억 못하려는 거 아니지?”
주혁은 술을 마신지 얼마 안된 나은이 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에요. 저 지금 강주혁 씨 만난 거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몸만 나른할 뿐이지 정신을 말짱하다. 나은은 걱정하지 말라며 말했다.
“그런데, 또 라니요?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었어요?”
기억 속 그를 처음 만난 건 백화점인 나은이기에 나은은 자신의 술버릇을 아는데다가 또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아니, 없어. 너하고는 백화점에서 처음만난게 다야.”
하마터면 그녀에게 들킬 뻔 했다. 주혁은 애써 침착하게 굴며 나은에게 말했다.
전에 나은에게 자신이 착각한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이제야 그런 얘길하면 이상할 것이니 말이다.
“아, 그러시구나.”
다행히 나은은 주혁의 말을 믿은 듯 더는 묻지 않았다. 여전히 볼엔 홍조가 띠어져있었다.
“근데 이상하다.”
“또 뭐가?”
“강주혁 씨 말대로 우린 백화점에서 처음 만났는데, 왜 이렇게 낯설지가 않지?”
분명 그의 말대로, 또 자신의 기억대로 주혁을 처음 만난 건 백화점이 맞는데 이상하게 나은은 주혁을 그 전에 만난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은은 그가 편안했다.
“네가 취기가 올라서 그래. 이제 집으로 가자. 너무 늦었어.”
주혁은 나은의 눈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은도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주혁 씨, 감사합니다.”
나은은 집까지 데려다 준 주혁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들어가서 한숨 자. 너 좀 피곤해 보여.”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은은 철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주혁은 나은이 계단을 잘 오르는지, 집안으로 잘 들어가는지 보고서야 뒤로 돌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하지만 그의 마음만은 따뜻했다.
*
알람소리도 울리지 않은 방안. 나은은 더는 울릴리 없는 알람시계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은아! 서나은!”
쿵쿵 문을 두들기며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그 소리에 나은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나야, 나, 최윤지!”
윤지? 윤지라는 말에 나은은 자리에 벌써 일어나 문을 열었다.
“윤지야,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오늘 나 일 안해서 너랑 나중에 동창회 같이 갈려고 왔어.”
“아, 그렇구나. 춥겠다, 어서 들어와.”
나은은 좌식식탁 앞에 앉은 윤지에게 커피를 내왔다. 고마워. 윤지는 나은이 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기, 윤지야. 나 말이야....”
“알아. 이미 다 알고왔어. 사무실 찾아갔는데 텅 비어있길래 경비아저씨한테 물어보니까 다 얘기해 주시더라구.”
나은을 놀래켜 주려고 몰래 사은의 회사에 찾아갔는데, 사무실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그래서 윤지는 순찰을 돌던 경비아저씨께 물어보았고, 회사가 망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기집애, 그런 일이 있었으면 말해줘야지. 내가 얼마나 놀랬는 지 알아?”
전화도 안 받고, 윤지는 나은이 위험한 생각을 한건 아닌가하는 불암감이 들었다. 일단 침착하게 나은의 집에 찾아와 나은을 봐서 다행이지만 만약 집에도 나은이 없었다면 윤지는 그 자리에서 울었을 것이다.
“미안. 휴대폰이 고장나서 전화가 온 줄도 몰랐어.”
“이참에 너도 스마트 폰으로 바꿔. 저건 너무 오래 됐어.”
윤지는 오랫동안 쓰느라 살갗이 벗겨진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래야 해. 이제 고칠 수 있는 데가 없거든.”
2G폰이라 고칠 수 있는 데도 잘 없고, 또 구하기도 힘들어져서 나은은 어쩔 수 없이 새 휴대폰으로 바꿔야 한다. 그마나 요금이 싸서 좋았는데, 나은은 제발 스마트폰 요금도 싸길 바랬다.
“나랑 같이 나가자. 내가, 가격면에서 정당하고 좋은 스마트폰 골라줄게.”
“고마워, 윤지야.”
“근데 너, 이마가 왜그래? 어디봐봐.”
윤지는 나은의 머리를 잡곤 그녀의 이마에 붙여진 붕대를 보았다. 걱정 가득한 윤지의 눈썹이 처연하게 내려갔다.
“어쩌다 그런거야? 아프지 않아?”
“괜찮아. 이 정도로 뭘.”
“일단 붕터부터 갈아야겠다. 이렇게 방치하면 상처만 덧나.”
윤지는 마치 자신이 아픈것처럼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달고는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미안해, 나은아. 나는 네가 이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직장 사람들랑 놀러가고....”
윤지는 나은을 껴안았다.
친구가 어제 다쳐서 상처까지 난 동안 자신은 직장 사람들과 회식을 가졌다. 제 잘못이 아닌데도 제 잘못인 것 마냥 윤지는 죄챙감이 들었다.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왜 나한테 사과해. 난 괜찮아.”
나은은 윤지를 등을 다독였다. 윤지의 마음이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나은아!”
“나은아, 괜찮아?”
열여있는 문으로 두나와 소라가 들어왔다. 둘 다 무슨 얘길 들은 것인지 헐레벌떡이었다.
“나은아, 어유 우리 나은이, 무사하구나.”
두나는 나은의 볼을 감싸며 울상인 얼굴로 나은을 보았다.
“나은아, 미안해. 나는 네가 어제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 반 애들이랑 너무 재밌게 놀았어.”
소라는 어깨를 들썩이며 옷으로 눈물을 훔쳤다.
둘 다 나은의 회사에 찾아갔다 경비아저씨께 어젯일을 듣게 되었다. 나은에게 전화를 걸어봐도 받지 않고, 둘 다 사색이 된 얼굴로 나은의 집에 찾아오게 되었다.
“나은아, 너 이 상처 뭐야? 어떤 놈의 자식이 우리 나은이 얼굴을...! 어이고, 우리 나은이 어째.”
두나는 나은의 상처를 보곤 거의 통곡하 듯 울었다.
“야, 너희들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뭐야? 네들이 울면, 나는......”
아까 울음을 그친 윤지도 친구들이 울자 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느새 나은의 집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 시끄러워! 뭐야, 너희들 왜 그래?”
난리법석인 2층때문에 신경질 적으로 나은의 집으로 올라온 용산 댁은 울고있는 친구들을 보곤 당황했다.
“아주머니...... 나은이가.....”
“나은이가 왜? 나은 씨,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아주머니. 소란피워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주머니.....”
친구들은 엉엉울며 용산 댁한테 사과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네들이 우니까, 나도.....”
결국 용산 댁마저 눈물이 터지자 나은의 집은 그야말로 장례식장 떠나가라 할 정도였다.
“나은아.....”
친구들은 나은의 품에 안겼다. 나은은 친구들을 다정하게 감싸주었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들. 나은의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