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여자가 나에게 안겼고, 처음 보는 여자가 내 품에서 울었다.
나는 여자를 한 남자에게서 빼내 주었고,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니 이제 헤어지는 것만 남았는데, 이 여자가 나를 붙잡는다.
저 작고 여린 손으로 내 옷깃을 잡곤 가지 말라 말한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떼어내면 되는데 그러질 못하겠다.
이 손을 떼면 이 여자가 너무 불쌍할 것 같아서. 동정심일지 모르겠으나 주혁은 차마 이 손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저... 손님.”
주혁이 망설이는 사이, 택시기사가 주혁을 불렀다.
“아무래도 손님도 같이 타셔야 할 것 같은데요.”
택시기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있으면 요금폭탄을 맞을 것이었다.
“그래야겠죠.”
잠시 고민하던 주혁은 입술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이 택시에 타야 상황이 마무리될 것 같았다.
주혁은 제 옷깃을 붙잡은 나은의 손을 살포시 떼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다리 위에 얹어주곤 자신도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택시가 출발하고, 주혁은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채 남겨진 눈물자국을 지우지 못하고 나은은 옅은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졌다.
주혁은 그녀의 옆선을 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릎보다 살짝 밑 길이의 치마지만 앉다 보니 치마가 약간 올라가 허벅지를 비췄다.
주혁은 앞을 보았다. 택시기사가 자신들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큼.”
주혁은 괜히 헛기침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나은의 다리를 가려주었다.
덜커덩ㅡ
방지턱을 넘은 건지 택시가 크게 덜컹거리자 나은의 고개가 주혁쪽으로 옮겨졌다.
톡, 나은의 얼굴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주혁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냥 놔두었다. 나중에 또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으음...”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나은은 잠투정을 부리며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덕분에 바짝 붙어진 두 사람은 남겨진 거리 없이 완전히 밀착되었다.
심장박동도, 숨소리마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두 사람.
나은이 숨을 내쉴 때마다 주혁의 허벅지 안쪽을 미세하게 자극했다.
주혁은 뜨거운 숨결에 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심장 부근을 간지럼 피웠다.
주혁의 심장이 물고기처럼 세차게 뛰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도 남자인데,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이런 짓을 하면 남겨진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이러다가 그녀에 의해 정신이 아롱거릴 것 같았다. 주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착하자. 이런 순간에는 침착이 답이야.’
주혁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었다. 마음속 주문이 통한 건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주혁은 나은을 보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 조명을 받아 그런지 매끄러우면서도 촉촉한 피부. 예쁘게 자리 잡은 입술.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녀는 미인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예쁜 외모를 가졌다.
술 냄새 사이로 옅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자극적이지 않은, 연한 향이었다.
‘강주혁, 너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순간 주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는 사람 얼굴을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다니. 이게 변태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주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코끝을 쓸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귓불이 익은 것 마냥 붉어졌다. 택시는 여전히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 * *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주혁은 기사에게 돈을 내고는 낑낑거리며 그녀를 문 앞쪽으로 데려와선 그녀를 업었다.
“다 왔어. 이제 어디로 가야 돼.”
주혁의 말에 나은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고는 주혁의 등에 얼굴을 푹 숙였다.
여기 아니에요.
“뭐? 여기 아니야?”
기껏 왔더니만 여기가 아니라니. 그럼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저기...”
나은의 손가락이 오르막길을 가리켰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기, 뭐.”
“저기 올라가야 한다고요...”
그리고 항상 불길한 예감은 직감했다.
*
“아무튼 내가, 너 땜에 제 명에 못 살겠다.”
주혁은 나은을 업은 채로 끙끙거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알고 보니 한 칸 더 올라가야 한단다. 주혁은 그녀의 말에 황당했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죄송해요...”
나은은 푹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말했다. 잠에 빠진 상태에서도 할 말을 다했다.
“알면 됐어. 그나저나, 너 이런데 살아?”
솔직히 의외다. 자신이 듣기론 그 클럽은 부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기에 주혁은 그녀가 잘사는 집안인 줄만 알았다.
주혁은 작은 빌라와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동네를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네. 저 이런데 살아요.”
나은은 속 편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을 감은 채 싱긋 웃었다.
“하긴,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그냥 집만 있으면 됐지. 근데, 왜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 거야.”
이러다 체력이 고갈되고도 남겠다. 주혁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너 몸무게가 몇이야? 왜 이렇게 무거워.”
주혁은 은근 무게가 있는 나연이 약간 원망스러웠다.
“우쒸. 저 안 무겁거든요? 제가 얼마나 가벼운데요오ㅡ!”
주혁의 솔직한 심정이 담긴 말에 상처를 받은 나은은 주혁의 등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다 미안해. 너 가벼운 거 아니까 그만 좀 흔들어.”
주혁은 요리조리 몸부림을 치는 나은에게 재빠르게 사과했다.
주혁의 말에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나은은 다시 잠잠하게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하여간에 고집하고는....”
주혁은 나은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투덜거렸다.
그렇게 오르막길과 사투를 벌이고 정상에 도착한 주혁은 나은이 말한 집을 찾았다.
“여기 맞아?”
“네, 맞아요.”
나은은 졸린 눈으로 집을 보고는 대답했다.
주혁은 나은이 말한 철문이 있는 집을 조심히 열었다.
끼익ㅡ
문을 열자 철문이 마찰과 함께 우는 소리를 냈다.
“또 이제 어디로 가면 돼.”
“2층... 계단이요...”
2층?
주혁은 앞을 보았다. 집 바로 옆 2층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이 보였다.
주혁은 자세를 정리하고는 계단을 올랐다.
얼마 안 되는 데도 계단은 꽤 가팔랐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간 넘어질 수도 있었다.
이 여자는 이런 계단을 어떻게 올라가는 거야?
맑은 날은 괜찮겠지만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상당히 미끄러울 것이었다. 주혁은 금세 숨이 차는 것을 느끼며 차근차근 계단을 올랐다.
“강주혁 씨....”
“그래.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내 이름 안 불러도 돼.”
계단 오르랴, 나은이한테 대답해 주랴. 주혁의 몸은 2배로 정신없었다.
겨우 2층으로 올라온 주혁은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열쇠.”
“열쇠? 열쇠 제 가방 앞주머니에....”
나은의 말에 주혁은 지퍼를 열고는 그녀의 가방 앞주머니를 뒤적였다.
대충 집 열쇠를 추정되는 것을 찾고는 주혁은 열쇠를 문고리에 꽂았다.
이윽고 열쇠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가자 주혁은 문을 열곤 그녀의 집으로 들어섰다.
텅 빈 집이 두 사람을 반겼다. 아무래도 그녀 혼자 사는 것 같았다.
나은의 집은 집이라기에 뭐한 단칸방이었다. 그래도 싱크대며, 화장실이며, 있을 건 다 있었다.
주혁은 신발을 벗곤 방 안에 발을 내디뎠다.
문지방을 넘어 이불이 한데 모인 곳에서 이불 하나를 빼고는 바닥에 깔았다.
주혁은 천천히 깐 이불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주혁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르며 나은을 보면, 나은은 여전히 꿈나라에 빠져있었다.
“누군 이렇게 고생했는데, 누군 이렇게 잘도 자네.”
세상물정 모르고 잠든 그녀를 보며 주혁은 픽 웃었다.
“강주혁 씨...”
“왜.”
제가 이 은혜 꼭 갚을게요...
나은은 잠꼬대를 하며 헤헤 웃었다. 술에 취했어도 그가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모양이다.
“그래. 그 말 꼭 지켜.”
주혁은 싱긋 웃었다. 아마 그런 나은이 귀여웠던 모양이다.
주혁은 조심이 그녀의 머릿밑에 베개를 놓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신고 있는 하이힐을 벗겨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힐을 현관에 내려두곤, 주혁은 집을 나가기 전 그녀의 방을 둘러보고는 이내 집을 나갔다.
삐ㅡ 삐ㅡ 삐ㅡ 띠리링ㅡ.
잠금장치가 열리자 주혁은 터덜터덜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하아....”
주혁은 고된 한숨을 쉬며 옷을 털었다.
거실 쪽으로 눈을 돌리니 깜깜한 제 집안이 보였다.
“....”
이상하다. 분명 나은의 집과 제집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주혁은 자신이 집이 어째 더 쓸쓸해 보였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각에 주혁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자신의 집이 넓다고만 생각했지, 삭막하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주혁은 제 집안에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오늘 밤은 보일러를 약간 틀어야겠다.
깨끗이 샤워를 하고, 주혁은 침대에 누웠다.
나은을 집까지 데려다주니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참.”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주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이상한 여자야.”
주혁은 그리 말하곤 잠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소리가 옅어지더니 그 또한 잠이 들었다.
자박자박. 풀 밟는 소리가 낙엽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소년은 갓을 쓰고 있었으며, 한복을 입고 있었고, 뒷짐을 지고 있었다.
소년의 머리 위로 산들바람이 불었다. 소년은 어딘가를 향해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 소년은 걸음을 멈췄다. 소년의 앞에서는 소녀가 꽃과 나비와 어우러져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온 것도 모른 채 꽃과 놀고 있는 소녀를 보며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애써 입술을 누르며 참았다.
소년은 살금살금 걸어가 소녀의 뒤에 섰다. 그리고 소녀에게 가까이 가 소녀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엇을 그리 어여삐 보고 있느냐?”
소년의 물음에 깜짝 놀란 소녀가 홱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오라비가 저를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뭐예요. 깜짝 놀랐지 않습니까.”
이제야 안심이 된 소녀는 작게 투정을 부리며 소년에게 말했다.
“세연이 네가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데, 어떻게 장난을 치고 싶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장난대로 깜짝깜짝 놀래 주니 이보다 재밌을 수 없었다.
소년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소년의 입에서 소녀의 이름이 나왔다.
“치.”
소년의 말에 소녀는 소년을 밉지 않게 흘겼다.
“저도 언젠가 오라버니한테 복수할 것입니다. 그러니 두고 보십시오.”
소녀의 당찬 포부가 싫지만은 않은 듯, 소년은 짧게 웃었다.
“그래, 어떻게 복수할 것이냐?”
“저기 나무가 보이십니까? 저기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소원을 들어주는 겁니다.”
소녀는 손마디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겁니다. 하나, 둘!”
소녀는 둘을 외치고는 셋을 기다리는 소년을 뒤로하고 뛰었다.
“오라버니!”
소녀는 반쯤 뛰고선 뒤로 돌아 소년을 불렀다.
“오라버니! 얼른 오십시오!”
소녀는 소년을 부르며 팔을 높이 뻗어 흔들었다. 입가에는 꽃처럼 예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도영 오라버니!”
그리고 소녀는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는 다시 뒤로 돌아 치맛자락을 잡곤 뛰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어두운 방 안. 주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