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혁은 시끄러운 음악을 피해 아까처럼 크게 돌아갔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일하냐.”, “몸 좀 쉬어가면서 해라.” 해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소녀의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일에 집중하면 그나마 괜찮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주혁은 지독한 워커홀릭이 되기를 자처했다.
주혁은 bar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2층으로 진열된 술잔들이 조명을 받아 예쁜 색을 띠었다.
주혁은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이거라도 마시면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혁은 손을 뻗었다.
‘휙.’
술잔을 집으려는 순간, 다른 손이 나타나 그가 집으려는 술잔을 가로챘다.
주혁은 옆을 보았다.
여자가 술을 털어 넣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쓸고 있었다.
주혁은 선수를 빼앗긴 것에 기분이 상했지만, 어차피 술은 많으니 다시 손을 뻗었다.
‘휙.’
하지만 그가 술잔에 손이 닿기도 전에, 또 그녀가 저가 집으려던 술잔을 집고는 입에 털어 넣었다.
‘허, 참.’
주혁은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기분 나쁜 우연에 주혁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리에도 술이 있으면서 왜 하필 제 자리 쪽, 그것도 저가 집으려는 술잔만 쏙쏙 채 가는지.
“저기, 이봐요.”
주혁은 여자를 불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 * *
주혁의 부름에 나은은 주혁을 보았다.
“이쪽은 제 쪽에 놓인 술들이에요. 그러니까 그쪽은 그쪽 자리에 놓인 술을 마시면 감사하겠어요.”
주혁은 자신의 자리와 그녀의 자리 쪽에 놓인 술들을 톡톡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정도면 잘 알아들었겠지?
주혁은 이제야 됐다는 생각으로 맘 편히 제 앞에 놓인 술잔을 집었다.
“.....”
나은은 말없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술을 들이켜려던 주혁의 행동이 멈췄다.
주혁은 다시 나은을 보았다.
“그렇게 빤히 보고 있으면 제가 술을 못 마시잖아요. 그러니 좀 앞을 바라봐 주시면...,”
좋겠어요. 주혁은 최대한 친절하게,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딱 거기까지 말하려 했다.
“으으....”
하지만 그때, 그녀가 갑자기 울려는 것이 아닌가!
뭐가 그리 억울한지 나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주혁은 당황했다.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냥 그쪽 자리에 있는 술 마시라고 한 건데.
졸지에 여자를 울린 나쁜 놈이 돼버린 주혁은 이 상황을 어쩌지 못했다.
“저기, 일단 진정하시고. 제가 말이 심했다면 사과...”
“윤지야!”
주혁이 그녀를 달래던 도중 나은이 윤지를 부르며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윤지야, 나 너무 짜증 나. 그 자식들 미워 죽겠어.”
나은은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주혁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너희들 앞에선 괜찮은 척했는데, 사실 거짓말이야. 나 너무 속상하고 슬퍼. 으어엉.”
술에 취하니 속에 담아 두었던 진심이 훌훌 나왔다. 나은의 감정이 격해지더니 울음 또한 거세졌다.
한편 그녀의 돌발행동에 주현은 당황 그 자체였다.
아까는 울어서 당황했는데, 지금은 제 품에 안겨들어서 더 당황스럽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아마 술에 취해 자신을 제 친구로 착각했나 보다. 나은의 뜨거운 눈물이 주혁의 와이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주혁은 그녀를 떼어놓았다. 안타깝지만 그는 그녀를 달래 줄 위인은 되지 않았다.
“윤지야...”
“나 윤지 아니야. 나는 강주혁이라는 이름이 있어. 내 얼굴을 봐. 내가 아직도 네 친구로 보이는지.”
주혁은 그녀의 어깨를 잡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시야가 뚜렷해지더니 웬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어? 윤지가 아니네?”
이제야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안 나은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큽.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했나 봐요.”
“알면 됐어.”
주혁은 그제야 뿌듯한 미소를 짓고는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정말 죄송합니다아ㅡ”
나은은 여전히 코를 훌쩍이는 상태로 그에게 사과했다. 어찌 됐건 모르는 사람 품에선 실례를 저질렀으니 사과를 하는 건 당연할밖에.
“아니야, 괜찮아. 그쪽도 실수로 그런 건데 그럴 수도 있지. 난 이만 갈 테니까 그쪽은 술을 더 마시든, 울든, 마음대로 해.”
‘난 다 이해해’라는 얼굴로 주혁은 넓은 아량을 베풀 듯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따뜻한 배려, 감사합니다.”
나은은 한껏 감동받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주혁은 말없이 손을 살짝 들어주는 것으로 그녀의 인사에 보답했다.
나은은 앞으로 의자를 돌렸다.
세상엔 참 따뜻한 사람들이 많아. 나의 잘못을 이렇게 보듬어 주다니.
나은은 제 잘못을 용서해 준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술을 더 마시기로 했다.
“혼자 오셨나 봐요.”
한 잔의 술을 들이키고 있는 나연에게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누구세요?”
나은은 붉어진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저요? 그냥... 그쪽을 향해 다가온 남자?”
남자는 느끼한 멘트를 날리고선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꽤 서럽게 우시던데.”
“네. 아, 제 소리가 컸다면 사과드릴게요.”
나은은 또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남자를 보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니에요. 굳이 사과까지 할 필욘 없어요.”
남자는 사과를 하는 나은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냥 뭐랄까... 그 모습이 제 마음을 자극하더군요.”
남자는 서럽게 울어대던 그녀를 생각하며 아련한 눈빛을 지었다.
“제가, 그쪽을 자극했나요?”
“당신의 우는 모습을 보며 제 마음 또한 같이 아파졌어요. 너무 찢어질 듯 아파서 순간 괴로웠어요.”
이번엔 남자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찢어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내 아픔을 같이 느껴주다니.
순간 나은은 점술사가 말한 ‘조만간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혹시 그쪽이 제 인연인가요?”
나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인연이요? 아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당신을 만나기 위해 제가 이곳을 왔나 봐요.”
다행이다. 이 남자가 바로 점술사가 말한 자신의 인연이 될 남자인가 보다.
나은은 설핏 웃었다.
“고마워요. 저한테 이렇게 와주셔서.”
“아닙니다. 인연을 만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요? 그런데 우리, 여기 있지 말고 좀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게 어떤지...”
“....네?”
“아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전 그저 좋은 의미로 말하고자...”
“좋은 의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이 여자한테 무슨 수작질이야.”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주혁의 등장에 나은은 놀란 얼굴을 지었다. 주혁은 남자의 말을 끊곤 나은을 보았다.
“너, 따라 나와. 내가 술 마시거나 울거나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했지 다른 남자랑 대화하라고는 안 했어.”
주혁은 나은은 손목을 잡고는 그대로 클럽을 나갔다.
“뭐야? 저 남자. 갑자기 튀어나와선.”
툭 튀어나온 주혁 때문에 남자는 황당한 얼굴을 지었다.
“에이, 아깝게 고기만 놓쳤네.”
그리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는 신경질을 냈다.
“왜 이러세요. 이거 놔줘요.”
나은은 말없이 손목을 잡고 클럽 밖으로 나온 그의 뒷모습을 보며 칭얼거렸다.
그제야 주혁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너 미쳤어? 아무리 속상하다지만 그 자식 말 그대로 듣고 있으면 어떡해.”
그냥 한번 뒤돌아본 건데, 그녀가 웬 모르는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얘기를 듣다 보니 여간 못 들어 줄 게 아니어서 주혁은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왜 소리를 질러요! 그냥, 그 사람이 내 얘기도 들어주고 술도 같이 하니까...”
내 얘기도 들어주고 내 속상한 마음도 이해해 줬는데. 그러니까 마음이 가는 건 당연하잖아.
“그래도 그렇지. 요즘 같이 세상 위험한 시대에 그러다 잘못되면 너만 손해인 거 몰라? 술도 취했는데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잠이나 자.”
주혁은 나은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너무해. 난 그저 내 얘기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었는데.
나은은 속상했다.
자신도 안다. 처음엔 몰랐지만 갈수록 이상해지는 그 남자의 말에 나은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제 아픔을 같이 느껴준다는 것에 나은은 위로가 되었다.
“...싫어요.”
“뭐?”
“싫다고요. 그쪽이 뭔데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세요? 그쪽이 대신 술 같이 마셔 줄 거예요?”
“너....!”
황당하다. 기껏 도와줬더니만 오히려 씩씩거리며 역정을 내는 꼴이 그저 기가 찰뿐이다.
아니야. 참자, 참아.
이 일로 화를 내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 주혁은 숨을 내쉬며 화를 다스리고는 나은을 보았다.
“그래. 같이 마셔줄게.”
“네? 지금... 뭐라 그랬어요...?”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못 알아들었어? 같이 마셔준다고. 네 얘기도 들어줄 테니까 이제 그만 화내. 눈물도 닦고.”
주혁의 말에 나은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술친구가 생겼다.
* * *
“자, 마셔.”
편의점에서 나온 주혁은 마련된 테이블에 초록색 캔을 내려놓았다.
“에이, 뭐예요. 술이 아니잖아요.”
분명 소주를 사와 달라고 했는데, 그가 산 것은 술이 아니라 사이다였다.
아까운 내 돈만 날렸네.
“술은 그만 마셔. 대신 이것도 여기서 톡 쏘는 거야.”
주혁은 손끝으로 목구멍을 짚으며 말했다.
“대신 네 돈은 도로 돌려줄게.”
“됐어요. 그냥 이거 마실게요.”
나은은 클립을 땄다. 치익, 하고 기포가 튀더니 이내 입이 벌렸다. 아쉽지만 나은은 사이다를 들이켰다.
“일단 대화하기 전에 제대로 소개부터 해야겠지. 난 강주혁이야. 아까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전 서나은이에요. 저야말로 말 함부로 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의 소개와 사과가 끝나고,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이제 나한테 말해 봐. 뭐 아까 속상하다, 그 자식들 미워 죽겠다한 것 까진 알겠어.”
그녀가 속상함에 토해낸 말을 토대로 주혁은 추리를 해나갔다.
분명 사연이 있으니 그녀가 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마셨겠지 하고 주혁은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 저랑 제일 친한 친구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세 명하고만 다니지만 예전엔 여자애 한 명, 남자애 한 명이 더 있었어요.”
나은은 윤지, 두나, 소라 말고도 두 명의 친구가 더 있었다.
정우와 은아.
정우는 그 무리 중 청일점이었고, 은아는 윤지처럼 부자인 데다 예쁜 아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했던 다섯 명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우정을 유지했다.
“그러다 저랑, 그 남자애랑 사귀게 됐어요.”
남녀사이에 친구 없다고, 고등학생 때부터 호감을 보인 두 사람은 정우의 고백 끝에 사귀게 되었다. 물론 그 뒤에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의 도움이 있었다.
“팔 년 정도 사귀었어요. 진짜 예쁘게, 남들처럼 알콩달콩.”
팔 년 정도면 사랑이 조금 사그라들 법도 하지만 두 사람은 초창기 연애처럼 깨가 쏟아질 듯 달달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걷던 도중이었다.
‘야, 쟤네 정우하고 은아 아니야?’
두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로 걸어오는 두 사람은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꿀 떨어질 정도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은 모습에 나은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은아...’
그리고 나은을 발견한 두 사람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은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 두 사람이 낀 팔짱을 보았다.
‘허.’
웃음이 나왔다. 이때까지 쌓아온 사랑과 우정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나은은 두 사람을 째려보고는 뒤로 돌았다. 그런 나은의 뒤를 친구들이 쫓았다.
“그러고선 완전히 인연 끊었어요. 둘 다 꼴 보기 싫어서.”
정우가 찾아오긴 했지만 나은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만 쌓여갈 뿐.
“그날 미친 듯이 울었어요.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밉고, 서럽고, 짜증 나고. 그 감정들이 다 섞여 나은은 실신할 정도로 그날 모든 눈물을 쏟아냈다.
“다음에 동창회가 있는데, 그 자식들한테 복수해 주고 싶어요. 제가 오늘 점을 봤는데 조만간 인연을 만날 거래요.”
나은은 당당히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잘난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니 너희 같은 것들 이제 신경쓰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 인연은 찾았어?”
“아니요. 못 찾았어요. 역시 저한테 그런 일은 안 일어나나 봐요.”
사람도 사람 나름이라고, 자신에게 그런 인연이 찾아올 리는 없었다.
“.....”
주혁은 말없이 나은은 응시했다. 어쩐지 그녀가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주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요?”
“술 마시고 싶다며. 소주 사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혁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은은 눈을 끔뻑였다.
*
“동해물과, 백, 두, 산, 이. 강주혁 씨, 우리 2차가요, 2차.”
나은은 주정을 하며 비틀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사주지 말걸.
소주 한 병이면 괜찮겠지 했는데, 소주 한 병에 그만 나은이 또 취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주혁은 어깨동무를 한 나은의 허리를 감싸고는 나은을 지탱했다.
“여기, 택시.”
전화로 부른 택시가 오고, 주혁은 택시를 세웠다.
주혁은 낑낑거리며 멈춘 택시에 나은을 넣었다.
“주소 어디야?”
주혁의 말에 나은은 웅얼거리며 주소를 말했다.
“들으셨죠? 거기로 가 주세요.”
주혁은 나은은 어깨를 두른 손을 빼내었다.
주혁이 택시에서 몸을 빼려는 찰나, 나은이 택시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던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녀의 행동에 주혁은 그녀를 보았다.
“가지 마요...”
나은은 눈을 감은 채 젖어 든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말고 있어요...
그 소리에 주혁은 그녀를 보다, 그녀가 붙잡은 옷깃을 보았다.
무엇이 그리 서글픈 것인지 옷깃을 잡은 그녀의 손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주혁은 그녀의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러질 못했다.